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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내 아내 (59/92)

59화. 내 아내2021.11.22.

“아……!”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던 패트리샤는 손바닥의 화끈거림과 함께 당혹감을 느끼며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테라비스!”

그리고 에델라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대신하여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 뺨을 맞은 제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놀란 것은 패트리샤와 에델라만이 아니었다.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비에라 자작 부인과 렌달프 남작 부인 또한 패트리샤의 갑작스러운 행동과 갑자기 나타난 테라비스 때문에 깜짝 놀라 굳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패트리샤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에델라가 자신에게 말대꾸하고 비난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양지로 기어 나오려는 에델라의 존재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에델라가 다시 양지로 나온다면, 그녀의 그림자가 길어질 것이고 자신은 또다시 그곳에 갇혀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것이었다. 집에서 부리는 하인들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에델라가 하인이 아니라는 것을 패트리샤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평민이긴 했지만, 루젠타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패트리샤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귀족 아가씨께서 손이 매우시군요.”

모두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테라비스였다.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것이 취미인 덕에 까맣게 그은 피부를 가진 테라비스임에도 불구하고, 패트리샤가 얼마나 세게 뺨을 때렸던지 이미 붉은 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뺨을 움직여 테라비스는 빙긋 웃고 있었다.

“부인,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급한 나머지 제가 당신을 밀친 것 같은데요.”

테라비스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나며 살뜰하게 에델라를 챙겼다.

“다치지 않았어요. 저는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에델라의 입에서 ‘덕분에’라는 말이 나오자 테라비스는 다시 씩 웃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길래, 같이 춤을 추고 싶어서 찾고 있었답니다.”

테라비스는 마치 뺨을 맞은 일도, 중간의 소란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평민인 테라비스가 귀족인 패트리샤에게 뺨을 좀 맞았다고 해서,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그것이 계급이었고, 그것이 신분제였다. 테라비스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럼 갈까요, 부인?”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부수려 한다면 자신이 오히려 부서질 벽을 테라비스는 굳이 부수려 들지 않았다. 제 주먹이 깨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생길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벽이 있으면,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래요.”

에델라는 그런 테라비스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

에델라와 함께 그 자리에서 막 빠져나가려던 테라비스는 잊은 것이 있는 사람처럼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아직도 굳은 얼굴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3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질문하신 것을 제가 대신 대답해드려도 될까요?”

“무슨 질문을 말씀하시는 거죠?”

“천박한 돈맛을 알더니, 귀족의 품위는 다 잊으신 거냐고 질문하지 않으셨습니까?”

테라비스의 말에 패트리샤는 입은 벌렸지만, 대꾸는 하지 못했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대답을 바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기어이 대답할 참이었다.

“제 아내는 그다지 천박한 돈맛을 보지 못했답니다. 저는 그 맛을 보여주려고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지 도통 맛을 보려고 하지 않아서 말이죠.”

인간은 맨손으로 벽을 부술 수는 없었다. 다만, 벽에 낙서한다거나 흠집 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래서 여전히 우아하고, 여전히 아름답죠. 제 생각에는 지금보다는 조금 덜 예뻐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테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정말 사랑스럽다는 듯이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의 눈에는 저 세 사람 따위는 보이지도 않고, 오직 에델라만 보인다는 듯이.

“아주 부인 자랑이 대단하시네요.”

테라비스의 시선을 깨트린 것은 비에라 자작 부인의 비꼬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부인을 생각하시는 분이 왜 부인에게 허드렛일을 시키시는지 모르겠네요.”

“허드렛일이요?”

“어머, 모르셨어요? 바넬레오 부인께서 아직도 바느질 일감을 받아다가 푼돈을 버는 모양이던데요.”

그녀의 폭로에 에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테라비스에게는 비밀로 했던 일이었는데, 조금 전에 너무 화가 나서 그 일을 말해버린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아~ 그 일 말입니까?”

하지만 테라비스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것은 오히려 에델라였다. 그에게는 비밀로 했었는데?

“저도 그 일은 반대했습니다만, 제 아내의 재능이 워낙에 아까워서 말이죠.”

“재능이요?”

“네. 재능기부 차원에서 하는 것뿐이죠. 예전에 일했던 곳에서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워낙에 착하다 보니 거절을 잘하지 못하거든요.”

사실, 테라비스는 비에라 자작 부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상황에 맞춰서 말하는 것뿐이었다. 최대한 에델라에게 유리하도록 말이다. 그는 웃으며 에델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것도 참 걱정이긴 합니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착하기까지 하다니, 사람이 맞는 건지 당연히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가끔 등에 날개가 있는 건 아닌지 몰래 살펴보기도 한답니다.”

테라비스의 도를 넘어서는 부인 자랑에 렌달프 남작 부인은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고, 비에라 자작 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패트리샤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보다 못한 패트리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아마도 제 인생의 운을 결혼에 다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이런 완벽한 부인을 만나는데 운을 다 쓴 것이 전혀 아깝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패트리샤가 자신을 거들어줬다는 듯이 손가락 스냅을 딱! 소리 나게 하고는, 다시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눈빛으로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3명의 부인은 테라비스의 그 시선을 못 견디겠다는 시선으로 에델라와 테라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이러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끝나겠어요. 갈까요, 여보?”

“그래요.”

에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라비스는 웃으며 가시가 돋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3명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좋은 대화 나누시길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테라비스는 그녀들에게 웃어주었다. 별로 힘든 것도 아니었다. . . .

“괜찮아?”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에델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가?”

테라비스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에델라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태도에 에델라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뺨이 빨갛게 부었어. 아프지 않아?”

테라비스의 얼굴 근처로 손을 올린 에델라는 이제 빨갈 뿐만이 아니라, 부어오르기까지 한 그의 뺨에 차마 손을 대지는 못하고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별로. 이것보다 더 험한 일도 나는 겪어봤거든.”

여전히 별것 아니라는 듯이 테라비스는 눈썹까지 위로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다 명백히 어떤 감정이 깃든 눈으로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당신도 알잖아?”

테라비스가 히죽, 웃었다. 그 어떤 감정이란 바로 ‘장난’이었다. 혹은 ‘놀림’.

“내가 뭘 안다는 거야?”

그 기운을 감지한 에델라는 슬그머니 경계하며 물었다. 에델라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 질문을 한 것이, 이미 테라비스가 던진 미끼를 문 것이라는 것을.

“‘내 남편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라며.”

“…….”

에델라의 입이 놀라서 살짝 벌어졌다. 그걸 들었단 말인가? 대체 언제부터 테라스에 있었던 거지? 에델라는 미처 몰랐지만 테라비스는 거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녀가 샤를리안을 밀쳤을 때, 그리고 도망쳤을 때, 테라비스는 무슨 일인지 묻기 위해서 에델라를 쫓았었다.

“날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니, 그것도 알 것 아닌가?”

“그게……. 아니, 나는……. 그게!”

에델라는 어떤 변명을 하려고 했다.

“‘제 남편이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했던 말을 테라비스가 또 되짚는 통에 입은 다시 다물어지고 말았다. 대신 에델라의 얼굴이 붉어지고, 그녀의 귀가 붉어졌다. 예쁜 분홍빛이었다. 테라비스가 제일 좋아하는.

“당신이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줄은 몰랐는데?”

에델라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며 테라비스는 다시 웃었다. 조금 전의 상황에서도 그가 계속 웃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에델라가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줬다는 사실이, 너무나 유쾌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이니까.”

분홍의 뺨과 분홍의 귓불을 한 에델라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테라비스를 직접 쳐다보고 그의 칭찬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지만, 에델라는 용기를 냈다. 테라비스가 그들의 말을 처음부터 들었다면 그 말에 상처를 받지 않기를 원했다.

“스스로 노력한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야. 제 손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그 말은…… 당신이 날 존경한다는 거야?”

에델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인 당신이, 평민인 나를?”

이번에도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델라.”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라 탄식과 같은 한숨과 에델라의 이름이 함께 테라비스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입술은 에델라의 입술을 찾았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말해주고,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해준 아름다운 입술을. 닿은 입술은 조금 메말라 있었지만, 부드러웠다. 지긋이 테라비스가 그 형체를 짓누르자 부드럽게 모양을 달리했다. 천천히 에델라의 입술을 테라비스의 입술이 머금자, 그것은 이내 촉촉해졌다.

“에델라.”

잠시 입술이 떼어진 순간,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에델라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자신이 키스하고 있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단단히 각인하려는 듯이. 그리고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다시 입을 맞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마찰하고, 따뜻한 숨결이 서로 오갔다. 새어 나가는 숨소리가 아까워서 삼키고, 서로의 온도를 나눴다. 그래도 부족해서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것에 호응이라도 하듯, 에델라는 그의 목에 제 손을 둘렀다. 키스는 다시 이어졌다. 테라비스는 좀 더 깊게 에델라의 숨결을 들이마셨고,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 더욱 매달렸다. 마치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이처럼. 마치 진짜 부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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