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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내 남편 (58/92)

58화. 내 남편2021.11.19.

  에델라는 정신없이 걸었다. 그저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샤를리안이 알아버렸다.

‘변명이라도 해야 했었나?’

에델라와 테라비스의 결혼이 계약에 의한 것이라는 걸.

‘테라비스에게는 또 뭐라고 말을 해야 해?’

어쩌면 그는 화를 낼지도 몰랐다. 테라비스가 얻고자 한 것이 그저 이름뿐인 작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작위를 통해서 루젠타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평판, 그리고 귀족 인맥을 얻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이 계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테라비스의 사회적 평판은 더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좋아?’

에델라는 비틀거리며 테라스를 향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생각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정말이지 뻔뻔하기 그지없죠.”

에델라가 테라스로 나가는 문에 손을 댄 순간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테라스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귀에 송곳처럼 파고드는 순간, 에델라의 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바로 그 목소리였다. 지난번 포웨이스 남작의 무도회에서 에델라의 험담을 했던 그 여자가 여기에 있었다.

“도대체가 귀족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예로니아라는 이름이 아깝다니까요.”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에델라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라서 면역이라도 생긴 걸까? 에델라는 지난번처럼 손이 떨리지도, 계속 굳어 있지도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뒤로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그대로 그 자리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다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에델라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둘이 잘 만난 거죠. 그 천박하기 그지없는 남자는 귀족의 품격이나 명예 따위는 모를 테니까요.”

앞의 여자는 누군지 몰랐지만, 두 번째 목소리는 누군지 에델라는 금방 알아차렸다. 오늘 이 무도회의 주체자인 비에라 자작 부인이었다.

“귀족의 초대장도 돈으로 사는 꼬락서니를 보세요. 그래놓고선 감히 자기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죠.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졸부 주제에 말이에요.”

에델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테라스 쪽으로 돌아섰다. 유리창 너머로 부인 셋이 사이좋게 자신과 테라비스의 험담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비에라 자작 부인인 것이 확실한데, 다른 두 명은 그녀의 몸에 가려져서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에델라 쪽이 더 심하죠. 태생이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여자는 스스로 제 명예를 제가 더럽히고 있으니까요.”

이건 참을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을요. 그 천박한 장사치 쪽이 더 심하죠. 감히 우리와 어울리려고 하잖아요. 전 그 남자가 제 주제를 알도록 한번 자근자근 밟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건 참을 수 없었다.

“제 남편의 주제가 뭔데요?”

에델라는 테라스의 창을 열고 그곳으로 성큼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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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 명의 부인이 에델라의 등장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험담하고 있던 당사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한 번 놀랐고, 이제껏 많은 험담을 해왔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두 번 놀랐다.

“바넬레오 부인, 지금 우리 이야기를 엿들으신 건가요?”

“배운 귀족 영애가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참으로 무례하시네요.”

“맞아요! 그건 예의에 어긋나죠.”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되레 에델라에게 항의했다. 보통의 귀족들은 자신의 험담을 듣더라도 듣지 못한 척을 했다. 험담을 당연히 그 사람 앞에서 할 리가 없었고, 그것을 들었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엿들은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들어도 못 들은 척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가서 혼자 분을 삭이거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악용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대놓고 험담을 하며 괴롭히는 못된 사람들도 있었다.

“평민과 결혼을 하더니, 귀족의 예의범절도 다 잊으신 건가요? 참으로 부끄럽네요.”

패트리샤는 자신이 다 수치스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물론, 정말 수치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에델라에게 무안을 주기 위해서 과장된 행동을 한 것이었다.

“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에델라는 패트리샤의 그런 행동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테라비스의 욕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부끄럽다는 생각했기에 나선 것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제가 부유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여러분보다 배움이 짧을 수 있고, 학식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예의와 범절 또한 그럴 수 있습니다.”

결코, 배움이 짧지 않았고 학식이 모자라지 않았지만, 에델라는 그렇게 말했다. 당당한 에델라의 태도에서도 그것은 묻어나왔다.

“이렇게 모자란 저도 한 가지 아는 사실이 있다면, 제 남편은 여러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비에라 남작 부인.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것이 나쁜 일인가요?”

“네?”

“제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고생하며 일해서 지금의 자리에 올랐어요. 남에게 피해 끼친 것도 하나도 없고, 전부 본인의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죠. 전 그 사람이 본인이 이뤄낸 것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요?”

자격이라는 말에 비에라 자작 부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평민이 무슨 자격이 있다는 거죠?”

“자기가 번 돈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쓸 자격이요. 이를테면 아주 비싼 보석을 산다거나, 정당하게 받은 초대장을 사용할 자격이요.”

“감히 평민 주제에 그게 가당키나 한가요?”

“네. 감히 평민 주제이긴 합니다만, 사유재산과 자유가 있는 평민이죠. 게다가 제 남편은 여러분들보다 훨씬 훌륭한 평민입니다.”

“바넬레오 부인! 지금 제정신이신가요? 지금 누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 건가요?”

비에라 자작 부인은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감히 그 천한 장사치가 귀족인 자신보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이제껏 곱게만 자라온 그녀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정확하게 알고 하는 말입니다.”

그에 비해서 에델라는 침착했다. 자신이 한 말대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거짓말쟁이와.”

비에라 자작 부인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에델라는 말했다.

“비겁한 험담꾼.”

시선을 돌려 패트리샤를 쳐다보며 에델라는 다른 단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침묵하는 겁쟁이보다.”

에델라와 테라비스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 이야기들을 부정하지 않았던 렌달프 남작 부인을 에델라가 또렷이 쳐다보자 그녀는 무안한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스스로 노력해서 제가 원하는 바를 이뤄낸 제 남편이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델라는 그 셋을 쳐다보며 마지막 말을 했다.

“거짓말쟁이라니 지금 무슨 근거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지금 그 발언에 책임지실 수 있으신가요?”

에델라가 자신에게 씌운 혐의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비에라 자작 부인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에델라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작 부인께서 오늘 무도회를 위해서 직접 수놓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한, 홀의 한쪽에 걸어두신 비에라 저택의 정원 풍경 자수 작품을 근거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게 뭐가 어때서……!”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비에라 자작 부인이 일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뭔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는 것처럼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는 눈보다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수예, 정말 부인께서 직접 수놓으신 건가요?”

“그게…….”

“어느 자리에 무슨 색의 실을 사용하셨는지, 연못의 돌은 왜 본래의 돌 색과 다른 색상을 사용하셨는지, 제가 묻는다면 대답하실 수 있으신가요?”

“…….”

그럴 수 없었다. 초대 손님들에게 자신이 이 무도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으며, 자신이 얼마나 재주가 많은 사람인지를 뽐내고, 동시에 교양있는 귀부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보인 그 자수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렇게 섬세하게 수를 놓는 재주가 없었고,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서 그러고 있을 사람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가난한 예로니아 백작 영애가 돈을 벌기 위해서 바느질로 날품팔이를 했다는 것을. 에델라가 그 자수를 놓았거나, 적어도 자수를 보고 뭔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은 비에라 자작 부인은 에델라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보세요, 바넬레오 부인. 듣자 듣자 하니 더 들어줄 수가 없네요.”

기세가 꺾인 비에라 자작 부인 대신 나선 것은 패트리샤였다.

“도대체 이런 무례는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가여운 비에라 자작 부인께서 떨고 계시지 않습니까?”

실은 분노로 어깨를 떨고 있는 것이었지만, 패트리샤의 말에 비에라 자작 부인은 얼른 어지러운 척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패트리샤가 뭐 하려는 건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고 그런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정말이지! 천박한 돈맛을 보더니, 귀족의 품위마저 다 잃으신 건가요?”

패트리샤는 비틀거리는 비에라 자작 부인을 부축하며 말을 이었다. 마치 에델라를 변절자를 쳐다보듯이 노려보면서.

“누구신지는 모르겠…….”

“뭐라고요!”

억울했던 에델라가 입을 열자마자 패트리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서 에델라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비에라 자작 부인과 렌달프 남작 부인까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제가 누군지 모른다는 건가요?”

“죄송하지만, 저는 잘…….”

“정말 절 모른다고요?”

패트리샤의 반응이 너무 과격하여 이제까지 당당했던 에델라마저도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했고, 사교계 데뷔도 하지 못했으며, 친교 활동도 전혀 없었던 에델라는 루젠타 귀족들의 이름 정도는 알았지만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어릴 때 몇 번 마주쳤던 패트리샤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델라는 패트리샤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생 에델라를 자신의 콤플렉스로 여기며 살았던 패트리샤는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 엄청난 충격이었다.

“감히……. 감히!”

패트리샤는 곱게 다듬었던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일생에서 내내 걸림돌이던 여자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네까짓 게! 바닥으로 추락한 거지 같은 게!”

패트리샤는 그대로 에델라에게 달려들었다. 짝!! 피부와 피부의 거센 마찰 소리가 밤의 테라스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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