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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꿈속의 연인 (57/92)

57화. 꿈속의 연인2021.11.15.

  에델라는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비에라 자작의 무도회는 그야말로 성대했고, 참석한 사람도 많았다. 그 말은 테라비스가 인사하고 싶은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였다. 춤을 한 곡 추고 나서는 그야말로 인사의 물결이었다. 쉼 없이 많은 사람과 인사를 하고, 끝없이 자기소개하고, 미소 띤 얼굴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경험이 별로 없는 에델라에게는 더욱 어려웠다.

“어머, 여기서 다시 뵙게 되네요, 바넬레오 부인.”

“또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렌달프 남작 부인.”

“우리 약속은 잊지 않았겠죠? 장미가 만개하면 저희 정원에서 같이 차를 마시기로 했잖아요?”

“물론이죠.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면 꽃이 활짝 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다음 주 좋죠.”

에델라는 웃으면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다비아 번역일도, 녹스가 구해다 주는 자수 일도 없어서 지금의 에델라는 그야말로 한가했다.

“바넬레오 부인께서는 차는 뭘 좋아하시나요?”

“차는 다 좋아해요. 허브차도 좋아하고, 홍차도 좋아한답니다. 부인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전 과일 차를 좋아해요. 우리 집 하녀 중의 하나가 과일청을 아주 잘 만들거든요.”

“그것참 맛있겠네요.”

“그럼, 커피는 어떠신가요?”

에델라와 렌달프 남작 부인의 대화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커피요? 그건 소문만 들어보았지, 먹어보지는 않았는데요.”

“드셔보신다면 틀림없이 좋아하실 겁니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한 뒷맛이 일품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렌달프 남작 부인은 처음 보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독특한 억양을 가진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그가 불쑥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는데도 대화를 이어간 것이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안다비아에서 온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라고 합니다.”

“아하!”

샤를리안의 소개를 들은 렌달프 남작 부인은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조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에델라를 쳐다보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렌달프 남작 부인은 15년 전, 예로니아 저택에서 열린 약혼식의 참석자였다. 귀여운 꼬마 커플을 보며, 자신도 저런 예쁜 아이를 낳고 싶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꼬마 커플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 만났지만,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흥미진진한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

에델라는 렌달프 남작 부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굳이 자신의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건 샤를리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전 커피에 대해선 문외한인지라, 두 분이 좋은 대화를 나누시는 게 좋겠네요.”

“아,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에요. 전…….”

“아니면, 저와 한 곡 추시는 건 어떨까요?”

에델라가 자리를 피하려는 것을 알아챈 샤를리안은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춤 신청에 에델라는 더욱 당황했다.

“또 거절하시려는 건가요?”

자못 애달픈 목소리로 샤를리안이 이야기하자, 옆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렌달프 남작 부인이 ‘또’라는 단어에 눈을 빛냈다.

“엔젤로테 백작님. 저는 사교계가 익숙하지 않아 춤을 잘 추지 못한답니다.”

에델라는 에둘러서 샤를리안의 춤 신청을 거절하려 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리 썩 잘 추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에델라와 꼭 춤을 추고야 말겠다고 이미 결심한 샤를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음악이 시작되었습니다, 레이디.”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에델라의 손을 샤를리안이 붙잡았다. 에델라가 당황하는 사이 이미 샤를리안은 그녀를 홀의 중앙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엔젤로테 백작님.”

에델라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잡아 빼려 했을 때는, 이미 춤추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네게 할 말이 있어.”

에델라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샤를리안은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 거야.”

“네?”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틀림없이 네가 곤란해질 테니까 이러는 거야.”

샤를리안의 말에 에델라는 다시 망설였다. 그의 눈빛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요.”

에델라는 입술을 꼭 깨물며 샤를리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샤를리안은 그런 에델라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꿈꿨던 순간인지 몰랐다. 에델라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녀와 춤을 추는 것도.

“에델라.”

그리고 이렇게 에델라의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두 샤를리안이 꿈꿔왔던 순간 중의 하나였다.

“할 말이라는 게 뭔가요?”

“왜 이렇게 급해?”

속삭이듯 빠르게 이야기하는 에델라를 보며 샤를리안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더 느긋하게 이 시간을 즐기면 안 되겠어?”

“무슨 시간요?”

“너와 내가 춤을 추는 시간.”

“엔젤로테 백작님.”

“샤를이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낯간지럽다면, 샤를리안도 괜찮아.”

“엔젤로테 백작님.”

샤를리안은 이전에 만났을 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에델라의 입에서 나온 ‘엔젤로테 백작님’은 이상하게도 자신 같지 않았다. 그녀에게만은 ‘엔젤로테 백작님’이 아니라 ‘샤를’이라고 불리고 싶은 샤를리안이었다. 하지만 에델라는 더욱 단호하게 ‘엔젤로테 백작님’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날 딱딱하게 부르는 거야? 아니라고는 했지만, 아직 날 원망하고 있는 거야?”

“그런 감정은 없어요.”

그건 사실이었다. 애초에 에델라는 한 번도 샤를리안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하기만으로도 급급했고, 조금 더 자라서는 현실에 적응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더 커서는 그저 현실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누군가를 원망할 여유도 없었다. 에델라에게는 원망마저도 사치였다.

“그럼 왜 나에게 그렇게 쌀쌀맞게 구는 거야?”

“사람들의 시선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지? 난 그런 것보다 네가 더 중요해.”

이미 붙잡고 있는 에델라의 손을 더욱 꼭 잡으며 샤를리안이 말했다.

“엔젤로테 백작님.”

“샤를리안.”

“…….”

“그렇게 불러줘, 에델라.”

거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이었다. 그만큼 샤를리안의 목소리는 애절했고, 그의 눈빛은 애틋했다. 하지만 에델라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고, 그의 눈빛은 외면했다. 에델라의 거절에 샤를리안은 더욱 애가 탔다.

“다 알고 있어.”

“뭘 알고 계신다는 거죠?”

“네 결혼.”

샤를리안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말에 에델라의 발이 멈칫했다.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루젠타에서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저 먼 안다비아에서 온 샤를리안이 자신의 결혼에 대해서 뭘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에 에델라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뭘…… 알고 있다는…….”

물어보는 에델라의 입술도,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랐다. 결혼식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고, 현재 결혼 생활에 대한 어떤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너와 그자의 결혼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러나 샤를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에델라의 발을 멈추게 했다.

“계약 결혼이잖아.”

흔들리는 에델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샤를리안은 끝내 자신이 아는 진실을 토해내었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했다. 잘못 알고 있는 거라며 잡아떼야 했다. 하지만 에델라는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굳은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샤를리안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을 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델라. 그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지?”

사실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이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들킬 것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에델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위험해.”

뒷걸음질을 치던 에델라가 춤을 추고 있던 다른 누군가에게 부딪히려고 하자, 샤를리안은 얼른 에델라의 팔을 붙들어 그대로 잡아당겼다. 그에게서 물러나려던 에델라는 자기 생각과는 반대로 샤를리안의 쪽으로 끌어당겨 졌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

샤를리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품에 들어온 에델라를 감싸 안았다. 그것만은 샤를리안이 꿈꿔왔던 것과 달랐다. 왜냐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았으니까. 어떤 점이, 어떻게 좋았냐고 샤를리안에게 묻는다면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좋았다. 에델라가 자신의 품속에 있는 이 순간이, 샤를리안에게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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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습니다, 엔젤로테 백작님.”

하지만 샤를리안의 시간은 깨어졌다. 에델라는 두 손으로 샤를리안을 밀어내며,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왔다. 그것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에델라는 알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샤를리안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에델라와 샤를리안의 약혼과 파혼은 루젠타에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 루젠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아는 이야기였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작은 항구도시에서 이 둘의 재회는 너무나 자극적인 이야깃거리였다. 모두가 주목할 만큼.

“넘어질 뻔한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에델라는 그 주변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크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에서 동시에 실망이 어리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에델라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샤를리안은 웃으며 그녀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춤은 여기까지인 것이 좋을 듯하네요. 저는 잠시 바람을 쐬며 쉬어야 할 듯합니다.”

“그럼 제가 테라스까지 에스코트해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 혼자 가고 싶네요.”

샤를리안이 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에델라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의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샤를리안은 어쩔 수 없이 에델라가 사라진 방향만을 쳐다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

하지만 괜찮았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에델라를 이제는 직접 보고, 듣고, 제 품에 안아보기까지 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물러서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곧 에델라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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