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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비에라 자작의 무도회 (56/92)

56화. 비에라 자작의 무도회2021.11.12.

“아니, 저놈이 여길 왜?”

입구에 한 쌍의 커플이 나타나자 주시하고 있던 비에라 자작의 인상이 단박에 찌푸려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아름다운 외모와 화려한 차림새가 그의 무도회를 빛내줄 것처럼 보였다.

“저 천박한 것이 이제 올 곳, 못 올 곳도 구분을 못 하나 보군.”

문제는 그가 비에라 자작의 라이벌이라는 것에 있었고, 더 문제는 비에라는 그의 출신을 문제 삼아 라이벌이라고 불리는 것도 극도로 싫어하는 데에 있었다. 그 사실을 루젠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당연히 비에라는 오늘 무도회에 그들을 초대한 적도 없었다.

“처리해.”

비에라 자작은 자신이 나설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턱짓으로 시종에게 지시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네, 자작님.”

그의 지시를 받은 시종이 입구 쪽으로 걸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특유의 그 능글맞은 미소로 제 품에서 뭔가를 꺼내 시종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시종이 당황한 표정으로 비에라 자작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뭔가가 있음을 짐작한 비에라는 직접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 뻔뻔한 작자에게 모욕을 준 다음 이곳에서 쫓아내고 말리라 다짐하면서.

“길을 잘못 든 모양이지? 여기는 평민들이 다니는 싸구려 술집이 아니라 고귀한 분들이 모이는 무도회라네, 바넬레오.”

비에라 자작은 그야말로 썩은 미소와 함께 테라비스에게 에둘러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알고 있습니다, 비에라 자작님. 저도 엄연히 초대를 받고 왔는데,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이제 과대망상증이라도 생겼나 보군. 자넬 여기 초대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말이야? 자기네 상단이 루젠타에서 가장 큰 상단이라는 헛소리를 하고 다닐 때부터 자네의 머리가 의심되긴 했었지.”

테라비스는 비에라 자작의 모욕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가당찮다는 듯이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그는 비에라 자작에게 대거리를 하는 대신, 시종이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초대장을 빼내어 그에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비에라 자작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것을 테라비스의 손에서 잡아챘다.

“이건?”

비에라 자작은 테라비스가 들고 온 초대장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분명 오늘 무도회의 초대장이었다.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훔치기라도 했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정확히 제가 받은 초대장입니다.”

테라비스는 빙긋 웃으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그곳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블루다이아몬드로 치장을 한 아름다운 에델라가 서 있었다.

“그걸 산 게……!”

그제야 비에라 자작은 모든 내막을 파악했다. 값비싼 블루다이아몬드를 살 정도의 자산가라면 자신이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것을 구매하는 사람에게 초대장을 사은품처럼 제공한 것이었다. 루젠타에서 그것을 구매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미 자신이 다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갑자기 외국의 어떤 귀한 분이나, 다른 도시의 자산가가 소문을 듣고 구매하러 온다면 어떻게 안면이나 틀까 싶어서 보험처럼 내건 무도회 초대장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자의 손에 들어가게 될 줄이야!

“비에라 자작님, 이렇게 성대한 무도회에 초대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테라비스는 이전에 에델라에게 배운 대로 그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누가 네놈을 초대했다고!!”

버럭 화를 내려는 비에라 자작의 얼굴 앞에 테라비스는 웃으며 초대장을 휘휘 흔들었다. 비에라 자작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지고,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해진 것은 테라비스가 원한 그대로였다.

“그럼, 천천히 즐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비에라 자작을 내버려 둔 채,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에스코트해서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저놈이!!”

비에라 자작이 뒤를 휙 돌았을 때는 이미 테라비스와 에델라가 사라진 뒤였다. 자신이 초대한 루젠타에서 돈 좀 있고, 힘 좀 쓰는 사람들 속으로. . . .

“맙소사! 아까 얼굴 봤어?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 해서 터질 것 같던데? 난 당장이라도 얼굴 밑에 내 손을 가져다 댈 뻔했어. 그 자작인지, 작자인지 하는 인간의 얼굴이 터지면 내 손으로 받아 내서 이 비싼 카펫을 더럽히지 않도록 말이야.”

테라비스는 유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연장자에, 귀족이라는 이유로 비에라 자작의 멸시와 모욕을 참아내야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당신에게 배운 대로 주인에게 인사는 했고.”

“그게 인사라고?”

“왜? 당신이 시킨 대로 말했잖아?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테라비스는 뻔뻔스럽게도 에델라의 물음에 어깨까지 으쓱이며 말했다. 자신은 당당했다. 초대장을 받았기에 이곳에 왔고, 에델라가 시키는 대로 주인에게 초대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를 초대한 적이 없는 비에라가 기막혀하는 것이나,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테라비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럼 다음은 춤을 춰야 하는 거지?”

테라비스가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은 지난번에 에델라가 자신에게 알려준 예법과 춤이었다. 비에라 자작의 손님들에게 자신이 그저 하찮은 평민이 아니라는 것을, 귀족들과 대화를 할 수 있고 거래도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야 했다.

“아름다운 부인.”

테라비스는 에델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부럽고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자신과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그에게 느껴졌다.

“부디 제게 부인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배운 대로 예의를 갖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귀족 출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르쳐준 에델라도 깜박 속을 만큼.

“좋아요.”

에델라는 우아하게 웃으면서 테라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자 테라비스 역시 그녀를 향해서 미소를 보여주었고, 두 사람은 홀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춤을 추는 두 사람을 향한 반응은 이전 포웨이스 남작의 무도회에서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한 쌍에 대해서 놀라워했고, 미소를 보냈으며, 원래 에델라와 테라비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수정했다.

“결혼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둘이 저렇게나 잘 어울릴 줄은 몰랐네요.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지금 보니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게다가 그 바넬레오가 저렇게 신사인지 전혀 몰랐네요.”

“예로니아 백작 영애는 어떻고요? 미인이라는 말이 이렇게 정확하게 쓰일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요?”

홀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웃으며 춤추는 테라비스와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을 때, 웃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는 했다.

“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뒤늦게 테라비스와 에델라를 발견한 비에라 자작 부인이 남편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저 인간을 초대했어요?”

“그럴 리가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아내를 향해서 비에라 자작은 짜증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저 ‘불쌍한 에델라’ 목에 걸린 게 뭔지 잘 봐.”

“목이요?”

비에라 자작의 말에 자작 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춤을 추고 있는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에델라의 목에 걸린 보석을 알아보았다.

“저걸 산 거예요? 저 비싼걸?”

비에라 자작 부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신도 갖고 싶은 물건이었지만, 너무 비싸다며 남편이 타박을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을 억지로 졸라서, 만약 돌아오는 자신의 생일까지 저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있다면 그가 사주겠다는 약조를 받은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을 저 ‘불쌍한 에델라’가 산 것이다. 자신의 생일 선물을!

“이게 무슨…….”

비에라 자작 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자신이 싫어하는 저 뻔뻔한 바넬레오가 자신의 저택에서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도, 저 가난뱅이 에델라가 자신도 사지 못했던 보석을 목에 걸고 있는 것도.

“어머, 바넬레오 부인이 한 보석 좀 보세요. 루젠타 보석상에 있던 그 물건 아닌가요?”

“어머, 맞네요! 그 블루다이아몬드예요!”

“어쩜~. 정말 예쁜 보석이네요.”

“게다가 바넬레오 부인에게 매우 잘 어울려요.”

마침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부인 하나가 에델라의 블루다이아몬드를 알아보았고, 그녀와 대화를 주고받는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드레스도 참 예쁘네요. 누가 만든 걸까요?”

“화려한 걸 보니 델리타 의상 샵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럴까요? 저 레이스는 이벳샤 의상 샵에서 잘 쓰는 것 같은데요.”

“바넬레오가 입은 남성복은 분명 수베어 의상 샵 것이 확실한 것 같지 않나요?”

“어머! 그 생각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예요. 얼마 전에 저희 남편의 정장도 그곳에서 맞췄는데, 원단도 너무 예쁘고 재단사의 솜씨도 아주 좋더라고요.”

“맞아요. 그곳의 보타이도 참 예쁘죠? 저도 곧 단골이 될 것 같아요.”

두 부인의 대화가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비에라 자작 내외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나오는 곳들은 전부 붉은바람 상단의 거래처였다. 비에라 상단과 거래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지금 찬양하고 있는 수베어 의상 샵은 얼마 전에 비에라 상단과의 거래를 끊고 붉은바람 상단으로 갈아탄, 비에라 자작에게는 거의 변절자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저 빌어먹을 바넬레오 놈이…….”

비에라 자작은 낮게 욕설을 지껄이며 주먹을 쥐었다. 자신의 무도회가 망쳐지고 있었다. 저 바넬레오 놈 때문에.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군.”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뜨거운 시선?”

“저쪽, 당신 뒤쪽에서 지금 비에라가 날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어.”

“뭐? 정말?”

“됐어. 쳐다보지 마.”

뒤를 돌아보려는 에델라를 만류하며, 테라비스는 그녀가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냥 더 즐겁게 무도회를 즐기는 척을 해. 그게 저 작자를 더 열받게 하는 길일 테니까.”

그리고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처럼,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향해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에델라와 춤을 추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다는 것처럼.

‘가끔 착각하게 돼.’

테라비스의 품에서 춤을 추며 에델라는 생각했다.

‘당신이 보여주는 친절이 날 착각하게 만들어.’

그가 준 선물이 그랬다. 몰래 산 구두, 집으로 보내 준 물건들, 마치 프러포즈처럼 끼워준 블루다이아몬드 반지. 그리고 에델라를 향해서 보여주는 환한 미소.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델라는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그에게 끌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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