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밝혀진 진실2021.11.08.
샤를리안은 아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고기가 뛰어놀던 작은 연못은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진 바닥을 내보이고 있었고, 무성한 수풀로 우거진 정원은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워 어린 에델라와 자신이 뛰어놀았던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에델라에게 화관을 만들어주었던 커다란 나무는 여전히 그곳에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또 좀 낡긴 했지만, 예로니아 저택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네, 백작님.”
샤를리안은 준비해온 선물을 직접 손에 들고 저택의 앞에 섰다. 그리고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한번 정원을 둘러보았다. 분명 테라비스가 루젠타에서는 손꼽히는 부자라고 들었는데, 예로니아 저택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예로니아 저택의 원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진짜…… 왔군요.”
저택의 문이 열리고 나온 사람은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었다. 어제 샤를리안으로부터 저택에 들려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전갈을 받긴 했지만, 그가 진짜 왔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의 얼굴을 보며 샤를리안 역시 놀랐다. 귀족의 저택이 으레 그렇듯, 하인이 문을 열 것으로 생각했지 백작 부인인 그녀가 손수 문을 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
“그래요. 오랜만이네요. 샤를리안…… 아니, 엔젤로테 백작.”
하지만 샤를리안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그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에는 그를 보고 당황했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도 이내 인사했다.
“예전처럼 샤를리안이라고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그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말도 예전처럼 편하게 하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샤를리안은 웃으며 예로니아 백작 부인에게 청했다.
“이미 장성하여 어른이 되신 데다가, 백작 작위까지 받으신 분께 어찌 그러겠어요?”
하지만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자, 들어오세요.”
대신, 그녀는 샤를리안을 안으로 안내했다. 샤를리안은 긴 복도를 걸으며, 예로니아 저택의 내부 또한 그다지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는 부분은 어느 정도 청소를 하는 것 같았지만,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 곳은 멀리서 보아도 뽀얗게 먼지가 앉은 것이 보였다. 그림이나 오브제가 있어야 할 곳에는 텅 빈 벽과 선반이 있을 뿐이었다. 삐걱대는 마루도 손본지 오래인 것 같았고, 그것을 가려줄 카펫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직접 문을 열어줄 때 짐작했던 대로 이 큰 저택에 부리는 하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손수 볼품없는 찻주전자에 차를 내오는 것을 보자 그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하지만 샤를리안은 그저 조용히 차를 마실 뿐, 그것에 대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네요.”
“먼 곳에서 왔는데, 무슨 선물까지나 챙기셨어요.”
“먼 곳에서 왔으니 선물을 드리는 것이죠. 사실, 제가 여기 와도 될는지 망설였습니다. 에델라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루젠타에 도착해서 들었거든요.”
“그랬군요.”
“비록 제가 에델라나 예로니아 백작님과 백작 부인을 만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안다비아에서부터 준비한 선물이라도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게 되었습니다.”
“자격이랄게 뭐가 있겠어요. 다 옛날이야기지요.”
선물로 시작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엔젤로테 백작이 병을 얻어 죽게 된 이야기와 혼자가 된 엔젤로테 백작 부인의 안부, 소소한 과거의 이야기, 행복했던 추억들. 처음에는 딸과 파혼한 약혼자이고,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던 데다가, 나이 차이까지 크게 나는 상대이다 보니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샤를리안과의 대화가 조금 껄끄러웠었다. 하지만 샤를리안이 친숙하게 그녀를 대하고, 웃으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데다가, 맞장구까지 잘 쳐주니,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점점 편안함을 느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대화상대이던 에델라가 결혼한 이후로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라고는 남편과 의사, 그리고 상점 주인 정도밖에 없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에델라가 고생이 많았지요. 가여운 것…….”
예로니아 백작이 병을 얻은 이야기를 하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지금 그분과 결혼하며 형편은 좀 나아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글쎄요. 제가 봤을 때는 사윗감을 잘못 고르신 것 같습니다. 저라면 예로니아 저택을 이렇게 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어머, 그건 그분 잘못이 아닌걸요. 그분은 충분히 저희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어요.”
“정원의 상태가 말이 아니던걸요. 게다가 자신은 시내의 대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들었는데, 형편이 어려운 장인 장모댁에 하인 하나 보내주지 않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그건 오해예요. 그분은 계약에도 없는 생필품들도 보내주고 있고, 계약 이상으로 에델라에게도 잘해주고 있다고 그 애가…….”
말을 하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약이요?”
그 단어를 내뱉는 샤를리안의 표정에는 놀람과 당황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건 예로니아 백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오랜만에 긴 대화를 나눠서였다. 오랜만에 만난 샤를리안이 너무도 잘 자랐고, 또 너무도 친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해서였다. 그리고 샤를리안이 테라비스를 잘 몰라 그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것 같아, 그의 편을 들어주려다 그런 것이었다.
“그 사람과 뭔가 계약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그게…….”
그녀에게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은 나쁘게 흘러갔다.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었다.
“계약 이상으로 에델라에게 잘해주고 있다는 것은, 그자와 에델라가 뭔가 계약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엔젤로테 백작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네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샤를리안을 내쫓으려 했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다면, 적어도 젖기 전에 사람을 내쫓는 것이 나았다.
“백작 부인,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만 가주세요. 제가 바빠서 배웅은 힘들 것 같네요.”
샤를리안은 그녀에게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단호했다. 자신이 더 실언할까 봐 두려웠고, 샤를리안이 더 알아낼까 봐 두려웠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샤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안내로 함께 걸었던 복도를 혼자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계약이라는 그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부부 사이에 계약을 할 일이 뭐가 있지?’
자신이 아는 한 그럴 일은 없었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나와 시종이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타기 전, 샤를리안은 다시 한번 예로니아 저택의 정원은 훑어보았다. 가장 마지막까지 시선이 닿은 것은, 에델라와 결혼 약속을 한 커다란 나무였다.
‘혹시?’
그 순간이었다. 샤를리안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부부 사이에는 계약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전이라면 계약할 수도 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결혼을 약속하는 계약이.
“말도 안 돼…….”
샤를리안의 입술에서 탄식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공연한 추측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이 계약 결혼을 했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어엿한 귀족인 에델라가 평민인 테라비스와 결혼을 하게 된 것도, 부자 사위를 두었지만 예로니아 저택이 이 모양인 것도, 그리고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계약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나서 황급히 자신을 쫓아낸 것도.
“에델라…….”
포기하려고 했던 그 이름이 다시 샤를리안의 입술에 얹어졌다.
* * *
“어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에델라를 향해서 테라비스는 인상을 썼다. 지금 저걸 말이라고 물어보는 건가?
“어떠냐고?”
“이상해?”
테라비스의 반응에 에델라는 주춤해서 되물었다. 오늘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그레인이 잘 어울린다며, 꼭 사야 한다며, 거의 강매시킨 드레스였다. 그리고 에델라의 생각에는 너무 화려한 드레스였다. 거기다가 보석은 그 블루다이아몬드 세트였다. 비싸고 화려한. 에델라의 기준에서 오늘 자신의 패션은 좀 과했다.
“물을 필요도 없이, 완벽해. 최고야! 매우 훌륭해!”
그리고 테라비스의 기준에서는 매우 비싸 보이는 아주 완벽한 패션이었다.
“갈아입어야겠어.”
테라비스의 입에서 찬사가 터져 나오자, 에델라는 역시나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패션 감각은 형편없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준비가 빨리 끝나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충분했다.
“에헤이~ 무슨 소리야! 지금 아주 완벽하다니깐! 지금 당신은 무지막지하게 예쁘다고.”
돌아서서 다시 드레스룸으로 가려는 에델라의 손을 테라비스는 덥석 붙잡았다.
“네 말은 못 믿겠어.”
“뭐? 왜?”
“그야…….”
에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는 걸까?
“?”
테라비스는 꼭 말을 해야 알았다. 지금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이상하다는 것을. 어째서 연미복의 재킷이 가슴에서 끝이나 흰 셔츠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인지, 왜 바지의 단추가 주먹만 한 금으로 만들어져서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는 것인지, 에델라는 물어보지 못했다. 돌아올 대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제일 비싼 것이니까.
“내가 갈아입지 않을 거라면, 당신이 갈아입는 게 좋겠어.”
“뭐? 왜?”
역시나 테라비스는 자신이 옷이 이상하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줘?”
“뭘 솔직히 말한다는 거야?”
“당신…….”
에델라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 테라비스도 진실을 깨달을 때였다.
“안목이 정말 형편없어.”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테라비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비싼 건 귀신같이 알아보는 사람이야, 내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겠어?”
“그건 맞을지도 몰라. 난 비싼 건 잘 모르니까.”
“그래. 그럼…….”
“잘 생각해봐. 지난번 무도회에서 사람들 반응이 어땠는지.”
“……나쁘지는 않았지.”
“솔직하게 말해봐.”
“아니, 원래도 내가 무도회장에 가면 다들 좋아했다고.”
“르웰라 부인이 하는 말 들었잖아?”
그래. 들었다. 테라비스 바넬레오가 결혼하더니, 드디어 사람 같은 옷을 입은 모습을 본다고.
“그, 그거야 그분이 술 취해서…….”
“취중 진담이었어.”
에델라는 더없이 단호했다.
“갈아입어.”
그리고 더욱 단호하게 명령했다.
“아니면, 내가 갈아입을 거야.”
심지어 협박까지 했다.
“다이아몬드도 다 빼버릴 거야.”
게다가 매우 위협적이었다.
“젠장.”
테라비스는 중얼거리며 드레스룸으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