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박하 향의 숨결2021.11.05.
“제기랄!”
샤를리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욕설에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종이 눈을 크게 떴다. 샤를리안을 꽤 오래 모셔왔지만, 그의 입에서 욕이 나온 것을 처음 본 까닭이었다.
“젠장!”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샤를리안의 입에서는 또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집에서 기다린다고 말할 때의 그의 의기양양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을 에델라의 모습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그 상상이 샤를리안을 미치게 했다. 에델라와 재회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러기 위해서 이 먼 루젠타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포웨이스 남작의 무도회에서 그녀와 마주쳤을 때, 샤를리안은 그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나 자신과 에델라는 다시 만날 운명이었다고.
‘에델라…….’
다시 만난 에델라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귀여웠던 꼬마는 훌쩍 자라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샤를리안이 상상했던 것보다 에델라는 더욱 아름다웠다. 성숙해진 목소리도, 그녀의 몸짓도, 모두 다 그랬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세월의 흐름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아 에델라가 샤를리안에게 쌀쌀맞게 굴었지만, 그는 시간을 들여 그녀를 설득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에델라를 찾기 위해서 샤를리안이 어떻게 했는지는 차근차근 설명하면 에델라도 자신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샤를리안의 생각과는 달리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샤를리안의 작은 신부님은 이미 다른 사람의 신부가 되어 있었다.
‘에델라!’
그는 평생을 사랑해왔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여인의 이름을 이제 마음속으로만 부를 수 있게 되어버렸다. 샤를리안은 너무 늦어버렸다. * * *
“음?”
침실에서 나는 낯선 냄새에 테라비스는 코를 킁킁거렸다.
“왜 그래?”
갑작스러운 테라비스의 반응에 에델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냄새가 나는데…….”
“냄새?”
“응.”
테라비스는 후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 위해서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리며 점점 에델라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냄새를 맡는 사냥개 같은 모습에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에델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테라비스는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향을 쫓았다. 에델라의 앞에 멈춰선 테라비스는 더 가까이 코를 들이대며 그녀가 향기의 근원지라는 것을 확신했다.
“박하?”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테라비스는 그 냄새를 정의했다. 오늘 식사에 박하와 관련된 것이 뭔가 나왔던가? 테라비스는 에델라와 함께했던 저녁 식사를 훑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박하 향이 날만 한 것은 없었다. 아니면, 저녁을 먹고 나서 씻은 에델라가 샤워 용품을 뭔가 바꾼 걸까?
“혹시…….”
테라비스는 그것을 물으려고 했다. 드디어 비누 말고 뭔가 다른 걸로 씻기 시작한 것이냐고. 하지만 눈을 뜨고 에델라를 바라본 순간,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에델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이게 다 할멈 때문이야!’
에델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참았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입에서 더는 박하 향이 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녹스 할멈은 이게 예의라고 했다. 키스에도 예의가 있냐는 에델라의 질문에 차 한잔을 마시는데도 예절이 있는데, 키스에는 왜 없겠냐며 반문했다. 그리하여 에델라는 녹스의 말에 따라, 오늘 점심부터 냄새가 날 것 같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깨끗하게 양치질을 한 것은 물론이고 녹스가 준 박하 향이 나는 물로 입안을 헹궜다.
“에델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에델라가 얼굴이 빨개질 말을 자신을 했던가를 돌이켜보지만, 아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불어 아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박하 향이 났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냄새가 날만 한 뭔가의 제품을 썼는지 물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
입술을 꾹 다문 에델라의 얼굴은 점점 더 빨개지고 있었다. 그녀의 가까이에 있는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숨을 참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델…….”
“푸핫!”
테라비스가 재차 에델라의 이름을 부르고, 영문을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더는 숨을 참지 못한 에델라가 입을 열고 참았던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그 순간, 박하 향이 에델라의 입에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눈치 빠른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왜 숨을 참았는지 알아차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도. 또한, 테라비스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에델라도 알아버렸다.
“…….”
“…….”
시간도, 공기도, 사람도. 침실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적어도 에델라와 테라비스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
테라비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입술이 바싹 마른 것 같았다. 마치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그랬다. 에델라가 오늘 밤 키스를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테라비스는 긴장이 되었다. 테라비스 역시 낮 동안 키스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분명 예전에 에델라와 키스를 이미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뭘 어떻게 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에델라와의 키스가 기분 좋았고, 에델라도 그렇게 느꼈었다는 것이다.
‘그때처럼 본능대로 하면 되겠지, 뭐.’
테라비스는 그렇게 결론 내렸었다. 그 이후에는 엔젤로테 상단의 방문으로 더는 키스에 신경을 쓰고 있을 수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에델라가 자신과의 키스를 위해서 뭘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하 향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자신은 너무 준비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기대에 충족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바싹 긴장이 되어버렸다.
“그, 그러니까……!”
더듬으며 입을 연 테라비스가 ‘까’를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뒤집혀버리고 말았다. 제 목소리에 당황하고 놀란 테라비스가 얼른 입을 다물고 에델라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테라비스만큼이나 긴장한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뒤집힌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입술이 괜히 바싹 말라서 테라비스는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곤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바싹 힘을 주고 말았다.
“해볼까?”
밑도 끝도 없이, 테라비스는 그렇게 말했다.
‘해볼까가 뭐야? 해볼까가! 테라비스 바넬레오, 이 멍청한 자식! 나가 죽어라, 그냥.’
자신도 제 말이 대책 없는 말이었음을 깨닫고 그는 속으로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좀 더 분위기 있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차라리 긴장을 풀어줄 재치 있는 말이라던가. 하지만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말이 뭔가 어색하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
눈을 감은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박하 향이 다시 테라비스의 코끝을 스쳤다.
에델라가 자신과의 키스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었다. 그것을 의식한 순간, 테라비스의 머릿속에 오늘 보았던 샤를리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아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던, 에델라가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말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던, 에델라를 사랑하는 남자.
“…….”
테라비스는 말없이 눈을 감은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거기다가 평민인 자신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신분의 여자였다. 집이 망하지만 않았다면, 샤를리안 같은 사람과 결혼했을 여자. 아이를 낳기 위해서 이름도 몰랐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했을, 그리고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마땅할 여자였다. 테라비스는 불현듯, 자신과 에델라의 계약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생각했다. 물론 자신에게는 괜찮은 계약이었다. 귀족 신분은 테라비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고, 에델라에게 지급하는 금액은 사실 그에게는 그리 큰돈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델라에게는?’
아니었다. 계약에 따라 에델라는 돈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돈은 아버지의 치료비였다. 에델라에게 필요한 돈이긴 했지만, 에델라 자신을 위한 돈은 아니었다. 좋은 집과 비싼 옷, 풍족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지만, 그게 과연 에델라가 원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낡고, 아무것도 없는 예로니아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허락했을 때, 기뻐했던 에델라였다.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이름도 말하고 싶지 않은 그 남자는 에델라와 똑같은 귀족이었다. 예의를 알고, 학식이 뛰어나며, 귀족의 상식을 알았다. 자신과는 달리. 어린 시절의 에델라를 보았었고, 약혼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에델라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델라 역시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욕하면 싫어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와 마주친 순간 얼어붙은 에델라를, 그의 앞에서 자신이 달라붙자 밀어내려던 에델라를, 테라비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첫날밤,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에델라 역시 테라비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이 계약은 에델라의 행복을 가로막은 계약일 수도 있었다. 자신의 존재 또한.
“……테라비스?”
아무리 기다려도 테라비스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에델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맑고 깨끗한 파란 눈을 바라보자, 테라비스의 죄책감은 더해졌다.
“에델라.”
“응?”
아무것도 모르는 에델라는 그저 천진하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 역시 테리비스의 마음을 죄었다.
“내가 오늘 깜박하고 저녁에 마늘을 먹은 것 같은데.”
“뭐?”
“마늘을 먹었어. 스테이크에 나온 가니쉬 말이야.”
뜬금없는 테라비스의 말이었지만, 에델라는 오늘 저녁 메뉴를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스테이크가 나왔고, 가니쉬로 마늘도 있었다. 물론, 에델라는 먹지 않았었다. 냄새가 날까 봐.
“그러니, 오늘은 키스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나는…….”
에델라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난 상관없어.’라고 말을 하면, 마치 테라비스와의 키스를 잔뜩 기다려온 사람 같아 보일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에델라는 너무 수줍음이 많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에델라는 완전히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내일은 비에라 자작의 무도회에도 가야 하니, 일찍 자는 게 좋겠어.”
“그래. 그렇지.”
“그래. 그럼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테라비스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