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비즈니스2021.11.01.
에델라는 정성껏 수를 놓은 수예품을 손에 들고 꼼꼼히 살펴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도안 그대로였다. 귀퉁이에 작은 연못의 색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원하는 색상의 실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여러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자꾸만 미뤄졌었는데, 마감일에 맞춰 완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됐어, 할멈.”
에델라가 녹스에게 그것을 건네자, 녹스는 웃으며 다림질을 시작했다. 에델라는 옆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림질이 끝나면 녹스는 그것을 의뢰인에게 가져다줄 것이고, 대신 품삯을 받아올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에델라는 골목길에서 초조하게 그 돈을 기다렸을 것이다. 얼른 그 돈을 받아서 써야 할 곳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돈이 필요해서 일한 것은 맞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급하지는 않았다.
“저기, 할멈?”
“네, 아가씨.”
녹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다림질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테라비스는 뭘 좋아해?”
“바넬레오 님이요?”
“응.”
그제야 녹스는 고개를 들어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테라비스가 이것저것 내게 해준 것이 많잖아. 옷이나, 구두나, 얼마 전에 예로니아 저택에 물건들을 보내준 것도 그렇고. 받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이번에 품삯을 받으면 나도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할까 해서.”
“그렇군요.”
녹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비스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니. 좋은 징조였다.
“바넬레오 님이 좋아하는 건, 비싼 거죠.”
보란 듯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녹스가 말했다. 녹스의 시선을 따라 에델라의 시선도 주변을 훑었다.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세탁실이었다. 한쪽에는 세탁을 해야 하는 것들이, 다른 한쪽에는 이미 세탁을 마친 것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즉, 썩은 녹조 같은 색의 커튼이나 불타오르는 것 같은 색상의 침대 시트, 형광 레오파드나 눈이 아플 지경으로 새파란 테라비스의 옷들이 이곳에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흰색의 셔츠나 베이지색의 이불 같은 것들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그것들의 공통점이라면 전부 고가의 물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것들을 보며 에델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품삯으로는 테라비스의 양말 한 짝 사기도 어려워 보였다.
“아니면, 필요한 건 뭐 없을까?”
작은 것이라도 좋았다. 아니, 작은 것이라면 더 좋았다. 그러면 에델라가 살 수 있을 테니까.
“바넬레오 님이 필요하신 거라면…….”
뭔가 생각을 하는 것 같던 녹스는 빙긋 웃으며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내가 안다고?”
“네.”
녹스는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지만, 에델라는 그저 눈만 깜박였다.
“어때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가씨?”
“좋은 소식? 어떤 것?”
“경사 말이에요.”
“경사?”
에델라는 녹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제야 녹스는 에델라가 이런 쪽으로 둔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가난한 귀족이었던 에델라는 또래의 귀족과 어울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평민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은 부모님이나 자신 정도였다.
“아기 말이에요, 아기!”
교류하는 사람이나 수다를 떨 친구가 없었던 에델라에게 이런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녹스는 제 입으로 정답을 내놓았다.
“아, 아기?”
“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살 수 있는 바넬레오 님이 지금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녹스의 말이 옳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다 가지고 있는 테라비스였다.
“어때요?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요?”
이제는 좋은 소식이 뭘 말하는지 아는 에델라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좋은 소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 아기가 생길 만한 일을 한 게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곧’이긴 했다. 오늘부터 두 사람은, 키스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 * * 단장실 문을 연 마틴은 자신의 상관이 매우 고뇌하고 있는 장면을 맞이하였다. 그가 얼마나 심각해 보였냐면, 마틴이 나중에 다시 올까를 고려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틴은 상사의 고뇌보다는 자신의 귀찮음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다시 올까를 아주 잠깐 생각은 했지만, 굳이 실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은 아직 목발을 짚은 환자가 아닌가?
“단장님.”
마틴은 자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는 테라비스를 부르며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 부단장.”
그리고 마틴은 고개를 든 테라비스가 이제껏 심각하게 뭔가를 쓰고 있던 종이를 자연스럽게 보게 되었다. 키스! 키스란 무엇인가? 어디를? 어떻게? 아니, 어떻게 했더라? 혀. 입술. 잇몸??
“…….”
마틴은 고개를 돌려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고작 저따위 낙서를 하는 중이었으면서.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이건…….”
그제야 테라비스는 슬그머니 자신의 큰 손으로 종이를 가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틴의 시선을 슬쩍 피해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크흠! 그래, 무슨 일이지?”
테라비스는 헛기침을 한번 하곤, 마치 마틴이 이제 막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그에게 물었다. 자신의 상사가 한두 번 뻔뻔한 것이 아니었던 마틴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딱히 그의 사생활에 관심도 없었고, 단장인 그가 업무에 충실하지 않다고 해서 마틴에게 피해 입히는 것도 없었다.
“오후에 엔젤로테 상단과의 미팅에서 참고하실 만한 서류입니다.”
“이미 다 아는 내용 아닌가? 뭔가 새로운 것이라도 추가가 되었나?”
서류를 받으면서 테라비스가 물었다. 몇 개월을 공들인 안다비아와의 교역이었다. 새삼스럽게 미팅 당일에 테라비스가 참고할 만한 서류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얼마 전에 말씀드렸던 비에라와 엔젤로테의 만남에 관한 내용입니다.”
역시나 마틴이 건넨 것은 새로운 내용이었다.
“그걸 어떻게 입수했지?”
“꼭 아셔야 합니까?”
마틴의 은근한 질문에는 이 자료를 얻게 된 것이 그다지 합법적인 루트는 아니라는 뜻이 첨가되어 있었다.
“아니. 굳이.”
테라비스는 웃으며 서류를 펼쳤다. 아마 회계장부에 적히지 않은 붉은바람 상단 비자금의 일부가 이 서류를 위해서 소진되었을 것이다.
“확인해보도록 하지.”
테라비스는 서류를 펼쳤다. * * * 붉은바람 상단과 엔젤로테 상단과의 회의는 제법 긴 시간 이어졌다. 핵심적인 사항들은 이미 다 협의가 되어 있었지만, 세부 사항의 조율 때문이었다. 그 조항 하나에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책임 여부나 배상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었고, 비용적인 문제도 걸린 일이었기 때문에 두 상단의 이견을 좁히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거기다 두 상단의 대표인 테라비스와 샤를리안이 서로 팽팽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회의는 처음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늦어졌다. 창문 너머의 밖은 이미 깜깜해져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럽게 그 말을 꺼낸 것은 마틴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식사도 하셔야 할 테고 회의가 길어져서 다들 피곤하실 것 같군요. 조금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의 의견에 다들 반색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모두 배가 고팠고, 피곤했다. 딱, 두 사람만 빼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엔젤로테 백작님?”
“다들 피곤해하는 것 같긴 하군요, 바넬레오 단장님.”
테라비스는 웃으면서 샤를리안의 뜻을 물었고, 샤를리안 역시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가장 의견 개진을 많이 하고, 가장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한 것은 저 두 사람이었건만, 가장 쌩쌩해 보이는 것도 두 사람이었다.
‘보기보다 약골은 아닌 모양이지? 꼴에.’
티 나지 않게 샤를리안을 훑어보며 테라비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처음에 분명 호감형이었던 엔젤로테 백작은, 어느새 꼴 보기 싫은 배신자, 밉상으로 변해 있었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고, 저 웃는 얼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에델라의 과거 약혼자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말이다. 물론, 오늘 이 자리에 그것을 티 내지는 않았다. 테라비스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용 미소를 유지했고, 그를 대하는 태도 역시 깍듯했다. 귀족의 예의는 몰라도, 비즈니스 예의라면 아주 잘 아는 테라비스였다. 오늘의 테라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뇌에도 근육으로 가득 찼을 것 같은 놈다운 체력이군.’
그리고 그것은 샤를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다비아에서 테라비스를 처음 봤을 때는 서글서글하고 호탕한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목소리만 크고, 뻔뻔한 남자로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야비함도 느껴졌다. 물론, 그의 생각이 바뀐 것은 테라비스가 에델라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평민 주제에 대체 어떻게 에델라와 결혼을 한 거지? 이 자식이 뭔가 음모를 꾸민 것이 틀림없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샤를리안은 테라비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입술만은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명 다 사업용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둘 다 속으로는 이를 박박 가는 중이었다.
“그럼, 식사라도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엔젤로테 상단 측의 사람이 제안했다.
“아, 저는 시간이 늦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대신 저희 부단장이 여러분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테라비스는 조금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붉은바람 상단 측의 대표인 테라비스가 빠지려 하자 아쉬운 듯, 말했다.
“부인이 집에서 기다릴 것 같아서요. 지금도 연락 없이 늦어서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테라비스의 대답에 처음으로 샤를리안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가 말하는 부인이 에델라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고, 그 에델라가 테라비스를 기다리며 걱정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자, 샤를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가 늦으면, 자기도 식사를 하지 않고 저를 기다리거든요.”
이어진 테라비스의 말에 샤를리안의 얼굴이 거의 창백하게 질렸다. 그리고 이제껏 보여준 예의 바른 귀족의 표정을 벗어던진 채, 테라비스를 노려보았다. 분명 그 표정을 보고 테라비스는 기분이 좋아야 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명백하게 샤를리안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유치하게도 에델라가 현재는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그에게 똑똑히 알려주려고. 하지만 막상 자신의 도발에 걸려든 샤를리안의 반응을 보자,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테라비스는 입이 썼다. 샤를리안이 아직도 에델라에게 감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이미 내 아내야.’
테라비스는 샤를리안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와 똑같이 샤를리안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