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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인생의 즐거움 (51/92)

51화. 인생의 즐거움2021.10.25.

  마틴은 당황했다. 또한, 마틴은 설렜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로즈의 눈빛은 애절했으며, 세차게 내젓는 고개는 완강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과의 저녁 식사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 고백 이후로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했고, 같은 상단에서 일하긴 했지만, 내근직과 외근직인 터라 일부러 찾는 것이 아니면 마주칠 일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었다.

“그럼 내일 보자고.”

마틴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테라비스는 블루다이아몬드를 챙겨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길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마틴과 로즈 단둘이었다.

“저기…….”

“신난다! 공짜 술이다! 금액도 따로 안 적어주셨으니까 무제한으로 마셔도 되는 거죠?”

마틴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사이를 참지 못하고, 로즈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짜 술……이요?”

그제야 마틴은 알아차렸다. 로즈의 애틋한 눈은 자신이 아니라 수표를 향하고 있었음을.

“와! 빨리 가요, 부단장님. 시간 아깝잖아요. 이 근처에 제 단골집이 있어요!”

로즈의 애절한 눈빛을 보며 짧은 순간 동안 마틴의 머릿속에서 나열되었던 분위기 좋은 식당의 리스트는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로즈의 애틋한 눈빛이 자신이 아니라 수표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충격으로 멍해진 마틴이 그의 속도 모르고 그저 신난 로즈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곳은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오! 우리 씩씩한 로즈 양, 오늘은 일찍 오셨, 셨, 셨…….”

마틴은 로즈가 술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에서 잔을 닦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고 그녀가 진짜 이 집의 단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모를 남자가 말을 더듬는다는 사실도.

“여기 맥주 두 잔요! 그리고 안주 제일 비싼 거!”

“두 잔? 정말 두 잔?”

“네. 두 잔요.”

“두 잔 다 로즈 양이 마시는 것은 아니겠지? 같이 온 사람이 일행분이 맞지?”

“네. 제 일행과 둘이 왔고, 그래서 맥주 두 잔요. 제일 비싼 안주 달라는 건 들으셨죠?”

“그래. 들었지. 들었지. 그러니까 이 신사분이랑 로즈 양이 함께 마실 맥주 두 잔과 안주. 맞지? 그렇지?”

몇 번이나 주문을 확인하는 그를 보며 마틴은 역시 지나친 음주는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해로운 것에 노출된 직업환경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도 실감하고 있었다.

“제가 다 돌아다니면서 먹어봤는데 말이죠, 루젠타에서 여기 맥주가 제일 맛있어요!”

오늘은 혼자 오면 늘 앉던 바 자리가 아닌 테이블로 가며 로즈가 말했다.

“그렇군요.”

마틴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그는 재킷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공중에 펼쳤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막 청소를 끝낸 참인지, 술집치고는 제법 깨끗했다.

“앗! 안 그려서도 되는데.”

“네?”

로즈의 사양하는 말을 들으며 마틴은 펼친 손수건을 제 앞의 의자에 깔았고,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곤 로즈에게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되물었다.

“일단 앉아서 말씀하시죠.”

그리고 참으로 매너 좋게도,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제 앞자리를 로즈에게 권했다.

“뭐가 안 그러셔도 된다는 겁니까?”

얼마나 매너가 좋았는지, 친절하게 다시 로즈에게 질문을 하기까지 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로즈는 자신의 착각을 조금 무안해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마틴이 권한대로 그의 앞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 무안함은 사라지고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곧 나올 술과 안주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짜였다!

“주문하신 맥주 먼저 나왔습니다.”

“와! 맥주! 신난다!”

마스터가 두 잔의 맥주와 땅콩을 가지고 오자 로즈는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바로 두 손으로 맥주잔을 움켜잡았다.

“짠할까요, 짠?”

로즈는 설레는 마음으로 마틴에게 제의했다.

“네. 그러죠.”

마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곧장 잔을 들지 않고, 품속에서 두 번째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그가 뭐 하는 것인가를 쳐다보던 로즈는 그가 결벽증 때문에 남이 만졌던 잔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잔을 들자 이내 환하게 웃으며 제 잔을 마틴이 든 잔에 부딪혔다. 혼자 오면 이것을 할 수 없어서 늘 아쉬웠던 로즈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잔을 부딪치고 나서 마시면 술이 더 맛있었다. 그래서 한번은 혼자 두 잔을 시켜서 건배한 적도 있었다. 혼자 하는 건배는 그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는 그러지 않았지만 말이다.

“첫 잔은 원샷! 아시죠?”

“네? 이 많은 것을요?”

마틴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로즈는 맥주잔에 입을 가져다 댄 뒤였다. 꿀꺽, 꿀꺽, 꿀꺽. 로즈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그녀의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황금색 맥주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틴의 눈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크햐~!”

로즈가 다시 목을 바로 세웠을 때, 그녀의 손에는 언제 맥주가 있었냐는 듯이 빈 잔이었다. 맥주가 있었다는 흔적은 그저 로즈의 입가에 남은 거품뿐이었다.

“크흐~! 바로 이거지!”

주먹으로 입가를 쓱쓱 닦으며 로즈는 잔을 내려놓았다.

“안 드세요?”

그제야 마틴의 잔에 맥주가 아직 가득 남아 있다는 것을 보곤 로즈는 물었다.

“마셔야죠.”

마틴은 잔을 들긴 했지만, 과연 정말 로즈처럼 첫 잔을 원샷을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 못했다. 한 모금을 넘기자 바로 목이 따끔거렸다. 두 모금을 넘기자 벌써 취기가 핑 오르는 것 같았고, 세 모금째에는 뱃속이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결국, 마틴은 잔의 절반도 마시지 못하고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맛있죠?”

그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로즈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먹어본 맥주 중에서 제일 맛있지 않아요?”

“아…….”

솔직히 말해서, 마틴은 술을 그렇게 잘 마시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맛도 몰랐다.

“네. 그러네요.”

하지만 대화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마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로즈의 말이 옳다고 해주었다.

“크흐~ 역시! 마스터! 역시 마스터 맥주가 최고예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 맥주 하나 더요! 그리고 안주 빨리 빨리요! 우리 부단장님 아직 식전이시란 말이에요!”

맥주가 맛있다는 말에 로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추가 주문을 했다.

“술 좋아하나 봅니다?”

“네!”

마틴의 질문에 로즈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냉큼 대답했다.

“열심히 일한 뒤에 시원한 맥주 한 잔! 이게 바로 인생의 즐거움 아니겠어요?”

땅콩 하나를 공중으로 던져 입으로 받아먹으며 로즈는 방긋 웃었다. 그리고 하나로는 감질나는지 연이어 땅콩을 하나 더 던졌다.

“제 인생의 즐거움은 에몬테 님입니다.”

땅콩이 콩! 소리를 내며 로즈의 이마를 맞췄다. 로즈는 그 충격으로 잠시 입을 공중으로 벌린 그대로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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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집에 돌아온 테라비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집이 조용했다. 마치 레베카가 없는 것처럼.

“…….”

테라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아지처럼 킁킁거렸다. 공기 중에 은은하게 여자 향수의 향이 떠돌고 있었다. 이 집에 사는 사람 중에는 향수를 뿌리는 사람은 없었다. 고용인들이 고가의 향수를 뿌릴 리 없었고, 비누로 온몸을 씻는 에델라가 향수를 뿌릴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건 레베카의 향수 냄새가 분명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너무 조용한 집에 테라비스는 오히려 불안함을 느꼈다. 마치 태풍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져서였다.

“오늘은 일찍 왔네?”

서재에서 책을 보다가 창문 너머로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에델라가 그를 마중하기 위해서 걸어 나왔다. 테라비스가 본 에델라는 좀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제처럼 곧 탈진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테라비스의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올 뻔했다.

“어머니는?”

“아…….”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그것을 보고 조금 안도했던 테라비스는 심장이 다시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뭐지? 단식투쟁인가? 아니면, 꾀병? 어차피 다 거짓말일 테지만, 그게 거짓인지 모르는 에델라는 레베카에게 달달 볶였을 것이다. 전부 네 탓이라고 몰아붙이면, 착하고 순진한 에델라는 어쩔 줄 몰라 할 테니까!

“어머니가 뭐라고 했든, 그건 전부 다 거짓말…….”

“어머니는 본인 집으로 돌아가셨어.”

“뭐?”

“뭐?”

동시에 입을 연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서로의 말에 각자 당황하며 되물었다.

“거짓말이라고? 그럼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신 게 거짓말이라고?”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생각한 건 다른 거였어. 아니, 그런데, 잠깐만,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테라비스가 짐작한 것은 다른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에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테라비스는 아직 혼란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 블루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손안에 있었고, 이걸 얻지 못한 레베카가 그냥 돌아갈 리가 없었다.

“응. 마차를 불러서 돌아가셨어. 짐까지 전부 싸서 가셨는걸?”

“아니, 어떻게?”

놀라서 묻는 테라비스에게 에델라는 조금 주저하며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그에게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테라비스의 표정은 참으로 변화무쌍했다. 그는 놀랐다가, 웃었고, 박장대소를 터트렸다가, 이내 인상까지 찌푸리며 몰입해서 들었다. 에델라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음에도 재미있었다. 그녀의 말솜씨가 좋아서인 것도 있겠지만, 일단 내용이 훌륭했다. 적어도 테라비스에게는 그랬다.

“……마지막 순간에 나는 어머니께 질문을 던졌어.”

“뭐라고?”

여기까지 잘 이야기를 이어왔던 에델라가 그 순간,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해도 될는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야? 뜸 들이는 거야? 다음 권을 구매해야 하는 건가요, 작가님? 얼마인데? 얼마면 되는데?”

테라비스는 다음 권을 재촉하는 독자처럼 에델라를 졸랐다. 실제로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수표책을 꺼내기까지 했다.

“과연 당신이 누구를 택할 것 같냐고.”

망설이던 입술이 결국은 대답을 내놓았다. 힐끗, 그 ‘당신’을 쳐다보면서.

“나와 이혼할 것 같은지, 어머니와 절연을 할 것 같은지. 당신이 누구를 선택할 것 같냐고.”

그 억세고 제멋대로인 레베카를 대담하게 도발한 레베카의 질문에 테라비스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제야 최근 잊고 있었던, 자신도 놀랐던 처음의 에델라를 기억해냈다. 순진하고, 착한 얼굴로 제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던 에델라의 모습을.

“하하하!”

결국, 테라비스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자신이 결혼한 여자는. 테라비스는 이 결혼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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