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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부부이니까 (48/92)

48화. 부부이니까2021.10.15.

  이상한 느낌이었다. 분명 덩치는 테라비스가 훨씬 컸다. 분명 둘이 동시에 포옹하고 있긴 하지만, 자세는 언제나 테라비스가 에델라를 감싸 안는 모양새였다. 체격 차가 있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테라비스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피곤함에 늘어져 있던 에델라의 손이 올라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을 때, 테라비스는 자신이 에델라에게 안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품은 편안하고, 안락했다. 이대로 스르륵 잠이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꿈.

“에델라.”

하지만 테라비스는 이대로 잠이 들 수 없었다. 에델라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

갑작스러운 테라비스의 사과에 에델라의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

“내가 네 과거를 탓했던 일 말이야. 진작 말하지 않았다고 화를 냈던 것.”

테라비스의 설명에 그제야 에델라의 눈이 본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나 역시 내 과거를 당신에게 다 말한 것도 아니었으면서, 내가 심했지. 게다가 어머니가 이렇게 집에 찾아와서 당신에게 봉변을 끼친 것도 사과할게.”

“아, 아니야. 괜찮아.”

에델라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당신에게 미처 못한 말이 있어.”

“설마 아직도 더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있는 거야?”

“뭐? 아니야!”

에델라는 이번엔 더욱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여러 가지 물건을 보냈다며?”

“아아~ 그것.”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말에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에델라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아주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어. 특히, 아버지가 예전에 즐겨 마시던 차가 있다며 좋아하셨어.”

“아니, 뭐, 차를 좋아한다고 하신다길래 그냥 우리가 판매하는 것들로 몇 종류 보내드렸을 뿐인데, 뭘. 다른 것들도 그냥 판매하는 물품들의 샘플이나 이월품이나 뭐 그런 것들이야. ……근데 전에 즐겨 마시시던 차는 어떤 건데?”

슬쩍 던지는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웃었다. 말로는 그냥 판매하다 남은 제품을 보내준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즐겨 마시던 차를 말해주면 틀림없이 그것을 예로니아 저택에 더 보내려는 속셈이리라. 겉으로는 능글맞고 뻔뻔했지만, 속으로는 다정하고 착한 남자였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난 줄 알고 무례하게 굴었지만, 사실은 상처가 있고 극복하고 싶은 콤플렉스가 있는 남자였다. 에델라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크고 몸무게는 두 배쯤 나갈 것이었지만, 언제나 에델라에게 져주기만 했다.

‘어떻게 하지?’

아직도 자신의 선행이 들킨 것이 쑥스러운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테라비스가 사랑스럽게 느껴져.’

누가 보면 웃을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박장대소를 할 일이었다. 무례하고, 뻔뻔한, 거기다가 덩치까지 건장한 테라비스가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니! 하지만, 지금 에델라의 심정은 그랬다. 겉과 속이 다른 이 남자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테라비스.”

그의 이름을 부르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테라비스가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과거를 내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래. 이제 우리는 서로 숨기는 게 없는 거겠지?”

확답을 받으려는 듯이 물어보는 테라비스를 향해 에델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숨기는 게 없었으면 해.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는 부부이니까.”

부부. 그 단어가 에델라의 가슴을 울렸다.

“당신은 내 아내고,”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아내였다.

“나는 당신 남편이니까.”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였다. 에델라는 알았다는 대답 대신, 테라비스를 다시 껴안았다. 그리고 혼자서 배시시 웃었다. 1시간이라는 제한이 너무도 아까울 만큼 기분이 좋은 테라비스의 품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기 충분할 만큼, 기분 좋았다. * * * 테라비스는 솔직히 말해서, 오늘만큼은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난 괜찮아.”

저렇게 말을 하는 에델라 때문이었다.

“난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이야.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출근 정도는 내가 정할 수 있어.”

“하지만 단장이라서 바쁘기도 하잖아. 안다비아 건,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것 아니야? 최종 제안서가 수정될 수도 있다며.”

제길. 에델라의 정확한 지적에 테라비스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하다못해 좀 있다가 내가 한마디 말이라도 하고 출근하면, 어머니가 좀 나을 수도 있으니까.”

“저렇게 코를 골고 주무시는데, 깨운다고?”

“이제 깨워도 될 시간이잖아.”

“그렇지만 굳이 깨우지 않는 게 날 더 도와주는 것 아닐까?”

“제길. 당신은 왜 맞는 말만 하는 거지?”

그랬다. 지금 둘은 레베카가 자는 손님방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출근하지 않고 레베카에게 한마디를 해야겠다는 테라비스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에델라의 실랑이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어서 가.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잖아.”

에델라는 힘으로라도 테라비스를 출근시키고야 말겠다는 듯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덩치 큰 테라비스가 에델라에게 힘으로 밀릴 리 없었지만, 힘으로 버티다 에델라가 다칠까 봐 어쩔 수 없이 테라비스는 현관까지 떠밀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자, 어서.”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마차에 올라타는 테라비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에델라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제 레베카가 시킨 일들을 하느라 끝내지 못했던 바느질 일감을 다시 시작했다. 멀리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제법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에델라는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평화를 즐겼다. 곧 다가올 전쟁의 시간을 대비하면서. * * * 평화의 시간이 깨어진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얘, 며느님아. 너는 무슨 버르장머리가 그러니?”

에델라는 침실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더니, 다짜고짜 따지는 레베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막 일어난 듯, 머리는 뒤죽박죽이었고, 입술에는 마른 침 자국이 보였다.

“시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문안 인사를 여쭙고, 식사는 어떻게 하실지를 여쭤본 다음에, 빠릿빠릿하게 드시고 싶은 걸 대령해야 하지 않겠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

“아니. 잘 못 잤다.”

저택이 떠나가라 코를 골며 잠을 잤던 레베카는 뻔뻔스럽게도 그렇게 말을 했다.

“바넬레오 가문의 가풍을 어떻게 하면 너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 잠을 설쳤단다.”

거짓말이었다. 에델라는 이미 아침에 고용인들로부터 레베카가 잠이 오질 않는다며 와인과 안줏거리를 만들게 했다는 것을 이미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테라비스의 와인장에서 제일 비싼 와인을 꺼내 마셨다는 것도 들었다. 레베카가 잠을 설쳤다면, 그건 술을 마시느라 그런 것이었다. 지금도 레베케에게서는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러셨군요, 어머니. 그럼 아침은 어떻게 차릴까요?”

하지만 에델라는 그런 것은 모르는 척해주고, 그저 레베카가 원하는 대로 질문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읊어대는 메뉴들을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에 새겼다.

“알겠니?”

“네, 어머니. 그렇게 준비할게요.”

레베카의 길고 긴, 그리고 과연 그녀가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은 메뉴들을 다 외운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에델라는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나중에 차려진 식탁을 보고 하나라도 없는 걸 보면 오히려 트집 잡기 좋았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어제 집에 돌아오자마자 에델라를 찾던 테라비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기 아들은 이 얼굴 반반한 귀족 출신의 며느리에게 푹 빠진 듯했다.

‘나한테는 더 잘됐지, 뭐.’

에델라를 쥐잡듯이 잡을수록, 테라비스가 더 빨리 백기를 들 것이라는 생각에 레베카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은 에델라에게 무슨 힘든 일을 시킬까도 생각했다.

“아침을 차리는 동안 씻고 오시겠어요, 어머니? 바넬레오 가문의 전통에 맞게 청결하게 아침을 드실 거죠?”

레베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에델라는 방금 웃으며 물었다.

“무, 물론이지.”

에델라의 말에 지금 자신의 꼴이 어떨지를 떠올린 레베카는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 상 차려 놓으렴. 내가 말한 것 한 가지도 빼먹지 말고.”

  * * * 레베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에델라가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력이 레베카보다 훨씬 좋다는 것도.

“내가 말한 것 다 차린 것 맞니?”

“네, 어머니.”

“버터 스콘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있어요, 어머니.”

“아몬드는 어딨니?”

“아몬드는 여기에 있어요.”

“그럼 갓 짜낸 오렌지 주스는?”

“어머님께서는 포도 주스를 말씀하셨어요.”

옳거니! 잘 걸렸다!

“아니. 난 오렌지 주스를 말했다.”

레베카는 단호한 목소리로 아주 확실하다는 듯이 에델라에게 말했다. 사실 레베카의 기억은 확실하지 않았고, 진실은 포도 주스가 맞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레베카가 오렌지 주스로 우길 것이고, 그럼 에델라는 숙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아침에는 신선한 오렌지 주스…….”

“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물론 아시겠죠?”

“뭐?”

“오렌지나 레몬같이 신 과일은 보통은 몸에 좋지만, 공복에는 위를 자극하기 때문에 아침 식사로는 적합하지 않아요. 특히나, 어머님처럼 연세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더 좋지 않죠.”

“여, 연세?”

레베카의 명치를 친 기습이었다.

“너, 지금 나 늙었다고 말한 거니?”

“그럴 리가요. 연세는 나이의 높임말인걸요. 그건 물론 아시죠?”

“무, 물론이지.”

더듬은 레베카의 목소리에는 몰랐다는 것이 훤히 드러났다.

“며느리인 제가 어머니를 높여 드려야지요. 그리고 저는 어머님의 건강을 위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저에게 바넬레오 가문의 전통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주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에델라는 레베카의 뒷말을 냉큼 받아서 대답했다.

“어서 앉으세요, 어머니. 저도 점심을 먹어야겠네요. 같이 먹어도 되겠죠, 어머니?”

“……그러렴.”

자기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다는데 레베카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스 건은 이 정도만 하기로 했다. 에델라가 같이 식사하겠다니, 앞으로 얼마든지 트집은 더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어디, 두고 보자.’

레베카는 이를 갈며,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레베카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어린 테라비스를 방치하다니. 나쁜 어머니 같으니라고.’

에델라 역시 이를 갈며 테이블에 앉았다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는 레베카가 테라비스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어머니라는 생각에 고분고분했던 에델라였다. 하지만 어젯밤 테라비스의 고백으로 진실을 알게 된 에델라는 더는 레베카를 존중해주지 않기로 했다.

‘나쁜 사람!’

순한 토끼는 날카로운 앞니를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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