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안아주고 싶은 마음 (47/92)

47화. 안아주고 싶은 마음2021.10.11.

“왔니, 아들?”

방긋 웃는 얼굴로 테라비스를 맞이하는 레베카를 보며 테라비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첫 번째는 자신이 돌아오면 항상 맞이해주던 에델라가 없어서였고, 두 번째는 레베카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여서였다.

‘이렇게 기분 좋게 있을 리가 없는데?’

레베카의 행동 패턴을 잘 알고 있는 테라비스가 예상한 것은 두 가지였다. 그가 오자마자 자신을 버려두었다며 테라비스를 달달 볶거나, 아프다고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거나. 웃으면서 테라비스를 맞이한다는 패턴은 없었었다.

“에델라는 어디 있습니까?”

너무 환해서 묘한 불쾌감을 주는 레베카의 미소를 경계하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내가 시킨 것을 하느라 좀 바쁜 모양이구나.”

“어머니가 시킨 것요?”

예감이 불안했다.

“뭘 시켰는데요?”

테라비스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넬레오의 가풍을 익히기 위한 여러 가지를 우리 고운 며느님에게 지시해두었단다.”

“바넬레오의 가풍요? 그건 무슨 헛소리입니까? 바넬레오에 가풍이 어딨다고요?”

“어머나! 테라비스! 너의 혈통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니?”

“……그래서, 에델라는 어딨습니까?”

더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레베카가 하는 이야기는 다 헛소리일 테고, 말이 통하지도 않을 테니까.

“글쎄다. 그렇게 걱정이면 네가 찾아보지, 그러니?”

무시당한 것이 마음에 상했던지, 레베카는 샐쭉한 얼굴을 하고는 팩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이 자리에 있기도 싫다는 듯,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테라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테라비스가 에델라와 마주하게 된 것은 밤늦은 시간이었다. 그것도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서도 에델라가 나타나지 않아서 테라비스가 저택을 다 뒤져서 지하실에 있는 에델라를 겨우 찾아낸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단 늦은 저녁을 먹고, 씻은 다음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물었다. 식사와 따뜻한 물로 지하실의 먼지를 뒤집어쓴 꼬질꼬질한 모습은 벗은 뒤였지만, 피곤함은 여전히 에델라의 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특별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그저 당신네 가문의 가풍을 좀 익혔는데, 그게 좀 힘들었어.”

“빌어먹을.”

에델라에게서 레베카가 했던 말이 똑같이 튀어나오자, 테라비스의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왔다.

“가풍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딴 게 어딨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는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순한 양 같은 그 모습을 보며 테라비스는 다시 욕을 하고 싶었지만, 에델라의 앞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꾹 참았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뭘?”

“있지도 않은 가풍을 들먹여서 어머니가 널 괴롭힌걸.”

테라비스의 말에 그제야 에델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레베카에게 속았다는 것을. 오늘 자신이 당한 것이 말로만 듣던 그 시집살이라는 것을.

“이리 와. 자세히 알려줄 테니까.”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순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에델라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오늘 온종일 레베카에게 시달렸을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또한, 자신이 앞으로 할 이야기는 에델라의 눈을 바라보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에델라는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자리를 잡았다. 테라비스의 가슴에 제 얼굴을 기대고, 피곤한 몸을 늘어뜨렸다. 평소라면 그의 허리에 팔도 둘렀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기운이 없었다.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품인데도, 항상 그 온도가 달랐다. 편안함은 극적일 정도로 달랐다. 언제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침대 같았고, 또 어떨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은 딱딱한 얼음 소파 같은 테라비스의 품이었다. 그리고 오늘 테라비스의 품은 편안했다.

“에델라.”

“응.”

테라비스가 작게 이름을 부르자 에델라가 조용히 대답했다. 갓 씻고 나와서인지 오늘따라 에델라의 체온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테라비스의 팔에 닿았는데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힘이 다 빠진 듯, 축 늘어진 에델라가 안쓰러워 테라비스는 남몰래 그녀를 더욱 바싹 끌어당겨 안았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없어. 그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얼굴은 나랑 똑같이 생긴 바넬레오라는 남자가 있었다는 것만 알 뿐이지.”

“그래. 이전에 말했어.”

“그리고 사실,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야.”

“뭐?”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내가 아주 어릴 때야. 두 분의 결혼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어. 거기다 아버지는 연고 없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뱃사람이었고. 그러니 두 분이 같이 산 시간은 더욱 얼마 되지 않아. 가풍이니, 뭐니를 어머니가 알 시간은 전혀 없었어.”

테라비스의 뜻밖의 고백에 에델라의 몸이 살짝 움찔했다. 오늘 온종일 바넬레오 가의 전통을 배운답시고 몸을 혹사당한 에델라였으니 당연했다.

“바넬레오 가문은 청결을 중요시한다고 했는데?”

에델라는 레베카가 몇 번이나 말했던 바넬레오 가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말했다. 그중에서도 바깥과 내부를 연결하는 창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했고, 그래서 저택에 있는 모든 창문을 에델라가 손수 닦아야 했다. 한번은 사다리에 올라가서 창문을 닦고 있는데, 레베카가 일부러 사다리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위험하게도 에델라가 바닥에 나동그라지기도 했었다. 거기다 새로 생긴 귀하신 며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싶다며 레베카가 머물 방을 에델라가 새로 청소했으며, 사용할 욕실까지 반짝반짝하게 닦으라는 주문을 했다.

“오후 티타임에 라꼴레옹꼬트라 라는 차를 마시는 전통은?”

오후 티타임에 그 차를 먹는 것이 바넬레오의 전통이라는 말에 에델라는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이름도 해괴한 그 차에 대해 물어보고 다녔다. 하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적어도 루젠타에는 그런 차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실망해서 돌아온 에델라를 맞이한 것은, 우아하게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홍차를 마시고 있는 레베카였다. 전통이라며, 그 차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녀는 차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에 ‘아, 그러니?’라고 말을 했을 뿐이었다. ‘며느님아, 쿠키가 짜다.’라는 말도 덧붙였고.

“보이지 않는 곳이 가장 깨끗해야 한다는 가풍도 없는 거야? 바닥에서부터 깨끗해야 진정한 청결이라는 덕목도?”

테라비스가 돌아왔을 때, 에델라는 몇 년이나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던 지하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것 또한 레베카의 지시였다.

“없어.”

테라비스는 단호했다. 이상한 차 이름도, 청결을 중요시한다는 말도 전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의 단호한 말에 에델라는 눈앞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오늘 자신이 열심히 한 것들이 모두 헛짓이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테라비스 집안의 가풍을 익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는데!

“애초에 바넬레오 가문이 그렇게 청결을 중요시하고, 어머니가 그 가풍을 따랐으면, 내가 그렇게 방치당한 채 자라지 않았겠지.”

“방치를 당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에델라는 고개를 들어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이런 과거를 고백하는 자신이 초라한 듯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몰랐어. 똑바로 젖을 물리는 방법도, 기저귀를 채우는 방법도, 씻기는 방법도 몰랐지.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은 더더욱 몰랐고. 그리고 그때, 남편은 배를 타고 나가고 없었으니,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그 모든 걸 하지 않았다는 거야?”

“어머니는 즉흥적으로 결혼했고, 너무 빨리 임신했고, 불행히 남편이 일찍 죽고 말았지.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 말이야.”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어.”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과거에 레베카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다른 점이라면 레베카는 울면서 과거 자신의 처지를 더욱 하소연했고, 테라비스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매일 아이 우는 소리에 시달렸던 옆집 아주머니가 옆 도시에 살고 있던 외할머니에게 연락을 해주셨어. 한걸음에 달려온 외할머니가 그 이후로 나를 키워주셨지. 나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주셨지. 어머니를 호되게 뭐라고 하시면서 젖을 물리는 법도 알려주시고.”

“그래.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델라는 정말 그게 다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레인이 태어났을 때는 그나마 다행이었어. 외할머니가 계속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고, 나도 제법 큰 뒤였으니까. 어머니가 누가 애 아버지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는 거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드셨지만, 그래도 그레인은 예뻐해 주셨지. 뭐, 지금은 사나운 소악마지만, 어렸을 때의 그레인은 제법 귀여웠거든.”

테라비스는 자못 유쾌하게 농담까지 섞어서 말하려고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은 지울 수 없었다.

“에델라. 난 어릴 때부터 아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어. 내가 뭐 하나 잘못하면 다들 그 탓을 했지. 어머니는 나보다 자기 남자친구에게 더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성공하고 싶었어. 날 무시하는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지.”

“성공한 셈이네. 루젠타 최고의 큰손이자,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이잖아.”

“그래. 그렇지.”

웃으며 말하는 테라비스의 목소리에는 아직 씁쓸함이 남아 있었다. 어릴 때 그가 받은 상처는 세월이 지나 그 상처가 아물고, 성공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도 했지만, 전혀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 할머니는?”

에델라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자신을 방치한 어머니 대신 키워주셨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테라비스의 목소리에서 잔뜩 그리움이 묻어나와 돌아올 대답이 짐작되긴 했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으셨고.

“돌아가셨어.”

역시…….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집을 나왔어. 어린 그레인이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적어도 그때의 그레인은 알아서 먹고, 자고, 화장실도 갈 수 있는 나이였으니까 괜찮으리라 생각했지. 그리고 그레인을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했으니까.”

그 뒤에 이야기는 전에 들었던 이야기로 이어질 것이다. 어린 테라비스가 출생 증명서를 위조하고, 해적을 만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으로.

“테라비스.”

에델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른 말 대신 몸을 세우고 손을 들어 테라비스를 끌어안았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어머니에게 방치당한 작은 테라비스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놀림을 당한 어린 테라비스를, 아직 어린 나이에 저보다 더 어린 동생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한 어린 테라비스를. 그리고 아직 가슴에 상처를 간직한 채인 지금의 테라비스까지도. 에델라는 모든 테라비스를 토닥여주고 싶었고, 또 안아주고 싶었다.

16559930576841.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