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2021.10.04.
“테라비스!”
거의 악을 쓰는 목소리로 테라비스를 찾는 소리에 에델라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건 테라비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언제…….”
그를 기다리다 잠이 들어버렸던 에델라는 침대 옆자리에서 테라비스를 발견하자 언제 들어왔는지 물으려고 했다.
“쉿! 잠깐만.”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테라비스가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제 입술 앞에 세우는 바람에 에델라는 질문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테라비스!!”
그리고 둘이 들은 목소리가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테라비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질적이고, 짜증이 섞인,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에델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빌어먹을.”
제발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것이기를 바랐던 테라비스는 제 희망이 깨어지자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테라비스의 찌푸린 인상을 본 에델라는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언제나 능글맞은 테라비스가 저렇게 대놓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니! 뭔지는 몰라도 큰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사업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빚쟁이인 거야?”
에델라의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사건과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그것이었다. 빚쟁이. 그 단어를 입에 올린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니. 빚쟁이보다 더한 사람.”
테라비스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델라의 설명해달라는 시선에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빚쟁이는 내가 돈을 빌리기라도 했지. 이건 빌린 적도 없는데 갚아야 하거든.”
에델라가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버린 테라비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 * *
“맙소사!”
테라비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차 가득히 짐을 실은 것도 모자라, 뒤에 커다란 짐마차에도 짐이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보면, 거기다가 그 앞에는 잔뜩 성이 난 표정의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서 있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니? 이 어미가 부르면 빨리 달려 나와야 할 것 아니니!”
마차의 옆에 서서 연신 부채를 팔랑거리며, 아직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람은 테라비스의 어머니인 레베카였다.
“머리는 또 왜 그 모양이니? 점잖지 못하게.”
테라비스의 까치집을 흘겨보며 레베카는 말했다. 오랜만에 본다는 인사나, 그동안 잘 지냈냐는 말 따위는 없었다.
“대체 이 많은 짐은 뭡니까?”
그리고 테라비스도 그녀에게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네 집에서 한 달 정도 있어야겠다.”
부탁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누구 마음대로요? 안 됩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그 선언을 거절했다.
“어쩔 수 없어. 집이 지금 수리 중이거든.”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집인데 수리는 무슨 수리요?”
“요즘엔 응접실을 알단테식으로 하는 게 유행이라고 해서 말이야. 그 양식이 고풍스럽고 멋있긴 하더라.”
“그럼 호텔에 머무시면 되잖아요. 이렇게 멀리까지 짐을 바리바리 싸서 오실 게 아니라.”
“어머, 여자 혼자 어떻게 호텔에서 지내니? 무슨 소문이 날 줄 알고?”
수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레베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자 테라비스는 기가 막혔다. 알단테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집 전체도 아니고 응접실을 수리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릴 리 없었다. 애초에 정말 집수리를 하는 건지도 믿을 수 없었다. 테라비스는 제 어머니를 잘 알았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이다.
“뭐가 갖고 싶으신데요?”
“응? 뭐가 말이니?”
간특하게도 레베카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제 속내를 밝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편지로 말해선 제가 절대로 사드리지 않을 것 같은 비싼 뭔가를 원해서 여기 오실 걸 테니까요.”
테라비스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레베카를 쳐다보았다. 응접실 수리를 걸고넘어지는 걸 보면, 새 저택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원래 자기가 좋아하는 보석 종류? 레베카의 꿍꿍이를 알아내기 위해서 테라비스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녀의 수작이 다 보이는 것처럼.
“어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난 그저 집수리 기간 동안 갈 곳이 없어서 왔을 뿐이야. 좀 멀긴 해도 아들 집이 편하잖니?”
“그 아들이 불편해하는데 말입니까?”
“어휴, 네가 불편할 게 뭐 있니? 나같이 얌전한 사람이 어딨다고. 안 그래, 귀족 며느님?”
말을 돌리고 싶었던 레베카는 테라비스의 뒤쪽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서 있던 에델라에게 말을 걸었다.
“어쩜, 여전히 예쁘네. 그런데 귀족이라서 그런가? 인사성이 좀 없네. 아니면 내가 평민이라고 우습게 보여서 그런가?”
“아닙니다, 어머님. 그저 타이밍이…….”
네 아들과 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싸우기에 바빠서 말을 붙일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
“어머, 얘도 참. 방금 말 못 들었어? 집수리해서 편하게 집에도 못 있고 이렇게 피난 오듯 아들 집에 왔다니깐. 이게 잘 있는 거겠니?”
결혼식장에서 그나마 쓰던 반존대는 이제 아예 없었다. 레베카는 에델라가 귀족인 것은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인지, 완전히 그녀를 하대했다.
“일단, 아침부터 먹자꾸나.”
마치 자기 집인 양, 레베카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 * *
“어머, 이것 맛있구나!”
레베카는 웃으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녀가 먹고 있는 것은 그냥 과일이 아니라 열대의 어느 지방에서만 난다는 고급 과일이었다. 당연히 비싸고, 귀했다.
“어머니.”
테라비스가 그녀를 불렀지만, 레베카는 여전히 과일을 먹기에 바빴다. 뭔지 이름도 모르지만, 제가 사는 도시에서는 보지 못한 희귀한 것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는.
“넌 이렇게 맛있는 걸 저 혼자만 먹니? 이 어미에게도 좀 보내주고 그러면 좀 좋아?”
그리고 테라비스를 타박하기에도 바빠서, 그가 자신을 부른 연유를 물을 수가 없었다.
“어머, 이 연어도 정말 맛있다.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가? 생선이 싱싱하고 맛있구나.”
레베카는 감탄하며 맛있게 접시 위에 생선을 먹었다.
“연어가 아니라 농어예요. 색도 맛도 전혀 다른 생선이라고요.”
“어머, 그러니?”
테라비스의 타박에도 레베카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농어를 더 먹을 따름이었다.
“어쨌든 맛있구나. 예전에 도데 씨와 사귀었을 때, 그가 레스토랑에 데려가 준 적이 있는데 말이야. 거기 연어가 참 맛있었단다. 도데 씨는 잘 지내나 몰라. 콧수염이 참 멋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야기 중에 된 발음이 섞여 있자, 레베카의 입 안에서 씹다 만 흰 생선이 톡 튀어나와 산란기의 연어처럼 그녀의 접시로 되돌아갔다.
“그래. 아가, 넌 어떤 걸 좋아하니?”
갑자기 에델라에게 질문이 돌아가자, 조용히 아침을 먹고 있던 에델라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 아가. 너 말이야.”
“아, 저는 다 잘 먹어요. 연어도, 농어도 다 좋아한답니다.”
먹던 음식을 꿀꺽 삼키고, 에델라는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농어 한 점을 더 입에 집어넣었던 레베카는 그녀의 대답에 갑자기 까르르 웃었다. 그 덕에 이번에는 레베카의 입에서 씹던 무언가가 에델라의 접시 위로 튀었다. 생생하게 그것을 목격한 에델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얘도 참. 내가 물은 건 생선이 아니라, 남자야.”
“네?”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지를 묻는 거야. 도데 씨는 콧수염이 멋있었고, 폰데 씨는 반짝이는 이마가 귀여웠지. 힐데카스 씨는 매너가 좋았고, 윈터 씨는……. 훗! 윈터 씨의 장점은 비밀이란다. 네 시어머니의 은밀한…….”
“어머니!”
레베카의 과거 남자친구들의 이름을 듣고 있던 테라비스는 제 어머니의 주책맞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혼자라면 그럭저럭 들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중간에 퉁명스럽게 그래봤자 다 3개월도 가지 못한 남자친구들 아니냐고 면박을 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델라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어머니의 남성 편력을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고, 교양 없음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녀를 타박하며 제 얼굴의 침 뱉기도 그만하고 싶었다.
“뭐가 갖고 싶으신데요?”
“어머, 얘도 참! 그런 게 아니래도.”
레베카는 또 한껏 내숭을 떨며, 우아한 척 냅킨으로 입을 닦아냈다. 그래봤자 아까 흘린 농어의 소스가 그녀의 입가에서 이미 말라붙어 있는 것은 그대로였다.
“뭐, 다가오는 내 생일 선물을 네가 굳이, 미리 사주고 싶다면야 내가 살짝 귀띔은 해줄 수 있지만?”
테라비스는 레베카의 생일을 정확하게 몰랐다. 늘 말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름에도 곧 생일이었고, 가을에도 곧 생일이었고, 겨울에도 생일이었다. 다만, 봄에는 생일이 아니었는데, 그건 성탄제가 있어서 그녀의 생일이 아니더라도 공식적으로 선물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가 가지고 싶으신 건데요?”
생일이든, 뭐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가지고 싶은 것은 가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돈 잘 버는 그녀의 아들은 레베카의 물주였다. 그동안 사귀었던 남자들보다 훨씬 돈이 많은.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지, 아주 귀한~ 블루다이아몬드가 루젠타에 있다더구나.”
“…….”
“게다가 목걸이, 귀걸이, 반지까지 아주 풀세트로 어느 귀금속점에 전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
보석 이야기를 하는 레베카의 눈은 어느새 반짝반짝하게 변해 있었다.
“테라비스, 네가 더 잘 알겠지? 루젠타의 상권은 네 손바닥 안 아니니?”
“그 블루다이아몬드에 관한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네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드는지, 보석이 없으면 영 볼품이 없지, 뭐니! 너랑 그레인을 키운다고 고생해서 이 손 좀 보렴. 영락없이 늙었단다.”
레베카는 제법 애처로운 척을 하며 제 손을 테라비스에게 내밀었지만, 그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만, 냉랭하게 레베카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못 사드립니다.”
“왜 너무 비싸니? 네 재력으로도 힘들어?”
레베카는 슬쩍 테라비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래서 그가 발끈해서 당장 사주겠다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아뇨. 당장이라도 사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옳거니! 바로 그거지! 레베카는 테라비스의 말에 쾌재를 불렀다.
“어머니께 사드리기 싫습니다.”
테라비스의 명확한 거절의 이유에 레베카는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껏 테라비스가 자신의 청을 거절한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단호한 적은 처음이었고, 저렇게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본 적도 처음이었다.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제가 한 말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감히!’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레베카와 그런 레베카와 테라비스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해하고 있는 에델라를 누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