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문제와 답2021.09.27.
스치는 숨소리가 차가웠다. 닿은 팔도, 가슴도, 배도, 모두 차가웠다. 사람의 체온이 따뜻하다는 사실이 거짓말인 것처럼, 에델라와 테라비스의 포옹은 그저 싸늘했다.
“…….”
“…….”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시간이 되자 포옹을 풀었고, 각자의 자리에 누웠다. 불이 꺼지고, 침실은 어둠과 침묵 속에 잠겼다.
“하아…….”
에델라의 입에서 나온 다섯 번째 한숨이었다. 녹스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수를 놓고 있었다. 이전에 녹스가 가져다주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하지 못 하고 있던 일감이었다.
“마님.”
녹스가 에델라를 불렀지만, 에델라는 듣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계속 바늘만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에델라 아가씨.”
“응?”
에델라에게 보다 익숙한 호칭을 부르자, 그제야 에델라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에 아까의 마님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이 나타나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아, 아니.”
에델라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로, 아니라고 더듬거리며 말을 하는 에델라를 보며 녹스는 웃었다. 녹스는 그런 에델라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틀림없이 그러리라 생각했다.
“고민은 아니고, 그냥…….”
녹스의 웃음에서 제 생각이 다 탄로 나버린 것을 알아차린 에델라는 더듬더듬 변명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녹스는 다 알아차릴 것이 빤했다. 어릴 때부터 계속 에델라를 보아온 녹스였고, 나이를 허투루 먹은 그녀가 아니었다.
“테라비스가 화가 난 것 같아.”
결국, 에델라는 제 고민을 털어놓고 말았다.
“바넬레오 님이요?”
녹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그가 화가 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고용인들이 잘못해도 테라비스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물론, 무조건 웃어넘기는 사람도 아니긴 했다. 작은 실수 정도는 그냥 넘어가는 편이었고, 큰 실수라고 해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적당히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른 사람은 아니었다. 잘잘못은 반드시 짚고 넘어갔고, 제법 엄하게 지적도 했다. 저택의 식재료를 조금씩 빼돌려 뒷돈을 챙긴 고용인이 그 사실을 들킨 적이 있었다. 그때도 태라비스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를 해고하고, 배상금을 청구하고, 그가 다시는 다른 저택에서 일할 수 없도록 손을 썼을 뿐이었다. 녹스가 이곳에서 일한 5년 동안, 테라비스는 사사로이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 때문에 화를 내셨는데요?”
“내가 예전에 샤를과…… 아니, 엔젤로테 백작님과 약혼을 했던 것을 알고는 화를 내었어. 먼저 말하지 않은 내 잘못이 있다는 건 알아.”
“잠시만요, 예전에 아가씨와 약혼했던 그 도련님이 백작님이 되셨다고요?”
“응.”
“세월 참 빠르군요.”
녹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이내 지금이 감탄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곤, 진지하게 다시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바넬레오 님이 화를 내셨다고요?”
“그래. 나도 전부터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었어. 사실, 이전에 파혼 이야기까지는 했었어. 다만 그 상대방이 엔젤로테 백작님이라는 사실을 미처 말하지 못했던 거지.”
“그 상대방이 엔젤로테 백작님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건가요?”
“이번 테라비스의 거래 상대가 바로 엔젤로테 백작님이시거든.”
“그러니까…….”
녹스는 말끝을 흐리며, 산더미 같은 수건을 후다닥 정리할 때처럼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부인의 과거 남자가 자신의 거래처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자신의 과거를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고. 보통의 남편이라면 당연히 화낼 일었다. 거기다 당연히 질투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보통의 남편이 아니었다. 에델라의 계약 남편이었다. 굳이 화낼 이유가 없는.
‘혹시?’
녹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침울한 표정으로 자기가 수놓은 것을 쳐다보고 있는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귀엽고 예쁜 아가씨였다. 그건 에델라의 예쁜 얼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델라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한 명 더 생긴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녹스는 아직도 침울한 표정의 에델라에게 활기차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바넬레오 님이 그리 오래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럴까?”
“그럼요. 곧 화를 푸실 거예요. 오래 담아두시는 스타일은 아니시거든요.”
에델라만큼은 아니었지만, 녹스는 테라비스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지금은 좀 혼란스럽고, 질투가 나서 에델라에게 화를 낸 것 같지만, 성정이 좀스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뭐, 그렇게 넓은 아량과 배려를 가진 남자도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평균은 되었다. 거기다가 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평균 이상으로 잘해주는 남자이기도 했다. 그건 이 저택 고용인들의 임금이 다른 곳에 비해서 후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똑똑.
“네, 들어와요.”
노크 소리가 들리자, 녹스가 얼른 대답했다.
“마님, 예로니아 저택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 그래?”
에델라는 우울한 중에 들린 반가운 소식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깄습니다.”
에델라는 편지를 받자마자 겉면에 쓰인 아버지의 필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직접 편지까지 쓰시는 걸 보면 이전보다 훨씬 몸이 나아지신 게 분명했다.
“얼른 열어보세요, 아가씨,”
예로니아 백작 내외의 소식이 궁금했던 녹스는 옆에서 에델라를 재촉했다.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편지를 열었다. 아버지의 첫인사에 저도 모르게 환한 웃음을 짓던 에델라의 표정 편지를 읽어내려갈수록 점점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테라비스가…….”
“바넬레오 님의 이야기가 쓰여 있어요?”
에델라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에 녹스는 더 애가 닳았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녹스의 재촉에 에델라는 다시 한번 편지를 쳐다보았다. 제가 옳게 읽은 것이 맞았다.
“예로니아 저택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보냈다고 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네? 언제요?”
“며칠 전에. 무슨 연락이 따로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거래.”
그는 한 번도 예로니아 저택에 무언가를 보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에델라는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그야말로 당황스러웠다. * * *
에델라는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던히도 굶어보았던 에델라였지만, 최근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테라비스와 결혼을 하고 이 저택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가씨, 인제 그만 들어가시지요.”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아직 밤에는 날씨도 쌀쌀한데 그러다가 감기에 걸리시겠어요.”
“알았어. 조금만.”
녹스의 채근에도 에델라는 제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목을 빼고, 들고 있던 등을 들어서 저 멀리에서 뭐가 보이지는 않은지 쳐다볼 뿐이었다. 에델라가 기다리는 것은 테라비스였다. 밤이 늦었지만, 그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참이었다. 게다가 아무 연락도 없었다. 이전에도 한두 번쯤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돌아온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항상 연락했었다. 먼저 저녁을 먹으라든가, 먼저 잠자리에 들라든가 하면서. 이렇게 연락도 없이 늦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에델라는 그를 기다리다가 저녁 식사도 놓쳤고,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저택의 문 앞까지 나와서 마차가 언제 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넬레오 님은 원래 자주 늦으셨어요. 상단에 일이 많으셔서요.”
“하지만 연락도 없이 늦은 적은 없었잖아.”
“이전에는 자주 그러셨는걸요.”
“최근에는 없었잖아.”
여전히 저 멀리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에델라는 녹스의 설득을 거부했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초조한 목소리로 에델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상단에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아. 아니, 그냥 내가 가보는 게 낫겠어.”
“어휴! 이렇게 밤이 늦었는데 어딜 가신다고 그러세요. 위험해요, 아가씨. 상단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벌써 연락이 왔겠죠.”
“하지만…….”
에델라와 녹스가 실랑이를 하던 중에 저 멀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둘의 귀에도 그게 들렸고, 얼른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차 소리인 것 같지?”
“네.”
“테라비스인가?”
“그렇겠죠? 이 시간에 마차를 타고 대문을 들어올 사람은요.”
녹스의 말에 에델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아무 일이 없어서.’
지난번, 괴한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는 에델라는 혹여 테라비스도 그 비슷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초조해하던 참이었다.
“할멈! 이걸 부탁해.”
“네?”
가만히 마차를 바라보던 에델라는 그것이 테라비스의 마차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급하게 자신이 들고 있던 등을 갑자기 녹스에게 쥐여주었다.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아, 아니. 아가씨!”
에델라는 그 말만을 남기고 급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기, 녹스.”
닫혔던 문이 도로 열리더니, 에델라가 다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비밀로 해줘.”
“네? 왜요?”
몇 시간씩 밖에서 서 있었던 것은 에델라였다. 자신은 그저 주기적으로 나와서 그만 들어가시라고 잔소리를 했던 것이 다였다.
“어, 어쨌든.”
그 말을 남기고, 에델라는 급히 문을 닫았다. 마차가 문 바로 앞에 당도한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녹스 할멈?”
마차에서 내린 테라비스는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보며 조금 놀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고 하더니, 그게 할멈이었어?”
“아……. 많이 늦으셨네요.”
그의 질문에 녹스는 애매하게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 말하면 테라비스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고, 아니라고 말하면 에델라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
테라비스의 대답에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고갯짓이 테라비스의 말을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금 전에 에델라에게 말했듯이 테라비스는 일을 한다고 종종 늦곤 했다. 그리고 굳이 그것을 고용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저택의 주인은 그이니 당연하였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결혼 전의 테라비스였다. 에델라와 결혼 후의 테라비스는 거의 제시간에 집에 돌아왔고, 늦게 되면 항상 먼저 연락을 주었었다.
‘아무래도 쉽지만은 않겠어.’
여자에게 과거의 남자가 있다고 화를 내는 남자. 화를 내는 남자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 괜히 연락도 없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남자. 그런 테라비스를 기다리는 여자. 오래 산 녹스 할멈의 눈에는 답이 빤히 보였다. 문제는 두 남녀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