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삼자대면2021.09.24.
샤를리안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가 아는 사람이 맞았다. 저렇게 오뚝하면서도 조그만 귀여운 코를 가진 사람이 흔할 리 없었고, 그림으로 그린 듯 유려한 곡선을 가진 붉은 입술도 흔하지 않게 어여뻤다. 게다가 아침이슬만 모아 다 놓은 듯, 저렇게 맑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었다. 에델라 드 예로니아, 샤를리안의 작은 신부님. 그녀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에델라 드 바넬레오라는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라.
“…….”
테라비스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니,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 천치였다. 에델라가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유지하던 안다비아의 귀하신 손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보면 저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를 할 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고 있던 눈도 놀란 고양이처럼 커졌다. 에델라가 자기소개하자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사냥꾼을 만난 산노루처럼 펄쩍 뛰게 놀랐다. 그것은 테라비스가 예상했던, 부인의 이름에 남편에게는 없는 귀족을 뜻하는 ‘드’가 들어가 있어서 의아해하는 놀라움이 아니었다. 에델라의 등장과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친절과 예의로 꽁꽁 싸맨 것 같은 귀족 나리께서 인사를 건넨 부인을 뻣뻣하게 세워두는 무례함까지 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인, 에델라도 마찬가지였다. 샤를리안이 사냥꾼을 만난 산노루였다면, 에델라는 죽은 산노루를 처음 본 사람처럼 핼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테라비스의 신경을 가장 자극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눈도 한번 깜박이지 않고 서로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는 듯이.
“두 분이 서로 아시는 사이신가요?”
테라비스는 애써 웃으며 은근슬쩍 에델라의 허리를 감쌌다. 분명 어제 허리를 잡고 춤을 추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허리를 감싸 안고 잠이 들었었다. 어제도, 그제도, 자신이 안았던 그 허리였고, 그 에델라였다. 하지만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과거에 가문 간에 잠시 알았던 사이예요.”
마침내 샤를리안에게서 시선을 뗀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질문에 답했다. 그 목소리는 이제껏 테라비스가 에델라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딱딱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저 잠시 알았던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테라비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져 물을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사업상의 중요한 자리였고, 상대방은 먼 나라에서 온 중요한 손님이었다.
“그런가요, 엔젤로테 백작님?”
하지만 테라비스의 입에서는 불쑥 그 소리가 나오고야 말았다. 목소리는 쾌활했고 비즈니스적인 톤은 잃지 않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네. 예전에 알던 사이입니다.”
아직도 에델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샤를리안이 말했다.
“사업상의 자리이니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네요. 저는 집에서 기다릴게요, 여보.”
테라비스의 팔을 살짝 잡으며 에델라가 말했다. 그만 놓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여보’라는 소리에 샤를리안의 눈썹이 꿈틀했고, 그녀의 손이 테라비스의 팔에 닿는 것을 보자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집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에는 샤를리안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에델라의 몇 단어 되지 않는 문장이 연거푸 샤를리안에게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래요, 여보.”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말에는 허락하면서도, 몸으로는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에델라의 몸이 테라비스의 몸에 바싹 붙자,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마치 에델라에게 애정 어린 이마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테라비스의 품 안에 에델라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샤를리안도 그의 행동에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중에 집에서 봐요.”
그들과는 반대로 테라비스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생긋 웃는 미소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미소였다. 상대방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고, 제 속내를 전혀 들키지 않도록 거울을 보고 연습한 것처럼 완벽한 미소였다.
“자,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보실까요?”
에델라가 돌아가고 나서 테라비스는 다시 협상테이블에 앉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에델라는 서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붉은바람 상단에서 돌아온 이후, 똑같은 자세였다. 테라비스가 집으로 돌아와, 에델라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재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해.”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지만, 에델라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내게 어릴 때 파혼한 약혼자가 있었다고 말했었지.”
에델라가 꺼낸 이야기의 서문만으로도 테라비스는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전부 알아차렸다. 기승전결 따위는 필요 없었다. 거창한 추리도 필요 없었다. 테라비스의 눈에는 두 사람의 대서사시가 적힌 한 권의 책이 차르륵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장 책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지?”
테라비스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가웠고, 또 낮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치솟고 있는 분노의 온도와는 극점이었다.
“말할 기회가 없었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전에 파혼 경험이 있다고 했을 때 말할 수 있었잖아.”
에델라의 말에 그는 차가운 조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매일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매일 같은 식탁에 아침을 먹고, 또 저녁을 먹었다. 거기다 매일 한 시간씩 포옹했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테라비스의 입장에선 그건 개소리였다.
“그때 말하려고 했어. 하지만 당신이 대화를 끊었잖아.”
“내가? 언제?”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침대에 먼저 누웠잖아.”
“침대에 누우면 내 귀가 막히기라도 해? 갑자기 청력을 잃게 되는 거야? 맙소사! 침대가 그렇게 위험한 물건인 줄 이제껏 몰랐군. 앞으론 허리가 부서질 것 같더라도 바닥에서 자야겠어.”
“당신이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굴었단 말이야. 그래서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이제 내 탓을 하는 거야? 내가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던가?”
“그렇게 말하는지 알았어.”
“그럼 내가 듣기 싫어했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데? 독심술이라도 쓸 수 있는 건가?”
테라비스의 비아냥에 에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야기를 해봤자 싸움이 될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지금도 독심술로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건가?”
아니, 이미 싸움이 된 것 같았다.
“대체 언제까지 숨길 셈이었어?”
“숨길 생각은 아니었어. 말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뿐이야.”
“빌어먹을! 그 기회를 누가 숨겨놓기라도 했어? 서랍장에 꽁꽁 감춰뒀나? 이불 밑에 숨겨뒀어? 아니면 정원의 나뭇가지에 목매단 시체처럼 대롱대롱 누가 달아놓기라도 했어?”
끝내 테라비스의 화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성큼성큼 에델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의 변화에 에델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애써 침착하게 그의 눈빛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그것이 테라비스를 더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은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에델라는 너무도 담담했다. 조금 창백하고, 조금 당황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조금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질문하는 목소리마저 침착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에델라의 심장이 얼마나 펄떡거리고 있든, 손끝이 얼마나 차가워지고 있든, 치마 속 다리가 얼마나 후들후들 떨리든,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이미 다 끝난 과거의 일이잖아.”
에델라는 그렇게 말했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테라비스는 그게 아니었기에 문제였다. 오늘 에델라와 샤를리안의 눈빛은 그저 가문 간에 알던 사이이던 눈빛이 아니었다.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약혼도 아니었다. 가문이 망해서 자신을 버린 약혼자를 감쌌던 에델라의 지난번 발언도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좋아했다. 어릴 적 첫사랑이든, 풋사랑이든, 그 무어라고 이름을 붙이든, 에델라과 샤를리안은 서로 좋아했었다. 그리고 오늘의 둘의 눈빛은 그것이 그저 과거의 감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아직 감정이 그대로이든, 그저 찌꺼기만 남은 것이든, 둘 사이는 아직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테라비스를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샤를리안과 약혼하고, 또 파혼했던 일이 네 사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진 않을 거야.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는 어떤 사람인데?”
“…….”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말문이 막혔다. 샤를리안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분명 지금의 샤를리안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변했는지는 에델라도 잘 몰랐다.
“약혼녀의 집이 망했다고, 바로 약혼녀를 버리는 나쁜 놈이잖아, 그 새끼.”
“테라비스!”
하지만 적어도 나쁜 놈은 아니었고, 남들로부터 욕으로 지칭될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에델라가 아는 샤를리안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에델라는 항의의 뜻을 담아 테라비스의 이름을 불렀다.
“왜? 네 과거의 남자에 대해서 욕하니 기분이 나빠?”
테라비스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에델라에게 물었다. 대체 마음씨 고운 귀족 영애는 자신을 버린 그놈을 어디까지 감싸려는 건지 궁금해서 더 심한 욕을 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에델라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물을 뚝뚝 흘릴 만큼 저급한 욕을 퍼붓고 싶었다. 그놈은, 그 새끼는 그런 욕을 들어도 쌌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가지고 당신이 이렇게 화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야.”
“아무 상관 없는 일?”
“그래. 내 과거는 우리 계약과 아무 상관 없잖아.”
갑자기 피가 식었다. 불같이 타오르던 분노가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싸늘히 식었다. 아니, 테라비스의 불을 끈 것은 에델라의 눈이었다. 그가 예쁘다고 생각한, 에델라의 푸른 눈이 테라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와 테라비스는 아무 상관 없다고 차갑게 잘라내고 있었다. 그들은 애정으로 맺어진 진짜 부부가 아니니까.
“그래. 우리는 계약 관계니까.”
서로 간에 협의하고, 그 내용을 계약서로 작성하고,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관계일 뿐이니까.
“과거에 누구랑 약혼하고, 누구랑 파혼하고, 누구랑 사귀었던지, 아무 상관이 없지. 계약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차가운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의 퍼덕거리던 심장이 일순간 멎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과거가 테라비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서로 아무 상관 없는 사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테라비스의 그 말이 에델라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테라비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상처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