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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혀끝에 맴도는 말 (41/92)

41화. 혀끝에 맴도는 말2021.09.20.

“그러게, 아끼지 말고 좀 신고 다니지. 그럼 발이 덜 아팠을 것 아니야.”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발을 주무르며 그녀를 타박했다.

“새 구두 처음 신어 봐? 미리 길을 들여놨어야지.”

스타킹 너머로 부어오른 것이 느껴지는 엄지발가락을 주무르는 손은 안타까움이 반쯤, 꾸중이 반쯤 섞여 있었다. 에델라가 언제쯤 그 구두를 신을까 눈여겨보고 있던 테라비스였다. 그녀의 성격상 집에서 그것을 신을 리는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고이고이 아껴서 어디 나갈 때나 신으리라는 걸 알았다. 새로 산 드레스도 그랬으니까. 상단에 갈 때 신으려나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혹여 예로니아 저택에 갈 때는 신을까 했지만, 그때도 에델라는 낡은 구두를 신고 갔다. 대체 언제 신으려고 저렇게 아끼나 싶어서 두고 보았더니, 드디어 오늘 구두를 꺼내 신은 에델라였다. 그래도 관속에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셈은 아니었던 모양이라며 테라비스는 생각했다.

“그만해. 더러워.”

에델라는 슬그머니 발을 빼내며 말했다. 새 구두를 처음 신어보냐고?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대략 15년 전에 새 구두를 신은 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새 구두가 발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있어 봐.”

하지만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발을 도로 붙잡았다. 지금 이렇게 주무르지 않으면 내일은 더 퉁퉁 부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아니, 지금 이렇게 한 대도 내일 에델라의 발은 부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 몰라?”

“몰라.”

“이제부터 알아 둬. 아끼면 똥 돼. 음식은 아끼면 똥 되고, 옷은 아끼면 유행이 지나가. 돈도 마찬가지야. 아끼면 물가만 오르고 돈의 값어치가 낮아져. 그러니까, 음식이든 옷이든 돈이든 좀 써. 똥을 만들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 말 좀 그만해.”

에델라는 자꾸 똥, 똥 거리는 테라비스를 향해서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계속 그 단어를 들었더니, 마차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똥 이야기 듣기 싫어? 더러워?”

“그래.”

“그럼 내가 이런 이야기 안 하게 해. 저런 구두는 열 켤레라도 사줄 수 있으니까 아껴 신다가 이렇게 발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지 말라고.”

“내가 무슨 문어도 아니고, 구두가 그렇게 많아서 뭐 한다고.”

“구두로 뭐하긴 뭘 해? 발에 신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테라비스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보다도 작은 에델라의 발을 손 전체로 꾹꾹 주무르고, 부어오른 발가락은 손가락으로 조물조물 주물렀다. 처음에는 조금 아프다 싶었지만, 이내 에델라는 그의 안마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발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에델라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고, 끝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에델라.”

“응.”

“오늘 수고했어.”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눈을 떠서 그를 쳐다보았다.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오늘 새 구두 속에서 고생했을 그녀의 발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을 안마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마웠어.”

여전히 에델라의 발만 쳐다본 채, 테라비스는 무심히 툭 말을 내던졌다. 마치 에델라의 구두를 벗겨내 바닥에 내던져버렸을 때처럼. 그의 말에 에델라 안에 있던 감정의 덩어리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들었던 모욕적인 말도, 갑자기 샤를을 만나서 느낀 당황스러운 감정도 전부 녹아내리고 있었다.

“…….”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에델라의 혀끝에서만 단어가 맴돌았다. 별것 아니야. 고맙긴 뭘. 계약사항에 있는 거잖아. 내가 해야 할 의무였잖아. 모두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에델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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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에델라는 늦잠을 잤다. 일어나서 옆을 보자 테라비스는 없었고,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평소보다 많은 양의 햇살이 침대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으흠…….”

늦잠을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몸을 일으키는 에델라의 입에서는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가운을 걸친 에델라의 눈에 메모 하나가 보였다. 테라비스가 남기고 간 것 같았다. 계약서 작성이 다 되었으면, 상단으로 가져다줘. 정말이지 용건만을 남긴, 테라비스다운 메모였다. 에델라는 피식 웃으면서 메모를 내려놓았다. 그가 말한 계약서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모를 내려놓고 씻으러 가려던 에델라는 무거운 몸과는 달리 발만은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리퍼에서 발을 꺼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 어제 퉁퉁 부었던 발이 지금은 부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왜 그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고맙다고 말해야겠어.”

에델라는 슬리퍼 안으로 다시 발을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샤를리안의 이야기도 해야겠고.”

오늘은 테라비스와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 * * 상단에 도착한 에델라는 평소와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조용하면서도, 소란스러웠다. 그것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자면, 분명히 직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눈이 쉴 새 없이 단장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옆에 있는 사람과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조용한 소란스러움은 에델라가 등장하자 곧 깨어질 듯했지만, 이내 다시 다들 입을 다물었다. 열심히 단장실의 눈치를 보면서.

“안녕하세요, 사모님.”

“안녕하세요.”

대표로 입을 연 직원을 향해 에델라는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번역 서류를 가지고 왔어요. 계약서요.”

“아, 그러시군요. 음…….”

에델라의 용건은 알았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직원은 잠시 망설였다. 평소라면 테라비스에서 알렸을 것이다. 아니면, 에델라를 단장실로 안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단장실에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럴 경우, 결정 권한은 당연히 부단장인 마틴에게로 넘어가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마틴 역시, 지금은 단장실에 있었다.

“안에 계신가요?”

직원이 뭐라고 답을 하지 못하자, 에델라가 넌지시 단장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 네. 안에 계십니다. 그런데 손님이 와 있으셔서요.”

“그렇군요. 그럼 이걸 전달해주시겠어요?”

“네. 전달을 해드릴 수는 있는데…….”

그는 바로 서류를 받아들지 않고 머뭇거렸다. 지금 붉은바람 상단의 최우선 과제는 안다비아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이었고, 에델라가 들고 있는 서류는 그 안다비아와의 거래에 필요한 서류였다. 이걸 자신이 들고 있어도 되는지, 조금이라도 지체를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문제는 아니고, 지금 단장실에…….”

그가 어물어물 상황을 설명하려는 순간, 단장실의 문이 열리고 마틴이 나왔다.

“부단장님! 사모님께서 안다비아 계약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그는 마틴을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을 대신해서 이 상황을 판단해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 오셨습니까?”

마틴은 에델라를 보자, 깍듯하게 묵례했다. 에델라 역시 그런 마틴을 향해서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안다비아의 계약서 작성이 끝나서 가지고 왔어요.”

“네, 감사합니다.”

서류를 받아든 마틴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네.”

“크로이, 내 방에서 작년 우리 매출 자료를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네, 부단장님.”

에델라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마틴은 원래 자신의 목적이었던 작년 매출 서류를 직원이 가져다주기를 기다렸다. 아직 목발 신세인 마틴인지라 그편이 빨랐다.

“같이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리고 필요했던 서류를 받고 나선, 에델라에게 같이 단장실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의했다.

“네? 안에 손님이 계신 것 아닌가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봐선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던 에델라가 말했다.

“네. 안다비아에서 오신 손님들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배가 일찍 도착했다고 하시더군요. 안으로 같이 들어가셔서 인사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마틴의 말에 에델라는 그야말로 당황했다. 그가 말한 안다비아에서 온 손님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안에는 당연히 테라비스도 있을 터였다.

“사모님께서 안다비아 서류 번역을 맡아주셨고, 거래가 성사되게 되면 계속 번역 일을 맡으실 테니 미리 인사를 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붉은바람 상단 단장의 아내가 아니라 번역가로 에델라를 소개하고 싶다고 마틴이 말하자 에델라는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할지 몰라 공황에 빠질 것만 같았다.

“자, 들어가시죠.”

“아, 아뇨. 저는…….”

저 안에 누가 있다는 걸 아는 에델라는 어떻게든 거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올바른 변명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부단장? 뭐 하는 거야?”

서류를 가지러 나간 마틴이 돌아오지 않자, 혹시 불편한 다리때문에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테라비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에델라! 벌써 일을 끝냈나 보군요.”

그리고 에델라를 발견했다.

“마침 잘 됐어요.”

테라비스는 웃으면서 성큼성큼 에델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에 안다비아에서 온 손님들이 있어요. 인사를 하는 게 어때요? 유능한 우리 번역가님을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더불어서 앞으로 원활한 의사소통은 걱정하지 말라고도 말씀드리고 싶고요.”

머릿속이 거래와 장사로 꽉 찬 이들의 사고방식은 다 똑같은 걸까?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보자마자 마틴과 똑같은 말을 했다.

“아니, 난!”

“자, 어서 들어가요.”

에델라에게 손을 댈 수 없는 마틴과는 달리 테라비스는 한 손으로는 에델라의 손을 잡아당겼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등에 대고 밀었다. 에델라는 순식간에 단장실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어떻게 하지?’

에델라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소개해드릴 분이 있어서요.”

테라비스는 활짝 웃으며 눈앞에 사람을 쳐다보고, 그다음으로는 에델라를 쳐다보았습니다.

“두 상단 사이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준 붉은바람 상단의 유능한 번역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테라비스의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에 비해서 에델라는 참으로 난처한 듯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 아내, 에델라 드 바넬레오입니다.”

에델라의 이름이 불렸다. 계속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에델라는 알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델라 드 바넬레오입니다.”

에델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의 샤를리안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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