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재회2021.09.17.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에델라는 그대로 굳어졌다. 누군지 몰라도 제발 자신이 운 것을 보지 못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에델라?”
굳어져 있는 에델라의 등을 향해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에델라를 불렀다. 익숙하고도, 낯선 향기가 에델라의 어깨를 넘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독특한 억양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이 누군지가 기억났다.
“샤를?”
에델라는 향기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그 향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보였다. 너무 세월이 흘러서 작았던 아이는 훌쩍 큰 어른이 되어 있었지만, 에델라는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푸른 바다의 부서지는 금모래 같은 백금발도, 곱게 접히는 저 눈매도, 다정한 미소의 저 입술도. 아무리 커졌대도, 에델라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 에델라.”
그는 샤를이었다. 에델라의 약혼자이자 첫사랑이었던.
“어떻게…….”
뒷말이 마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인지, 그동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에델라가 그토록 찾았을 때는 없었던 그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에델라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이지?”
놀란 에델라를 진정시키려는 듯, 샤를리안은 살포시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것은 통했다. 에델라는 그의 인사와 미소를 보며 놀란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주 차분하게.
“안녕하세요,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오래간만에 뵙네요.”
샤를이 아니었다. 다정하게 에델라의 이름을 부르고, 부드럽게 웃어주고, ‘나의 작은 신부님’이라고 불러주었던 샤를은 오지 않은 답장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 백작이었다. 그리고 에델라는 에델라 바넬레오였다. 샤를도, 그의 작은 신부도, 이 자리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에델라.”
에델라가 자신의 풀네임을 부르고, 딱딱하게 존댓말을 하고,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며, 샤를리안은 단박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남처럼 대하는 에델라를 보며, 샤를리안은 탄식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에델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 알아. 내 원망을 많이 했을 거야.”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도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이해합니다.”
샤를리안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완강한 에델라를 보며 샤를리안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지금의 에델라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음악이 바뀌었군.”
샤를리안은 애써 웃으며, 에델라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홀로 함께 돌아가…….”
“아뇨. 전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디 백작님께서는 천천히 좋은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떠나는 에델라를 샤를리안은 잡지 않았다. 그럴 새도 없이 에델라가 달아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에델라…….”
샤를리안에게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도, 그리고 그녀가 달아나 버린 것도 너무나 갑자기 일어났다. 마치 따뜻한 봄날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꽃샘추위처럼.
“백작님!”
시종이 자신을 찾을 때까지, 샤를리안은 사라져버린 에델라의 뒷모습을 쫓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엔젤로테 백작님, 여기 계셨군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
“백작님을 은밀히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웨이스 남작도 그렇고, 그 사람도 그렇고, 루젠타 사람들은 참 행동력이 빠르군. 내가 오늘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이다니 말이야.”
안다비아에서 루젠타까지 순풍이 불어준 덕분에 샤를리안은 예상했던 날짜보다 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건 샤를리안이나 엔젤로테 상단의 사람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일정을 잡아보도록 해. 일찍 도착한 덕분에 시간도 여유로울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붉은바람 상단과의 협상을 명목으로 루젠타에 온 것이었지만, 다른 곳이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의향도 있었다. 계약서에 마지막 사인을 하기 전에는 아직 계약이 성립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샤를리안이 루젠타에 온 것은 그 계약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 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피식 웃으며 샤를리안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내가 루젠타까지 온 이유를 생각보다 빨리 만났거든.”
그렇게 말하며 샤를리안은 다시 웃었다. 부드럽고, 애틋한 미소였다. * * *
“테라비스.”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팔을 슬며시 잡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 에델라!”
에델라가 자신의 곁에 온 것을 알아차린 테라비스는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바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상기된 볼과 한껏 띤 미소, 그리고 한 손에 든 샴페인과 살짝 과장된 제스처까지. 테라비스는 약간 술에 취한 것 같았고, 또 매우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렌달프 남작 부인, 제 아내 에델라 바넬레오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에델라, 이쪽은 렌달프 남작 부인이세요. 꽃꽂이를 좋아한다고 하시니, 당신과 나누고 싶은 대화가 많으실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바넬레오 부인. 꽃꽂이를 좋아하신다고요?”
“안녕하세요, 렌달프 남작 부인. 그저 취미로 조금 하는 정도랍니다.”
“저도 취미일 뿐이랍니다. 부인께선 무슨 꽃을 좋아하세요? 저는 요즘 작약에 푹 빠졌답니다.”
“지금이 작약이 참 예쁜 계절이죠.”
본래 테라비스에게 인제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고 했던 에델라였다. 하지만 그가 렌달프 남작 부인을 소개하고, 그녀가 꽃 이야기를 시작하자 테라비스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렌달프 남작이 커다란 포목점을 하고 있어.”
테라비스가 슬쩍 그 말을 에델라의 귓가에 흘리자 더 그랬다.
“그럼 아름다운 숙녀분들께서 그보다는 조금 덜 아름다운 꽃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저는 이만 빠져드리겠습니다. 자, 샴페인도 한 잔씩 하시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시도록 하십시오.”
에델라와 남작 부인의 손에 샴페인을 한 잔씩 쥐여주며, 테라비스는 자리를 떠났다. 그의 눈에는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커다란 포목점을 여러 개 운영하는 렌달프 남작은 물론이고, 이제까지는 자신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던 고고하신 자작님도 저기서 은근히 자신에게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귀금속계의 큰손이라는 살롱의 주인도 있었고, 포웨이스 남작이 소개해준 옆 도시의 미술상과도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봐야 했다.
‘다들 이 테라비스 바넬레오 님을 원하시는군!’
테라비스는 활짝 웃으며 그들을 향해서 걸었다. * * *
“굉장했어.”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테라비스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무도회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만큼이나 들떠 있었고, 신나 있었으며, 매우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이게 다 당신 덕분이야, 에델라.”
테라비스는 환하게 웃으며 에델라에게 말했다. 창밖을 쳐다보며 멍하니 있던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일이 잘되었나 봐?”
“물론이지. 비즈니스 미팅만 내가 몇 개나 따낸 줄 알아? 그중 절반만, 아니 삼 분의 일만 성사돼도 올해의 목표 매출을 초과 달성할 수 있을 거야.”
테라비스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답했다. 테라비스가 올해의 목표 매출을 말했을 때, 마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해도 꽤 무리한 목표이긴 했었다. 하지만 그는 무리한 목표를 향해서 달리는 것을 좋아했고, 힘들게 그것을 달성했을 때의 짜릿함을 사랑했다. 오늘의 무도회로 테라비스는 단번에 그 무리한 목표를 가능한 목표로 만들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당신도 여기저기서 초대를 받은 모양이던데?”
“다과모임 두 곳에 초대를 받았어.”
에델라는 조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사실 초대를 받으면서도 조금 껄끄럽고, 두려웠다. 자신을 초대한 사람이 파우더룸의 안에서 자신을 욕했던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혹은 입으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에델라는 선뜻 초대에 응하고 싶지 않았었다.
“언제 언제인데?”
하지만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생각은 전혀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가야 한다는 것처럼 언제 갈 것이냐고 물었다.
“다음 주와 다음다음 주.”
그가 그럴 것을 이미 짐작했던 에델라 역시 그 초대에 응했다.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계약 결혼을 했고, 에델라는 이 결혼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에델라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했었다.
“에델라, 표정이 왜 그래?”
“응? 내 표정이 왜?”
“정확하게 어떻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좋지 않은 건 확실해 보이는데?”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이 굳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피곤해서 그래?”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고 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샤를리안.’
갑자기 재회한 과거 때문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에델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당황하게 했다. 게다가 마주쳤을 때의 에델라가 처한 상황은 최악이었다.
‘테라비스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저기…….”
에델라는 샤를리안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테라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델라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테라비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에델라는 당황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다음 테라비스의 행동은 에델라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그는 다짜고짜 에델라의 치마를 걷더니,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테라비스!”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이름을 거의 비명처럼 외치며, 자신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눌렀다. 순식간에 에델라의 머리로 피가 몰리며,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뭐 하는……!”
“가만히 있어 봐.”
커다란 손이 에델라에게 뻗어오더니, 에델라가 버둥거리지 못하게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가 걸치고 있던 일부를 쑥 벗겨냈다.
“자, 좀 낫지?”
에델라의 구두 두 짝을 마차의 바닥으로 툭, 툭 던져버린 테라비스가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