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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새 구두 (39/92)

39화. 새 구두2021.09.13.

“잘하는데?”

에델라는 미소를 지으며 눈앞에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에델라의 칭찬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스텝이 꼬일까 봐, 에델라의 발이라도 밟을까 봐, 넘어져서 망신이라도 당할까 봐 긴장했던 테라비스였지만, 에델라의 리드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하자 그런 마음은 점점 옅어졌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달빛 아래에서 추었던 것처럼, 제법 즐길 수도 있었다. 단둘만 있던 그때보다는 물론 못했지만.

“여기서 돌게.”

조용한 속삭임과 함께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손을 당기자,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가 주었다. 에델라가 오른쪽을 원하면, 그렇게 했다. 그녀가 왼쪽을 원하면, 그 역시 그렇게 해주었다. 느린 곡이었지만, 한 곡이 다 끝내갈 때쯤이 되자 에델라의 볼이 빨갛게 상기된 것이 보였다. 고운 입술에서 거칠어진 숨이 쌕쌕 나왔다. 보통 남성이 리드하고, 여성은 그 리드에 따라갔다. 그렇게 해도 한 곡이 끝나면 힘이 들기 마련인데, 에델라는 자신보다 커다란 테라비스를 리드해가며 춤을 췄으니 당연히 더 힘들었다.

“괜찮아?”

에델라의 허리를 감싼 자신의 손을 좀 더 넓게 펴서 조금이라도 그녀를 편안하게 받쳐주려 노력하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에델라는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힘들긴 해도 에델라는 즐거웠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도, 어머니가 세어주는 박자나 아버지의 흥얼거림이 아닌 진짜 악기 연주에 맞춰서 춤을 추는 것도 재밌었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에 제멋대로인 테라비스가 자신의 리드에 따라 춤을 추는 것 역시도 즐거웠다.

“자, 마지막이야.”

에델라가 말하는 마지막이 뭔지 테라비스도 알았다. 음악이 끝나고, 뒤로 물러서서, 상대방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함께 춤을 춰 영광이었다는 뜻을 담아서. 하지만 놓고 싶지 않았다. 이제 에델라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서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테라비스는 잡고 있던 에델라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테라비스?”

그가 손을 놓지 않자, 에델라는 혹시 까먹은 것인가 싶어서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다른 커플들은 모두 상대방에게서 몸을 떼어낸 뒤였다. 아직 바싹 붙어 있는 것은 테라비스와 에델라뿐이었다.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는 에델라와는 달리 테라비스의 눈은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놓고 싶지 않았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춤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다.

“……테라비스.”

음악이 거의 끝나고, 거의 바이올린 선율만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에델라는 다시 작게 테라비스의 이름을 불렀다. 에델라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서야, 마침내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테라비스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에델라 역시 그를 향해서 무릎을 굽혔다.

“꼭 한편의 무용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어느새 포웨이스 남작이 그들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도 춤을 춘 것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마지막에는 마치 헤어지기 싫은 연인을 표현한 것 같더군요.”

“그렇게 티가 나던가요?”

테라비스는 여유롭게 미소를 띠며 포웨이스 남작의 말을 받았지만, 에델라는 그렇지 못했다. ‘헤어지기 싫은 연인’이라는 남작의 말에 춤을 추고 있었던 때보다 더 발갛게 볼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아직 신혼이니 당연하시겠죠. 듣기로는 두 분이 아주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의 말에 테라비스가 한술 더 떠서, 에델라의 허리에 자신의 손을 둘렀다. 조금이라도 더 달라붙고 싶은 신혼부부처럼.

“이리 사이가 좋으시니, 곧 좋은 소식이 있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게 두 살배기 늦둥이가 하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네. 꼭 기억해두겠습니다.”

포웨이스 남작은 슬쩍 미래의 사돈 자리까지 내다보며 말했다. 포웨이스 가를 이어야 할 장남이라면 그렇게까지 말하지 못했겠지만, 셋째 정도야 괜찮았다. 게다가 아직 바넬레오 가에서 애가 태어나지 않았고, 성별도 모르는 상태이니 그저 농담처럼 은근하게 말하기에 딱 좋았다. 다만, 그 농담에 옆에 서 있던 에델라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좋은 소식을 위해서 차근차근 테라비스와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에델라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화제였다.

“저는 잠시 화장을 좀 고치고 올게요. 말씀들 나누고 계세요.”

에델라는 미소와 함께 두 남자의 곁을 떠났다. 테라비스가 원했던 것은 다 해준 뒤였다. 무도회에 함께 참석했고, 그가 비즈니스 이야기를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애티튜드를 잡아주었다. 에델라가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히. * * * 패트리샤는 분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죠?”

저 부인이 말하는 잘 어울리는 한 쌍 중의 한 명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예로니아 백작 영애가 정말 예쁘더라고요. 옷이 날개라는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어요.”

예쁘다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그건 그 바넬레오도 마찬가지죠. 솔직히 말해서, 그가 부둣가에서 웃통을 벗고 짐을 나르고 있을 때가 제일 멋지다는 소리가 그냥 나왔겠어요.”

저들이 말하는 바넬레오가 자신의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눈길 한번 줬을 뿐이고, 남자의 신분이 자신과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눈길마저도 스스로 거둔 것이었지만, 패트리샤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을 저 얌체 같은 에델라가 훔쳐 갔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쁜 계집애. 끝까지 내 앞길을 막아?’

애초부터 패트리샤는 에델라를 싫어했었다. 동갑이었던 패트리샤는 태어날 때부터 에델라와 비교를 당해야 했다. 에델라보다 낮은 신분에, 에델라보다 예쁘지 않은 얼굴에, 에델라보다 착하지도 않다면서. 예로니아 가문이 망해버렸을 때는 고소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너랑 같은 나이인 에델라를 좀 본받으렴.’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예로니아 가문이 망하고 나서도 패트리샤는 에델라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야만 했다.

‘불쌍한 에델라가 예쁘기는 참 예쁘죠?’

‘빚쟁이라도 원래 가진 미모를 어디 팔아버릴 수는 없죠.’

‘루젠타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인데, 가엾게도.’

전부 다 듣기 싫었다. 불쌍하고 어여쁜 에델라 이야기는 지긋지긋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예로니아 백작 영애라고 부르면 안 되겠네요. 바넬레오 부인이라고 불러야겠죠?”

“그럼요. 이제 ‘루젠타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불쌍한 에델라’도 아니잖아요.”

“타이틀을 바꿔야겠네요. 루젠타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다음은 뭐가 좋을까요?”

“‘그 아름다움을 돈에 판 에델라’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부인 둘은 고개를 돌려 패트리샤를 쳐다보았다. 화장을 고치고 있던, 아니 고치는 척을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패트리샤는 고개를 돌려 그녀들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에델라는 여기에 없었고, 저들이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에델라가 아니라 패트리샤였다. 그 사실이 패트리샤는 더없이 즐거웠다.

“같은 귀족으로 정말 부끄러운 일 아닌가요? 저는 정말이지 얼굴이 화끈거렸답니다.”

패트리샤는 과장되게 고개를 흔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끝까지 체면을 지켰어야지, 평민과 결혼을 하다니요? 거기다가 그 상대가 루젠타의 벼락부자인 테라비스 바넬레오잖아요. 저급한 취향에 예의 없기로 소문난.”

패트리샤에게 테라비스는 자신이 호감을 보였던 상대라는 사실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먹지 못한 포도는 신 포도일 뿐이었다.

“가진 게 그것밖에 없는 평민 남자와 결혼한 이유가 뭐겠어요? 돈이죠, 돈. 그 반반한 얼굴을 내세워서 돈에 제 몸을 판 거죠.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다니! 정말 같은 귀족 영애라는 사실이 부끄럽네요.”

패트리샤의 단어 선택은 가차 없었다. 이제껏 억눌려 있었던 그녀의 콤플렉스가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었다.

“…….”

그리고 파우더룸의 문밖에서 에델라는 그 말에 짓밟히고 있었다. 패트리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에델라를 후려쳤다. 수치스럽다는 단어가 에델라의 뺨을 때리고, 뻔뻔하다는 말이 그녀의 머리를 치고, 몸을 판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에델라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차라리 도망가고 싶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의 비난을 듣느니,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에델라의 다리는 바보같이 도망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굳은 듯 서 있었다. 손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모양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바로 문을 열지 못한 까닭은 문틈으로 제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신이 들어가면 그들이 무안할까 봐 잠시 기다리려고 했던 에델라의 배려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게 했다.

‘괜찮아.’

에델라는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저들이 하는 말이 다 사실이잖아. 다 각오했던 말들이잖아.’

최악의 형태로.

‘상관없어. 얼굴도 모르는 저 사람들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훨씬 더 중요하니까.’

에델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움직이자, 지독한 가위에서 드디어 풀려나려는 것처럼 손이 조금씩 움직여졌다. 에델라는 문의 손잡이에 달라붙은 듯 꼼짝을 않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여전히 손이 떨리고 또 다리가 떨려왔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한숨과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은 입을 앙다물고 에델라는 간신히 뒤를 돌았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에델라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하아…….”

모든 소리가 잦아들자, 비로소 에델라는 옆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대고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자, 드레스의 아래로 테라비스가 선물한 새 구두가 보였다. 에델라는 문득 자신의 처지가 꼭 저 구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예쁘고 갖고 싶지만, 막상 신으면 불편하고 아픈 새 구두. 아니, 어쩌면 에델라는 구두가 아니라 새 구두에 갇힌 발인지도 몰랐다. 새 구두를 신은 예쁜 겉모습만 사람들은 보았다. 안에서 멍들고 껍질이 까져 상처받은 발은 아무도 보지 않았다. 자신이 무심코 그 발을 밟았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톡-. 작은 물방울 하나가 에델라의 구두 위로 떨어졌다.

“에델라?”

그 순간이었다. 마치 에델라의 눈물이 불러낸 것처럼 에델라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다정하게 에델라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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