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완벽한 한 쌍2021.09.10.
로즈는 아주 잠깐 혼란스러웠다. 앞에 한 말은 분명히 자신이 여자라고 얕잡아 보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뒷말이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로즈는 다시 물었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거나, 마틴이 변명처럼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인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에몬테 님이 너무 멋있어서, 반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말은 더욱 로즈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네?”
되물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생뚱맞아서 로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은 상단의 휴게실이었고, 업무시간이었다. 마틴이 들고 있는 것은 꽃다발과 반지가 아니라 빨간색 컵과 목발이었다. 거기다가 상대는 고용된 상단의 부단장이었고, 몇 번 본 적도 없었으며, 결벽증인지라 손 한번 잡은 적 없었고, 자신을 향해서 웃는 것도 한번 못 본 남자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반했다고 말하는 마틴의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을 고백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수줍어하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떨려 하는 모습도 전혀 없었다. 그것보다는 적국에 포로 협상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차갑고 단호한 얼굴이었다.
“앞으로 저는, 로즈 에몬테 님을 짝사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 짝사랑을 선언하는 그 순간에도 마틴의 얼굴은 그랬다.
* * *
“어머나!”
“세상에!”
“오호~.”
에델라와 테라비스가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남성도 여성도 있었고, 젊은 목소리와 중후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힐끗거리는 시선과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은 덤처럼 딸려오는 것이었다.
“나, 이상해?”
에델라는 입을 살짝 가리며, 옆에 선 테라비스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전혀.”
테라비스 역시 복화술처럼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에델라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 내가 이상한가?”
“아니.”
그리고 거의 똑같은 질문을 이번에는 테라비스가 하고 에델라가 대답했다. 둘이 서로에게 그 질문을 한 이유는 오늘 자신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라서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에델라는 포웨이스 남작에게 초대를 받자마자, 테라비스와 쇼핑을 했던 그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그레인이 골라주었던 장갑과 머리 장식을 착용했다. 장신구는 결혼식 때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착용했는데, 아무리 테라비스라도 보석만큼은 에델라에게 선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비싼 것은 에델라가 죽어도 거절했을 테니까. 신발은 테라비스가 에델라 몰래 샀던 바로 그 구두였다. 거의 따로따로 구매한 것들이었지만, 마치 처음부터 한 세트였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
테라비스는 작은 목소리로 에델라를 칭찬했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오늘의 에델라는 결혼식 때만큼이나 예뻤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예쁠 수도 있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거나, 억지 미소를 지었던 그때와는 달리, 오늘의 에델라는 수줍은 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차이는 아주 컸다. 그래서 문제는 에델라가 아니라 자신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귀족들이 자신의 옷이 비싼 것이 아니라고, 루젠타의 갑부라는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제일 비싼 것으로 샀어야 했어. 아니면 어제 연락이 왔던 푸른 도마뱀 가죽 재킷을 구매해서 입을 걸 그랬어.’
테라비스는 속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평소의 자기 모습이 아닌지라 스스로 어색하고 이상하게 여겨져서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틀린 생각이었다.
“세상에나~. 원래 예쁘게 생긴 건 알았지만, 저렇게 입혀놓으니 정말 미모가 출중하네요. 지금 저 모습을 보고 누가 ‘불쌍한 에델라’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게요. 지금 모습만 보면 그냥 곱게 자란 공주님이라고 해도 믿겠는걸요? 게다가 남자 쪽도 몰라볼 정도이지 않나요?”
“맞아요, 맞아! 늘 서커스단 광대 같은 옷만 입고 다니더니, 저렇게 정상적으로 입으니 인물이 확 사네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렇게 입었을까요? 이제 정신을 차린 걸까요?”
“어휴. 당연히 내조죠. 결혼하고 나서 저렇게 바뀐 거잖아요?”
“어머. 그러네요. 결혼할 때는 참으로 생뚱맞고 이상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두 명의 귀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테라비스와 에델라를 보며 속닥거렸다. 그녀들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말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패트리샤? 저 사람 말이야, 원래 저렇게 생겼던가?”
“지난번에 내가 그랬잖아. 얼굴과 몸이 근사하다고. 그때 네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
“내가 뭐라고 했는데?”
“평민 남자 따위에게 눈길도 주지 말라고 했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말이야.”
패트리샤는 자기가 놓친 남자가 못내 아까워 테라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의 말대로 평민이긴 했지만,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으며, 몸까지 근사한 사내였다. 친구의 충고를 무시하고 그에게 자신이 먼저 다가갔다면, 저 옆에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에델라가 아니라.
“미치겠군. 왜 저렇게 쑥덕대는 거야?”
보통은 시선을 즐기는 테라비스였다. 해괴한 옷을 입어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다 자신이 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서 쳐다보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흐뭇해하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심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시선들이 달라붙었고, 아예 대놓고 쑥덕거리는 사람들까지 많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려 귀를 쫑긋 세워도, 테라비스와 에델라가 다가가면 입을 딱 다물고 시치미를 떼는 통에 이야기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진정해.”
상황이 갑갑한 듯, 손을 넥타이에 올리려는 테라비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에델라는 그를 다독였다.
“먼저, 포웨이스 남작을 찾아야겠어.”
“왜?”
“그가 우리를 초대해준 사람이잖아. 먼저 인사를 해서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려야지.”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는데?”
테라비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당황해하며 되레 그에게 물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게 초대받은 사람의 예의였다. 지난 20년간 루젠타의 예의범절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다거나, 포웨이스 남작이 새로운 종교나 귀화를 하지 않았다면 그랬다.
“난 보통 제일 먼저 샴페인을 마셨지.”
“뭐? 왜?”
“마시고 싶으니까. 그리고 왠지 잔을 하나 들고 있는 게 멋있잖아?”
다행히 루젠타의 예의범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에델라의 남편이 무법자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안 하던데?”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비록 귀족들과 사교모임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에델라는 그들의 습성을 알았다. 그들이 예의를 갖추지 못한 테라비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너그러워서가 아니었다. 진정 너그러운 사람이라면 테라비스가 무안하지 않을 점잖은 말투로 예의를 알려주는 것이 맞았다. 그들은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먼저 술을 마시고 있는 테라비스를 뒤에서 비웃고, 역시 배우지 못한 평민은 어쩔 수 없다며,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무식한 작자라며 험담했다. 그건 변하지 않은 루젠타 사교계의 고고한 전통이었다.
“포웨이스 남작은 어디에 있어?”
아주 어릴 때 봤던 터라,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물음에 주변에서 포웨이스 남작을 찾았다.
“아, 저기 있군.”
“저쪽으로 가자.”
노신사와 함께 웃으며 이야기 중인 포웨이스 남작을 테라비스가 눈으로 가리키자, 에델라는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포웨이스 남작님,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 이게 누군가! 우리 루젠타의 큰손 아니신가!”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포웨이스 남작님의 명성에 비하면 제 이름은 보잘것없지요.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 에델라입니다.”
“어릴 때 뵙고 처음인 것 같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저택에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에델라와 테라비스가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포웨이스 남작은 웃으며 그들을 환대했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초대한 바넬레오 내외였다. 어쩌면 평민과 어울린다는 조롱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어쩌면 미래의 거물과 미리 줄을 댈 수 있는 기회였다. 극단적인 결과를 두고 당연히 포웨이스 남작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실리주의자였던 그는 기회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 포웨이스 남작은 자신의 선택에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돈이 많긴 했지만, 그야말로 돈만 많았던 졸부 테라비스 바넬레오가 사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자신의 무도회에 온 데다가, 제법 예의를 갖추고 인사까지 건네고 있었다. 오늘의 무도회를 눈부신 미모로 환하게 밝혀주고 있는 그의 아내가 테라비스를 이렇게 만든 것 같았다. 그렇게밖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 변한 테라비스였으니 말이다. 그의 말은 반쯤 맞았다. 에델라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테라비스가 자신이 이제껏 거래처들을 상대해오며 익힌 것이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주고, 함께하는 시간이 참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말해서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은 테라비스의 특기였다. 다만, 이제껏 테라비스를 그저 평민 출신의 장사치라고 얕잡아보는 통에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아,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는군요.”
“저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아주 아름답죠.”
포웨이스 남작은 테라비스의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지금 나오고 있는 곡은 그리 유명한 곡은 아니었지만, 바이올린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명곡이라고 칭송받는 곡이었다. 그저 한낱 장사치 나부랭이라고만 여겼었는데, 음악에도 조예가 있단 말인가?
‘이 정도 박자면 에델라와 춤을 추기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테라비스에게는 그런 조예가 없었다. 그저 대충 맞장구를 친 것뿐이었다. 아는 악기라곤 바이올린밖에 없었고, 언뜻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다. 대충 친 맞장구마저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이 테라비스의 운수 좋은 날인듯했다.
“부인, 어떠세요? 남작님께서 좋아하는 곡에 맞추어 한 곡 추시겠습니까?”
테라비스는 정중히 에델라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어젯밤, 에델라에게 배운 그대로였다. 그리고 반듯한 그의 춤 신청을 보며, 포웨이스 남작은 또 한 번 놀랐다. 예의가 뭔지도 모르는 졸부 테라비스가 언제 이렇게 신사가 되었단 말인가?
“네, 그럴까요?”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남작님.”
“물론입니다. 무도회이니 당연하죠.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포웨이스 남작은 웃으며 한발 뒤로 물러나 주었다. 그는 바넬레오 부부를 이번 무도회에 초대한 과거의 자신에게 키스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넬레오 부부가 미래의 루젠타에서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눈에는 보였다. 처음에는 미천한 졸부와 가난뱅이 영애의 절름발이 결혼이라며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저 둘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