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무슨 여자가 (37/92)

37화. 무슨 여자가2021.09.06.

달빛 아래에서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춤을 추었다.

“잘하는데?”

“그래?”

칭찬은 테라비스를 춤추게 했다. 비유법이 아니라, 진짜 그는 춤을 췄다. 에델라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작은 손이 이끄는 대로 춤을 췄다. 음악 대신 풀벌레 소리에 맞춰 추는 춤은 까닭 없이 즐거워 계속 웃음이 나왔다.

  * * *

“좋은 아침.”

그렇게 말한 입과는 달리 테라비스의 낯빛은 전혀 좋지 않았다. 얼굴은 푸석했고, 눈 아래는 거뭇거뭇했으며, 졸음이 그의 얼굴 전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먼저 출근해서 앉아 있던 직원이 그 말을 했을 때, 테라비스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부인과 뭘 좀 하느라.”

테라비스의 말에 앉아 있던 직원들의 눈이 커지더니, 순식간에 자기들만의 눈짓 교환이 어지러이 이루어졌다.

“뭘 하셨는데요?”

냉큼 물은 것은 붉은바람 상단의 직원 중에서도 제일 호기심이 많은 직원이었다. 그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테라비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이 뭘 좀 할 게 있어서.”

한밤중에 정원에서 춤을 췄다고 말하기는 뭔가 멋쩍어서 테라비스는 그냥 그렇게 어물쩍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생처음 배운 춤은 재밌었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췄었다. 한두 번쯤은 에델라의 발을 밟았고, 두어 번쯤은 넘어질 뻔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두 사람이 생각한 것은 그 재미가 덜해져서도 아니었고, 힘들어서도 아니었다. 아직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수탉이 꼬끼오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거의 밤새도록 춤을 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눈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또 까르르 웃고 말았다. 그제야 둘은 침실로 들어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하암~.”

마지막까지 하품을 남겨두고, 테라비스는 단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나! 신혼의 힘이란!”

정적을 가르고 손뼉을 친 것은 결혼 6년 차의 유부남이었다. 그의 행동을 보며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한마음으로 테라비스의 상황을 오해하고 있었다.

‘저러니 사모님이 무서워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그건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부단장실에 콕 박혀 있는 마틴이었지만, 오늘은 며칠 뒤 안다비아에서 올 거래처의 접대를 위해 다른 직원들과의 회의를 위해서 그도 밖에 나와 있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테라비스는 건장한 편이었다. 아니, 심하게 건장한 편이었다. 큰 키에, 굵은 뼈대를 보면 타고나기를 이미 체격이 좋았고, 취미가 선적하는 물건을 나르는 것이다 보니 후천적으로도 건장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 체격에 걸맞은 힘과 체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 부럽다! 나도 장가가고 싶다! 사모님같이 예쁜 부인이랑, 예쁜 부인을 닮은 귀여운 애가 있으면 소원이 없겠네!”

“네가 아직 유부남이 안 되어 봐서 모르나 본데, 모든 부인이 예쁜 것은 아니란다.”

“암~. 거기다가 모든 애가 다 귀여운 것도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애는 건드리지 맙시다!”

한숨 섞인 투정을 부린 것은 붉은바람 상단의 막내였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다들 결혼에 대해서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회의는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한마디를 하려던 마틴은 저쪽 자리에 앉은 로즈가 킥킥거리며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을 보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보통 상단 회의에는 호위무사들이 참여하지 않지만, 안다비아에서 오는 일행들의 동선과 호위를 의논하기 위해서 그들도 참석한 터였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와서 다시 주제로 돌아와야겠군.’

마틴은 사람들이 떠들게 내버려 두고, 옆에 세워놓았던 목발을 집어 들었다. 업무시간 중에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당연히 싫어하는 마틴이었지만, 너무 엄격하게만 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저렇게 약간의 쉬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것이 윤활유가 되어서 회의 진행이 더 빨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 드시려는 거죠?”

주전자를 집으려는 마틴의 옆에서 손이 쑥 나와 주전자의 손잡이를 집었다. 고개를 돌리자 생긋 웃는 로즈가 보였다.

“네. 맞습니다.”

“저도요.”

로즈는 옆이 있는 컵을 하나 꺼내 물을 따랐다.

“저기 빨간 컵이 부단장님 컵 맞죠?”

그녀는 선반의 가장 위 칸에 1개만 덜렁 놓인 빨간 컵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분들한테 들었어요. 저건 부단장님 전용 컵이니까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요. 근데 높아서 저는 건드리려야 건드릴 수도 없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로즈가 까치발을 들어야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여자치고는 큰 키의 로즈였지만, 보통의 남자도 힘들 높이이니 당연했다. 저 위쪽에 쉽게 손이 닿을 사람은 테라비스와 마틴 정도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에 마틴이 그곳에 자신의 컵을 놓아둔 것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건드릴 수 없게.

“꺼내주시면 물 따라 드릴게요. 목발 때문에 불편하시잖아요.”

마틴이 뭐라고 거절하지 못하게 로즈는 웃으며 그가 체중을 싣고 있는 목발을 가리켰다. 한쪽 손과 체중을 목발에 의지한 채 물을 따르려면 불편하긴 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틴은 손을 뻗어 자신의 빨간색 컵을 꺼냈다. 로즈는 웃으며 그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혹시, 단장님께서 호위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던가요?”

“어떤 거요? 사모님 호위? 아니면 이번 안다비아 사람들 호위요?”

“아뇨. 에몬테 님의 호위요.”

“아! 그거요! 아하하핫!”

로즈는 갑자기 누군가가 웃음 버튼을 누른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그거 진짜 웃기죠?”

“네?”

“호위에게 호위를 붙여주는 호의를 보여주시겠다니, 정말 그럴싸한 말장난이지 않나요? 단장님도 가끔 보면 농담을 잘하신다니까요.”

로즈는 웃으며 자신의 잔에 있던 물을 마저 마셨다. 그리고 그날 진지한 얼굴로 그 농담을 하던 테라비스를 떠올리며 다시 웃었다.

“농담 아닐 텐데요.”

“네?”

“그거 진짜인데요.”

“진짜라고요?”

“네.”

“제 직업이 뭔지는 아시죠?”

“용병이시죠. 현재는 붉은바람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무사 일을 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호위무사에게 호위를 붙인다는 게 진짜라고요?”

“네.”

단호한 표정의 마틴을 보며 로즈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혹시, 그 제안을 한 게 부단장님이신가요?”

마틴이 너무도 확고하게 말하자, 로즈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똑똑한 부단장이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네. 맞습니다. 이전의 그 강도가 목격자를 노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 강도를 쫓아낸 사람이 전데요?”

“그건 저도 압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저고요.”

“그것도 압니다.”

“그런데 왜 제가 호위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야 위험하니까…….”

“그러니까 그 위험한 일이 제 직업이라고요.”

쳇바퀴가 도는 것 같은 문답을 로즈는 그만 멈추고 싶었다.

“호위에게 호위가 필요하면, 그 호위를 호위할 호위도 필요하고, 그럼 그 호위를 호위하는 호위를 호위할 호위도 필요하겠죠. 그렇게 하다 보면 끝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로즈의 말이 맞았다. 마틴은 비로소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야 말이다.

“그렇군요.”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저 로즈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테라비스가 에델라만 보호하려 들고, 로즈는 내버려 둔다는 생각만을 했다. 한 가지밖에 생각하지 못한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마틴이 순순히 인정하자, 로즈는 생긋 웃었다. 무뚝뚝하고, 남에게 철벽을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

“에몬테 님께서는 왜 그런 직업을 택하신 겁니까?”

“당연히 돈 벌려고죠.”

“다른 직업도 많지 않습니까.”

“이게 돈을 많이 주더라고요.”

“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하기에는 위험하지 않습니까?”

마틴이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참으로 충동적이었다. 그는 로즈가 위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안전했으면 했다. 그래서 불쑥 그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마틴의 인생에서 몇 없는 그 충동적인 말이 튀어나온 순간, 분위기는 싸하게 가라앉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로즈가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부단장님.”

눈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에 마틴은 움찔했다.

“더러운 것, 싫어하시죠?”

“……그렇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싫어해요.”

로즈는 들고 있던 컵을 옆에 내려놓았다. 순간, 마틴은 로즈가 검을 뽑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지금의 로즈는 싸늘했고, 그에게 적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어디서 여자가. 여자 주제에. 감히 여자가.”

로즈는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단어에서 묻어나오는 서슬 퍼런 기운이 로즈가 그 말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했다.

“제가 부단장님의 취향을 존중해드리듯, 부단장님도 제 취향을 존중해주셨으면 해요.”

마지막 말을 끝낸 로즈에게서는 아까와 같은 싸늘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마틴이 자신을 무시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도, 또 이렇게 확실하게 말하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아요. 실수로 닿아버린 거잖아요. 서로 존중해주자고요. 돈 터치, 노 터치.”

로즈는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웃었다. 언제 자신이 싸늘했냐는 듯이 따뜻하고 환한 웃음이었다. 자신에게 무례했던 마틴을 기꺼이 용서한다는 의미와 그녀의 너른 포용력에 무안해할 마틴에 대한 배려마저 엿보이는 웃음이기도 했다.

“부단장님, 회의 마저 끝내죠.”

로즈는 아직 물이 남은 잔을 들고 먼저 뒤를 돌았다. 이제는 신혼이란 과연 결혼 후 몇 년까지인가를 주제로 토론하는 직원들에게 돌아갈 참이었다.

“무슨 여자가…….”

마틴이 자신의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로즈의 인상이 바로 찌푸려졌다. 분명 조금 전에 자신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보란 듯이 그 말을 하는 건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당연히 로즈는 참지 않았다.

“부단장님!”

그녀는 버럭 화를 내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뒤를 돈 순간, 로즈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봤거나,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마틴이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을 쳐다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못 심각하기까지 했다. 결코, 남의 험담을 하거나, 하지 말라는 짓을 들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로즈가 뒤돌기를 기다린 사람처럼 보였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멋있습니까?”

이 말을 하기 위해서.

1655992960390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