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분홍빛2021.09.03.
“어깨를 펴고, 이쪽 손은 내 허리를 가볍게 잡아 봐.”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리에 얹었다. 얇은 잠옷 너머로 뜨뜻한 테라비스의 체온이 느껴져서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에델라는 이내 그의 다른 손을 잡았다.
“가볍게 펼친다는 느낌으로 손을 뻗어. 허리는 곧게 펴고.”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손을 잡은 채, 팔을 뻗자 그의 팔도 에델라를 따라서 옆으로 뻗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있어 봐.”
잠시 손을 놓고, 에델라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조금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기본자세를 처음 잡은 것치고 테라비스의 자세는 나쁘지 않았다. 큰 키와 뭘 해도 그럴듯해 보이는 좋은 몸 덕분인 것 같았다. 어쩌면 얼굴도.
“좋아.”
에델라는 다시 앞으로 다가가 테라비스의 손을 붙잡고, 다른 한 손은 그의 팔 위에 얹었다.
“보통은 남자가 리드하지만, 내가 리드할게. 부드럽게 나를 따라온다는 느낌으로 움직여 봐.”
“이렇게 바로 시작한다고?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천천히 할게.”
속으로 느리게 박자를 세며 에델라는 옆으로 발을 옮겼다. 에델라의 발보다 조금 느리게 테라비스의 발이 옆으로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둘, 둘, 셋. 에델라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던 기억을 더듬어 스텝을 밟아 나갔다.
“괜찮은데?”
“그래?”
빈말이 아니라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잘 쫓아오고 있었다. 물론 손을 쥔 자세가 서툴렀고, 에델라의 진행 방향을 보느라 눈을 쉴 틈 없이 힐끗거렸으며, 발은 아름답게 뻗지 못하고 주춤거렸지만, 처음치고는 썩 괜찮았다. 조금만 연습하면 느린 곡 하나 정도는 무난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여기서 턴을…….”
넓은 침실이었지만, 춤을 추기에는 좁았다. 앞에 침대가 버티고 서 있자, 방향을 바꿀 겸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 턴을 가르치려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에델라가 몸을 옮기려는 쪽에는 장식용 선반이 있었다.
“조심해!”
에델라의 손등이 막 선반을 치려는 찰나, 테라비스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에델라의 몸이 옆으로 빙글 돌아가며, 그대로 테라비스의 품으로 안겼다. 그리고 에델라를 품에 안은 테라비스는 무언가에 다리가 걸려 몸이 뒤로 넘어갔다. 테라비스의 품에 안긴 에델라도, 에델라를 품에 안은 테라비스도, 제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먼저 눈을 뜬 쪽은 테라비스였다. 그리고 자주 보는 익숙한 천정이 보이자, 자신의 다리에 걸린 것이 침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맨바닥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침대여서 다행이었다. 복숭아뼈가 침대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좀 욱신거리긴 했지만, 다른 곳은 아프지 않았다.
“응. 괜찮아.”
놀라서 눈을 감았던 에델라도 테라비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살짝 코가 얼얼하긴 했지만, 에델라도 다른 곳은 아프지 않았다. 다만, 당황스러웠다. 눈을 뜬 에델라는 자신이 테라비스의 몸을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한쪽 손은 테라비스의 손에 붙들려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테라비스의 가슴에 얹어져 있었다. 에델라의 배는 테라비스의 배와 착 달라붙어 있었고, 다리는 테라비스의 다리와 뒤엉켜 있었다. 자신의 코가 아픈 것도 테라비스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자,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에델라.”
제 몸 아래에서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델라는 더욱 굳어버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혹은 위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오자 제가 테라비스를 덮치듯 위에 올라타 있다는 것이 더욱 확연하게 느껴져서였다.
“그, 그게…….”
자기도 모르게 에델라는 변명의 말을 준비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둘 다 잘 알고 있는데도.
‘귀가 또…….’
분홍빛으로 곱게 물든 에델라의 귀를 보며, 테라비스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핥을까?’
혀를 내밀어 핥으면 달 것 같았다.
‘깨물까?’
까드득 깨문대도 마찬가지였다. 혀가 아릴 듯이 단맛이 날 것 같았다. 테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열었다. 금빛의 머리카락이 제 시야에서 하늘하늘 움직였다.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잔망스러운 몸짓이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뺨과 이리저리 움직이는 파란 눈동자를 보며 테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숨을 쉬는 순간, 무언가가 다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먹을까?’
분홍빛의 귀가 또 눈앞에 아른거렸다. 와그작 깨물면 과즙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그것이 테라비스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는 뺨과 말랑한 귓불을 제 커다란 손에 담았다.
“테라비스?”
에델라의 목소리가, 에델라의 숨결이, 테라비스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아니, 손바닥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손을 타고 내려와 그의 목구멍을 간질이고, 가슴을 간질이고, 뱃속 깊은 곳까지 간질였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웠다.
“테라비스?”
대답이 없자, 에델라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뭐에 홀린 것처럼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테라비스를. 이전에도 그가 한번 이런 적이 있었다는 것을 에델라는 기억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에서였다. 그때도 테라비스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을 빤히 쳐다보다가, 에델라의 뺨을 감싸 쥐었었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목이 마른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 천천히 자신을 향해서 다가왔었다. 꿀꺽. 뭔지 모를 긴장감에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다음은 뭔지 모를 커다란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럭 겁이 난 에델라는 넘어질 때와 똑같이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그리고 다행히, 혹은 불행히, 자신을 홀리고 있던 파란 눈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테라비스는 정신을 차렸다. 아직 아니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와 에델라의 사이에는 분명한 계약이 있었고,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은 명백한 계약위반이었다.
“에델라.”
그가 에델라의 이름을 부르자, 찌푸린 에델라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겁을 먹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고집은 센 주제에, 겁은 많은, 바보 같을 정도로 성실하고, 약속을 지키는 여자. 그러니, 테라비스도 약속을 지켜야 했다.
“……무거워.”
테라비스의 말에 감겨 있던 에델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뭐?”
“무겁다고.”
담담히 말하는 테라비스의 얼굴에서는 아까의 그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목이 말라 보이는 것 같은 것도, 뭔가 애달픈 것 같은 느낌도, 무언가가 커다란 것이 다가올 것 같은 느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거우니 빨리 내려가라는 눈빛을 발사하고 있는 자신의 계약 남편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 미안.”
에델라는 사과의 말을 전하며 얼른 옆으로 내려왔다.
“괜찮아.”
그녀가 비켜주자, 테라비스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지금 테라비스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으로 뒤엉켜 있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겠어. 춤을 추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아서 위험해.”
“그런가?”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제법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얼굴의 홍조도 가라앉지 않았지만, 목소리만은 침착한 것처럼 들려서 다행이었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
“홀은 사용한 적이 없어서 먼지가 폴폴 날리고 있을걸?”
“그럼 복도는?”
“복도도 이것저것 뭐가 많아서.”
비싸다는 것들을 왕창 끌어모아 복도에 전시해둔 터라, 춤을 출 정도의 공간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음…….”
“춤, 꼭 춰야 하나?”
에델라가 고민에 빠진 것을 보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이제껏 무도회라는 곳에 참석을 많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춤을 춘 적이 없는 그였다. 그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몰랐고, 지금은 알았지만, 그가 알았다는 것을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이제까지처럼 춤을 추지 않고,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적인 친교만을 쌓고 온다고 그를 욕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뒤에서 욕할 수야 있겠지만, 안 들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테라비스였다.
“그건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하지만 에델라는 테라비스와 달랐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예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귀족 영애기도 했다. 무도회에 초대된 이상, 춤은 반드시 춰야 했다.
“밖은 어때?”
“밖?”
“정원 말이야.”
에델라는 손가락으로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이미 해가 진 뒤인지라 밖은 깜깜했다.
“저렇게 어두운데?”
“오늘은 달이 밝은 편이잖아. 게다가 별빛도 있고.”
“그래도 어두울 텐데?”
“눈이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기름이 떨어져서 불을 못 켜도, 이런 환한 달이 있는 날에는 제법 앞이 잘 보였거든.”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또 잠시 망설였다. 불을 켠 환한 방에서도 에델라의 발을 밟을 뻔한 자신이었다. 저렇게 어두운 밖에서는 확실하게 에델라의 발을 밟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밖에서는 푹신한 침대도 없는데, 딱딱한 바닥에 에델라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다칠 것 역시 뻔했다. 아직 강도에게 당한 손도 다 낫지 않았는데, 더는 에델라가 다치는 꼴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달밤에 정원에서 잠옷을 입고 춤을 춘다고? 누가 보면 미친놈인 줄 알걸?”
“보긴 누가 봐? 이 저택이 얼마나 넓은데. 길에서는 정원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을걸?”
“이 집 안에는 사람이 없어?”
“고용인들은 이제 거의 잘 시간일걸?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일해야 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거든.”
“하지만…….”
에델라의 작은 발을 밟고 싶지 않았던 테라비스는 완강히 저항하려고 했다.
“설사 누가 본다고 해도 뭐 어때? 우리 집에서 우리가 춤을 춘다는데.”
에델라가 저 말을 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집?”
이상하게 그 단어가 테라비스의 귀에 꽂혔다.
“그래, 우리 집. 사유지를 함부로 염탐하는 사람이 나쁜 거잖아.”
에델라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운을 챙기고 있었다. 초여름이긴 하지만, 밤에는 아직 쌀쌀했다.
“우리 집이라고…….”
그리고 테라비스는 아직도 그 단어를 되뇌고 있었다. 특별한 것 없는 그 단어가 이상하게 입에 착착 감겼다. 에델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그 순간부터 그랬다. 분명 알던 단어이고, 의식한 적이 없는 단어인데, 괜히 기분이 좋아서 벌쭉 웃음이 나올 것만 같은 테라비스였다.
“그래. 우리 집인데! 우리 맘대로 하지 뭐!”
테라비스는 ‘우리 집’이라는 단어에 힘줘서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자! 우리 집 정원에!”
걸쳐놓은 가운을 챙겨입는 테라비스의 얼굴에는 창밖의 달만큼이나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