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루젠타 철벽남의 사연2021.08.30.
“뭐가 왜요야?”
“왜 에몬테 님께서는 호위가 필요 없을 거라고 단정하는 겁니까?”
“그야…….”
이걸 대답해야 하는 걸까? 테라비스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마틴이 평소에 농담을 잘하는 성격이었다면, 그가 농담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호위무사에게 호위가 필요하다니! 이 얼마나 재미난 농담인가? 하지만 마틴은 농담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 농담을 하면 싸늘하게 쳐다보는 부류였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에 유익한 일을 하라는 듯이.
“에몬테 님도 위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마틴은 진심이었다. 로즈도 분명히 목격자 중의 하나였고, 비에라 자작이 목격자를 없애려고 한다면, 로즈도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에델라에게 그랬듯, 로즈에게도 당연히 호위를 붙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몬테 님이 하는 일이 호위인데, 호위에게 호위를 붙이라는 말인가?”
“네. 필요하다면요.”
“그게 필요할까? 과연?”
“그건 모르는 일이죠. 똑같은 목격자라면 똑같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니, 에몬테 님에게도 저랑 똑같이 호위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물어봐야 공평한 것 아닙니까?”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상황과 대상을 잘 생각해서 들어보면 비논리적이었지만.
“좋아. 에몬테 님에게도 물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테라비스는 굳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마틴의 신경에 거슬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고, 로즈에게 물어본다고 나빠질 것은 없었다. 그저 로즈에게서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지?’ 하는 시선을 잠시 감당해내면 될 일이었다. 테라비스의 대답에 마틴은 그제야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비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지?’
그의 감각이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마틴이 원래 그렇게 다른 직원들을 신경을 썼나?’
아니었다. 마틴은 유능한 부단장이자, 붉은바람 상단에 꼭 필요한 인재였지만, 그게 탁월한 리더쉽이나 넓은 포용력과 배려심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주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혹시, 마틴?”
“네.”
묻고 싶었다. 정말이지 테라비스는 묻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혹시 로즈 에몬테 님에게 호감이 있는 건가? 하고. 하지만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얼마나 싸늘한 정적이 감돌 것인지 알고 있었고, 마틴이 비수와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꽁꽁 언 고드름 같은 목소리로 ‘무슨 헛소리십니까?’라고 말할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설사, 정말로 마틴이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한들 자신에게 말할 리가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말씀하시죠.”
무뚝뚝한 얼굴에 냉랭한 목소리로 마틴이 말했다.
“내일 저녁엔 에델라와 내가 함께 외출할 예정이야. 그때는 내가 있으니 호위는 없어도 돼.”
“네, 알겠습니다.”
테라비스는 다른 말로 그 자리를 모면했다. 다행히 마틴은 테라비스가 진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휴, 너도 고생이 많겠다.’
표정 없이 서류를 치우는 마틴을 보며 테라비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기가 어젯밤에 어쨌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그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테라비스는 말이 없었다. 에델라와 처음에 마주쳤을 때도 그랬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그랬다. 에델라가 말을 시키면 퉁명스럽게 짧은 대답만을 할 뿐, 자기가 먼저 무슨 말을 한다거나 살갑게 대답하지 않았다. 몇 번 그렇게 가시가 돋친 대답만 돌아오자, 에델라도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늦은 밤, 둘만의 포옹 시간까지 이어졌다.
“…….”
“…….”
둘은 거의 기계적으로 몸을 맞붙였다. 에델라는 첫날에 느꼈던 그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느낄 수 없었고, 테라비스는 어제 느꼈던 에델라 특유의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없었다. 그저 불편한 시간이었다.
“테라비스?”
“……응.”
불편함에 어깨를 살짝 비틀며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이름을 부르자, 여전히 불퉁한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아직도 화가 났어?”
에델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그녀의 말에 테라비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기가 언제 화를 냈냐고 말을 할뻔했다. 하지만 어젯밤부터 제가 해왔던 행적은 누가 보더라도 화난 사람이었다.
“그래. 아직 화가 났어.”
테라비스는 순순히 실토했다.
“왜 그런 중대한 사실을 말하지 않은 거지?”
“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
“아니, 결혼하려는 상대방이 이전에 파혼 경험이 있다는 것은 알릴 의무가 있는 사실 아닌가? 나는 이게 아주 중대한 계약위반이라고 생각해.”
“계약위반?”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당신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갑자기 계약위반 운운하는 테라비스 때문에 조금 마음이 상한 에델라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중요사항은 자진해서 말을 해줬어야지. 그게 상호 간의 신뢰 아니야?”
“어디까지가 중요사항인데?”
“결혼에 관련된 모든 것은 전부 중요사항이지.”
“그러니까, 당신 말은 내가 중요사항을 당신에게 미리 알리지 않아 서로 간의 신뢰가 깨졌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는 거야?”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말을 정리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 환한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저것이었다. 어제 자신이 화가 난 이유. 온종일 찜찜하고, 에델라의 얼굴을 보자 괜히 화가 나고, 포옹의 시간이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서 더욱 답답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그래. 맞아. 상도덕을 중요시하는 상인인 나로서는 당신이 중요 고지사항을 말해주지 않은 점이 매우 유감스러웠고, 상호 간의 신뢰가 무너진 것에 대해서 매우 안타깝고 화가 났어.”
테라비스는 이유를 몰랐던 자신의 화가 명쾌하게 정리되자 흐뭇해하며 말했다. 자기 생각이, 에델라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럼, 사과할게.”
에델라는 순순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짬짬이 테라비스가 어젯밤에 왜 그렇게 화를 낸 걸까를 고민했던 에델라였다. 그 원인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고지사항인지 나는 몰랐어.”
“나한테 말하지 않은 다른 것은 없어? 다른 약혼자가 또 있다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면 다른 약혼녀가 있다거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면, 테라비스 당신은 어때? 혹시 다른 여자가 있어?”
“아니. 나는 매우 아주 진심으로 깨끗해.”
“약혼이나, 결혼할뻔한 여성이라거나?”
“전혀.”
“사귀던 여성도?”
“없어.”
테라비스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부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돈 버느라 바빴거든.”
그건 사실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전부 일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갑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돈이 모이고, 상단이 커지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면서 유혹은 많았다. 하지만 테라비스에게는 이성의 유혹보다 돈의 유혹이 더욱 강렬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가 인기가 없었던 것은 절대 아니야. 다가오는 여성분들은 많았어. 몇 번 식사하거나, 살롱에 같이 간 적도 있긴 했어. 심지어 다짜고짜 자기 딸과 결혼하라는 거래처도 있었지.”
“그런데 왜 사귀지는 않았어?”
“돈 버느라 바빴다니까. 내 과거는 매우 결백하고, 순결해.”
자신의 깨끗한 과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은 테라비스의 표정을 보며, 에델라는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그가 좋아했던 여자나, 사귀었던 여자가 없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졌다. 너무 딱딱하다 여겨졌던 테라비스의 가슴이 부드럽게 느껴졌고, 에델라의 팔에 얹어져 무겁다고 생각했던 그의 팔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테라비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경직되어 있던 팔에 저절로 힘이 풀렸고, 곧추세우고 있던 허리가 저도 모르게 느슨하게 되었다. 잘 느껴지지 않았던 에델라의 향기도 그제야 조금씩 느껴졌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기분 좋은 향기.
“아, 맞다.”
테라비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에델라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떼어냈다.
“왜? 뭐 잊은 거라도 있어?”
“당신, 춤을 잘 못 춘다고 했잖아.”
에델라는 포웨이스 남작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 테라비스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지.”
“그런데 내일 무도회에 가서는 어떻게 할 건데?”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데?”
“춤을 안 춘다고?”
“그래.”
테라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은 이제까지 늘 그래왔으니까.
“보통은 주인과 인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인사하고, 술을 좀 마시다가, 돌아오지.”
“춤은 전혀 추지 않고?”
“못 춘다니까.”
“춤을 추자는 여자가 아무도 없었어?”
“있긴 했지만, 거절했지. 못 추니까.”
테라비스의 대답에 에델라는 그가 이제껏 연애를 전혀 안 해봤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남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에델라였지만, 그가 잘생겼다는 것은 알았다. 그의 몸이 근사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건 눈이 있으면 그냥 알게 되는 사실이었다. 잘생기고 몸 좋고 돈까지 많은 테라비스가 이제껏 연애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아니 못한 이유는 바로 저것이었다. 무도회에서 춤을 추자는 말이 어디 정말 춤만 추자는 말이었겠는가? 당연히 그쪽이 마음이 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춤을 못 춘다는 이유로 여성의 대시를 전부 거절한 것이었다. 심지어 바쁘다는 이유로 다른 제안들도 전부 거절했다고 본인 입으로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좁디좁은 루젠타의 사교계에서 테라비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굴값과 돈값을 하는 철벽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일은 내가 있는데, 춤을 안 출 수는 없잖아.”
“뭐? 왜?”
“파트너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했는데, 춤을 추지 않는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파트너에게도, 초대한 사람에게도.”
“그런 예의가 있어?”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테라비스는 당황스럽다는 듯이 에델라에게 물었고,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골치 아프네.”
그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가르쳐줄까?”
“뭘?”
“사교댄스.”
에델라의 제안에 테라비스는 몸을 뒤로 빼며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셔츠에 에델라의 머리카락이 정전기를 일으키며 몇 가닥이 달라붙었다. 마치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당신, 사교댄스를 출 줄 알아?”
“응.”
“무도회에 가봤어?”
“아니.”
몰락 귀족인 그녀가 무도회에 가봤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춤을 출 줄 안다는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배웠어.”
빚쟁이들은 예로니아 가의 재산은 가져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배움과 지식은 가져갈 수 없었다. 예로니아 백작 내외는 재산 대신 그것을 에델라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귀족으로서 마땅히 배워야 하는 사교댄스도 있었다.
“가르쳐줄까?”
에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에델라가 테라비스에게 춤을 청했다.“흐음……. 썩 내키진 않지만, 그러죠.” 새침한 표정으로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테라비스가 처음으로 여성의 춤 신청에 응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