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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그 남자, 좋아했어? (34/92)

34화. 그 남자, 좋아했어?2021.08.27.

  테라비스가 그 질문을 한 순간, 에델라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매일매일 샤를로부터의 답장만 기다렸던, 더는 샤를의 편지가 오지 않는 이유를 몰랐던, 샤를과의 약혼이 깨어져 버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에델라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그 해답을 이제는 알았다.

“우리 집이 망했으니까.”

조그만 입술이 속삭이듯이 대답을 내놓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사실이 단어가 되어 에델라의 입술에서 나온 순간, 진실은 더욱 선명한 빛을 띠었다. 샤를의 마지막 편지조차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작별의 인사도 한마디 하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날, 에델라는 다정한 샤를도 잃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델라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테라비스의 잠옷뿐이었다. 이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면 더욱 비참했을 것 같았다.

“나쁜 놈이네.”

툭. 험한 단어가 에델라의 정수리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사내놈이 되어서 말이야, 어? 고작 여자 집이 망했다고 바로 파혼해? 데려와서 책임지지는 못할망정. 에라이! 저도 콱! 망해버려라. 나쁜 놈!”

고작 한 단어로는 부족했다. 테라비스는 허공을 향해서 과거의 에델라 약혼자에게 욕을 해댔다. 얼마나 감정을 실은 욕이었던지, 에델라가 기대고 있는 테라비스의 가슴이 들썩들썩할 정도였다.

“자고로 그런 쪼잔한 새끼는 잘되는 법이 없어. 아마 틀림없이 망했을 거야.”

“……그 사람 잘못은 아니야.”

투덜거리는 테라비스의 말 뒤에 조용히 에델라가 덧붙였다.

“뭐?”

“아마 그 사람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그 사람도 어렸잖아. 고작 아홉 살이었는걸.”

테라비스는 황당했다. 지금 에델라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은 테라비스였다. 그런데 에델라는 집이 망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약혼자의 편을 들고 있었다. 순식간에 에델라 없는 에델라 편이 되어버린 테라비스는 당연히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전 약혼자도 약혼자라고 편드는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그 남자, 좋아했어?”

그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살아 있는 물고기가 좁은 어항을 참지 못하고 퍼덕거리며 그곳을 뛰쳐나오듯이, 테라비스의 깊은 곳에서 그 질문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고 말았다.

“…….”

그리고 에델라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것을 테라비스는 직감했다. 에델라는 그 약혼자를 좋아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어린 에델라는 그 약혼자를 좋아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뱃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테라비스의 안에서 끓어오르는 느낌.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갈지 몰라서 답답하고, 갑갑한 느낌.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벌컥 화라도 내어버리면 조금 시원할 것 같은 느낌.

“흐음.”

테라비스의 단단한 가슴이 위로 쑤욱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이어 테라비스의 양손이 에델라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제 몸을 뒤로 밀어냈다. 바싹 밀착되어 있던 두 사람의 몸이 뚝 떨어졌다.

“끝났어.”

무뚝뚝한 목소리로 테라비스가 말하자, 에델라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약혼 이야기를 할까 말까를 고민하느라, 시작 시각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에델라였다. 체감상 1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시작 시각을 모르니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하긴, 테라비스가 시간을 속일 리가 없지.’

에델라는 그저 자신이 생각이 많아, 시간이 빨리 간 것처럼 느껴진 것으로 치부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에델라가 고개를 돌렸을 때, 벌써 그녀의 앞은 텅 비어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좀 더 돌리자, 제 침대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누운 테라비스가 보였다.

‘아직 이야기를 다 못했는데…….’

그 약혼자가 바로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라는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테라비스가 오늘따라 피곤해서 일찍 자리에 누웠다고 생각해 에델라는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게다가 지금의 테라비스의 등은 어쩐지 냉랭해 보였다. 아무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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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좋아. 그럼 이렇게 제안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정리해서 오늘 중으로 내게 줘. 그럼 에델라에게 전달해주도록 하겠어.”

“네. 알겠습니다.”

“에델라에게는 언제까지 작성해달라고 해야 하지?”

“사흘 후 저희 상단으로 엔젤로테 측이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예정일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중간에 폭풍우가 치는 일도 없었으니 아마 일정에는 차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날까지 되어야 하는 건가?”

테라비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은 포웨이스 남작의 무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무도회는 저녁이긴 했지만, 적어도 오후 시간에는 그것을 준비하느라 에델라는 바쁠 터였다. 그렇다면 오늘 중으로 끝내던가, 내일 무도회를 다녀와서 피곤한 상태에서 에델라가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테라비스는 그렇게 에델라를 혹사하고 싶지 않았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종 제안서는 어디까지나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안다비아어로 작성하는 거고, 최종적으로 저희가 제시할 내용이니까요. 첫날에는 제국어로 된 우리 쪽 서류를 먼저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때도 보셨겠지만, 엔젤로테 상단 측에는 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 제국어로 된 서류라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럼 언제까지?”

“그쪽에서 검토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삼사일 정도는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럼 5일 안으로만 하면 되겠군?”

“혹시 모르니 빠르면 더 좋긴 하겠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존중의 의미이니, 만약 사모님께서 바쁘시다면 제국어로 된 제안서라도 무방할 겁니다.”

마틴의 대답에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제안서를 그쪽의 언어로 작성해주는 것은 이쪽의 호의를 보여주려는 전략이었다.

“아, 그리고 어제는 별일 없었다고 하던가?”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에델라가 돌아갈 때 말이야.”

“아, 그것 말씀이시군요. 말씀하신 대로 귀갓길에 호위무사 중 한 명을 대동하였습니다만,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에델라는 미처 몰랐지만, 마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와 돌아갈 때 모두 붉은바람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무사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에델라와 테라비스가 사는 저택에서 24시간 경비를 서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에델라에게 말했다가 괜히 그녀가 겁을 먹거나, 불편해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은 테라비스였다.

“확실히 처음부터 에델라가 가진 서류를 노리는 것 같았다는 거지?”

테라비스는 병원에서 마틴이 했던 말을 다시 되짚었다.

“네. 처음에는 고급 마차를 노린 소매치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멀쩡한 가방을 두고 서류 봉투를 노렸습니다. 게다가 제가 가지고 있던 사전도 노렸고요.”

“안다비아어 사전이 구하기가 어렵다곤 해도, 어차피 안다비아어를 아는 사람이 없으면 쓸모가 없는 물건일 텐데 사전은 왜 노린 거지?”

“제 생각엔 그자는 그게 사전인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건 무슨 말이지?”

“단장님께서도 보셨겠지만, 그 사전은 종이에 싸져 있었습니다. 안에 내용물이 뭔지 정확하게 알긴 어려웠죠. 제 생각입니다만, 그는 그것도 일종의 서류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전도 서류라고 생각해서 빼앗으려 했다는 거군? 칼로 위협을 해서까지 말이야.”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앞뒤가 맞긴 해. 그자가 떨어뜨리고 간 칼이 새것이라는 것도, 그 일대에 그렇게 생긴 소매치기범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도.”

“거기다가 그 정도 상처를 입었는데, 그자를 치료했다는 의사가 아무도 없는 걸 보면 더 확실하죠. 돈이 많은 누군가가 입단속을 단단히 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 우리의 안다비아 계약 건을 훼방 놓으려는 작자가 있는 거지.”

테라비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책상을 톡톡 쳤다. 그리고 말없이 마틴을 바라보았다. 테라비스의 눈빛을 받은 마틴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자신도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을 표시했다. 둘 다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에라 자작.’ 루젠타에서 붉은바람 상단의 라이벌인 비에라 상단의 단장이자, 평민인 테라비스가 자신과 비등한 존재라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남자. 게다가 그는 이런 못된 술수를 부릴 만큼 매우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자의 짓이라는 것을 알아낼 증거는 없겠지? 그가 비열한 인간이긴 해도, 멍청한 인간은 아니니까 말이야.”

“안타깝게도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유일한 증거품이라고 할 수 있는 칼이 워낙 많이 생산되는 저가품이다 보니 누군가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분명한 목격자가 셋이나 있으니, 언젠가는 찾을 수 있겠죠.”

“사실 난 그 분명한 목격자가 있다는 게 오히려 걱정이야.”

“네? 어째서요?”

“그쪽에서 목격자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까지 할까요?”

“물론. 그자는 그러고도 남을 자니까.”

테라비스는 꽤 확신했다. 자신이 아는 비에라 자작은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능력보다 야망이 컸고, 시기와 질투심은 그것보다 더욱 컸다. 최악은 그런 주제에 행동력은 또 빠르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내 생각엔 그가 꼬리 자르기를 할 것 같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게 좋겠어.”

“꼬리 자르기라뇨?”

“우리 자비로우신 부단장님께서는 그를 치료했다는 의사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돈으로 입막음을 당해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 생각은 달라.”

테라비스가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고 말을 하자 마틴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마음이 상한 것보다 더 큰 것은 궁금함이었다.

“그럼 단장님 생각은 뭡니까?”

“시체는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지.”

마틴의 눈이 커졌다.

“게다가 시체를 땅에 묻으면, 다시는 목격되지도 않을 거고.”

마틴의 입이 벌어졌다.

“심지어 시체는 조용하기까지 하지.”

마틴의 코가 벌름거렸다. 테라비스가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마틴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의심했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살인을 한단 말인가?

“나 말고, 그자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마틴의 눈빛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테라비스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지금처럼 에델라에 대한 호위는 계속 하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자네는 어때? 다리도 불편할 텐데 당분간 호위를 한 명 붙이면?”

“저는 괜찮습니다.”

“마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일이야.”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제 곁에 꼭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제 혈압이 오락가락할 것 같아서요.”

“뭐, 정 그렇다면야.”

마틴의 결벽증을 아는 테라비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몬테 님은 당연히 필요 없을 테고.”

테라비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이었다.

“왜요?”

마틴이 저돌적으로 그의 말에 반박한 것은. 그는 매우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테라비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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