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과거의 이름2021.08.23.
엔젤로테. 에델라의 눈에 그 단어만이 커다랗게 보였다.
“왜 그래?”
한눈에 봐도 에델라가 이상해 보이자 테라비스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어?”
“계약서에 이상한 거라도 있어?”
테라비스는 고개를 돌려 계약서를 쳐다보았다. 본다 한들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우리가 모르는 독소조항이라도 숨어 있는 거야?”
안다비아에서 직접 엔젤로테 상단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매우 신사적으로 보였다. 특히 최근에 상단을 물려받았다고 하는 백작은 귀족답게 매우 품위 있어 보였고, 신뢰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물론, 얼굴이나 인상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좋은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야비하게 몰래 독소조항을 넣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테라비스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한숨 돌리긴 했지만, 여전히 창백한 그녀의 안색이 걱정되었다.
“안다비아에서 거래하려는 상대방이 엔젤로테 상단이야?”
“응. 다른 곳도 물망에 오르긴 했지만, 그곳이 가장 적극적이었거든. 과거에 루젠타와 교역을 해본 적도 있다고 하고.”
“하지만 교역을 끊은 것도 그쪽이었다고 들었는데?”
“아, 맞아. 과거에 비에라 상단과 거래를 했었는데, 그쪽과의 마찰로 교역을 끊었던 모양이야. 그러다가 최근에 선대 백작이 작고하시고, 뒤를 이은 젊은 엔젤로테 백작이 우리 쪽으로 접촉을 해온 거지. 꽤 적극적이더라고.”
“젊은 엔젤로테 백작의 이름이 혹시 어떻게 돼?”
“음……. 뭐였더라?”
테라비스는 분명 들었던 그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했다. 젊은 엔젤로테 백작을 만났을 때, 악수했고, 서로 통성명도 했었다. 그때 그를 보며, ‘진짜 귀족’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외국 이름이라서 그런가 들었는데도,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 뭔가 혀가 주체가 안 되는 것 같은 발음이었는데 말이야. 무슨 사내놈 이름을 그렇게 지어 놓았는지, 원.”
자신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 남자였다. 보드랍고 매끈한 백작의 손과 악수를 하는 순간, 테라비스는 그것을 깨달았다. 테라비스에게는 없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힘겹게 돈을 모은 자신과는 달리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약속된 재산이 있는 남자였다. 거기다가 작위와 돈이 있다면, 그에 따른 명예와 권력은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테라비스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그가 부러웠다. 그래서 괜히 그의 이름에 트집을 잡는 중이었다.
“샤를리안…….”
테라비스를 대신하듯, 에델라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 맞아. 그거였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소리쳤다. 샤를리안 르 엔젤로테. 바다 건너 안다비아에서는 귀족들에게 ‘르’를 붙였다. 테라비스에게는 ‘드’나 ‘르’나 재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테라비스가 에델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귀족의 인맥이라는 것은 저 바다 건너까지 유효한 것이던가?
“여기, 적혀 있네.”
에델라는 손가락으로 계약서의 가장 아래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렇군.”
물론,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안다비아어가 그저 구불구불한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테라비스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보통 그 아래에는 사인이 들어가는 부분이니, 젊은 백작의 이름이 적혀 있나 보다 할 뿐이었다.
“곧 점심시간인데, 같이 식사나 할까?”
곧이라기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테라비스는 에델라에게 제안했다. 지난번에 같이 갔던 식당에서 에델라가 퍽 잘 먹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난 먼저 돌아가 볼게.”
“왜? 혹시 바로 일하려고?”
눈으로 계약서를 가리키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그건 그렇게 급하지 않아. 게다가 당신 실력이면 금방 끝날 텐데?”
“일찍 돌아가서 쉴까 해서. 새벽부터 일했더니 좀 피곤해.”
“그래, 그럼.”
쉰다는 이야기에 테라비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의 에델라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도 그랬고, 힘없는 목소리도 그랬다.
‘원래 그랬나?’
어쩐지 처음에 단장실을 들어올 때보다 급격하게 피곤해 보이는 에델라의 얼굴에 테라비스는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제는 큰일을 겪어서 놀란 데다가,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일한 에델라였다. 충분히 피곤할 만도 했다.
“마차를 불러줄게. 집에 가서 푹 쉬고, 그 계약서는 천천히 보도록 해.”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말은 저렇게 했어도 집에 가자마자 곧장 또 일을 시작할까 싶어서 몇 번이나 급하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며, 에델라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 * *
‘이야기 해야 할까?’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델라는 몇 번이나 그것을 고민했다.
‘쓸데없는 이야기일까?’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소파에 기대어 쉬면서도, 계속 에델라는 고민했다. 샤를리안과 자신의 관계를 이야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저기, 테라비스.”
그리고 그 고민은 저녁 식사 시간까지 이어졌다.
“응?”
스테이크를 썰던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
분명 조금 전까지는 찜찜한 감정이 남아 있으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에델라였다. 하지만 막상 테라비스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금 좀 줄래?”
“그래.”
결국, 에델라는 말하지 못했고 애먼 수프만 짜게 되어버렸다.
“마틴이 서류를 다 검토했어. 당신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더군.”
“부단장님은 안다비아어를 모르잖아.”
“하지만 이번 일을 총지휘하고 있는 건 마틴이거든. 자신이 조사한 바와 서류가 일치하는 점이 많다고 했어.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지. 하나는 엔젤로테가 제법 정직한 곳이라는 거고, 두 번째는 당신 번역이 훌륭하다는 거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사실을 전할 뿐이야.”
에델라는 살짝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테라비스는 그게 조금 아쉬웠다. 낮에 말했던 것처럼 에델라의 번역 능력을 칭찬하면, 낮에 보았던 그 미소를 또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몇 번이나 에델라의 미소를 보았던 테라비스였다. 가끔은 우아했고, 또 가끔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모호한 웃음이었다. 또 가끔은 진짜 상황이 재밌고 즐거워서 나오는 것 같은 웃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낮과 같은 미소는 처음이었다. 수줍은 듯하면서도, 행복한 미소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미소이기도 했다. 테라비스는 그 미소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에델라의 행복한 미소를.
“저기, 테라비스?”
“응?”
“……아니야.”
하지만 지금의 에델라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말을 하지 않으려니 마음이 불편했고, 말을 하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그를 속이는 것만 같았고, 혹시 이 사실이 테라비스의 사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도 마음이 쓰였다.
‘샤를리안이 옛날 일 때문에 해코지를 할 사람은 아닐 거 같지만…….’
에델라는 어린 날의 샤를을 떠올렸다. 해맑게 웃던, 샤를. 다정하고, 착했던 샤를. 그리고, 아무런 답장이 없었던 샤를. * * * 좋은 냄새가 났다. 에델라를 껴안은 테라비스의 코끝에서 아직 정체를 밝히지 못한 그 냄새가 살랑살랑 풍겨왔다. 저도 모르게 슬쩍, 눈이 감겼다. 시각을 차단하자, 후각이 더 기민하게 반응했다.
“저기, 테라비스.”
“응?”
제 턱 아래에서 불린 이름에 테라비스는 약간 몽롱한 상태로 대답했다. 지금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향기에 취해 있었다.
“할 말이 있어.”
“해.”
여전히 눈을 감고, 여전히 취한 채, 테라비스는 대답했다.
“나, 파혼 경험이 있어.”
“……뭐?”
번쩍! 테라비스의 눈이 떠졌다. 방금까지 자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던 향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대신 남은 것은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 같은 감각이었다.
“파혼?”
“응.”
담담한 에델라의 대답에 테라비스는 더욱 기가 막혔다.
“파혼이라니? 당신, 한번 결혼했었다는 거야?”
자신이 한 결혼이 재혼이었다니? 물론 재혼은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할 남편에게 그것을 미리 알리지 않은 것은 당연히 배신이었고, 배반이었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을 했었어.”
당황한 테라비스의 대답을 들으며, 에델라는 역시 테라비스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루젠타의 귀빈들이 모두 참석했던, 그야말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약혼식이었지만, 테라비스는 그때 이곳에 없었으니 말이다.
“약혼이라니? ”
끝내 테라비스는 제 몸을 뒤로 밀어 에델라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설마 에델라가 이런 식의 농담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도저히 덥석 믿을 수도 없었다.
“남자 손도 잡아본 적이 없다며?”
거짓말이라고는 못할 것 같은 에델라의 맑은 파란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테라비스는 물었다. 아니, 다그쳤다.
“응. 그렇게 말했었지.”
“그럼 그 약혼자하고는 손도 안 잡았단 말이야?”
“남자라고 하기에는…….”
“뭐?”
테라비스의 눈이 더욱 커졌다. 남자가 아니라니?
“그럼 약혼자가 아니라, 약혼녀가 있었단 말이야?”
세상에나! 귀족사회라는 곳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파격적인 곳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말은 남자가 아니라 어린애였다는 뜻이야.”
“어린애였다고?”
“그래. 내가 여덟 살 때 한 약혼이었어.”
“여덟 살? 상대방은?”
“아홉 살.”
에델라의 대답에 테라비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덟 살과 아홉 살이라면 남자와 여자라기보다는 에델라의 말대로 어린애들이었다.
“게다가 잡은 적이 있는지 어땠는지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아.”
“왜? 약혼자라며.”
“약혼식 이후에는 만난 적도 없고, 그다음 해에 바로 파혼했거든.”
이 대답에 테라비스의 흥분이 또 조금 더 가라앉았다. 튀어나올 듯 크게 떴던 눈도 이제 평소와 비슷한 크기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여덟 살 때 약혼을 하고, 아홉 살에 파혼했다는 거군?”
“맞아.”
그렇게 정리하자, 테라비스의 흥분은 거의 다 가라앉아 있었다. 진실을 알게 되자,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뭐야? 그냥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것이었겠네.’
그렇게 생각하자, 테라비스는 다시 느긋해졌다. 그는 뒤로 물렸던 상체를 바로 하며, 에델라를 다시 껴안았다. 좋은 냄새가 다시 테라비스의 코끝을 간질였다. 겨우 두 번째였지만, 테라비스는 이 시간이 좋아졌다.
“왜 파혼했는데?”
별생각 없이 테라비스가 툭 던진 질문에, 에델라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테라비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것이 그저 소꿉장난 같은 약혼이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