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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노력의 보상 (32/92)

32화. 노력의 보상2021.08.20.

  눈부신 아침 햇살이 테라비스를 깨웠다.

“하암~.”

긴 하품과 함께 눈을 뜬 테라비스는 몇 번 눈을 끔벅였다. 그리고 그 눈으로 제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델라?”

혹시나 해서 테라비스는 고개를 돌려 제 뒤를 돌아보았다. 가녀린 에델라라면 충분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했지만, 거기에도 에델라는 없었다.

“뭐야!”

테라비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명 어젯밤 자신의 품속에서 에델라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테라비스였다. 어디 잠이 든 것만 확인했을까? 침대에 누이고, 팔베개까지 해준 그였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어제의 그것은 꿈이었던 것처럼 에델라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테라비스는 침실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복도를 거의 뛰듯이 걸어 서재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이야.”

테라비스가 서재의 문을 벌컥 열자,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던 에델라가 힐끗 시선을 들어 그를 본 후에 태연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라니? 일하기 좋은 아침이라는 거야?”

“여러모로.”

“대체 언제 일어난 거야?”

“새벽에.”

“새벽 몇 시?”

“모르겠어.”

“해가 뜨긴 떴을 때야?”

“그것도 모르겠어.”

“대체 아는 게 뭐야?”

서류에 코를 박은 채 건성건성 대답하는 에델라를 쏘아보며 테라비스는 벌컥 소리쳤다. 그제야 에델라는 고개를 들었다.

“왜 화를 내는 거야?”

에델라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어젯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포옹의 1시간 뒤에는 다시 서재로 돌아와 일하려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 잠이 들어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몸이 가뿐했다는 것이었다. 잠든 시간은 짧았지만, 깊은 잠을 잔 모양이었다. 덕분에 또렷한 정신으로 조용한 새벽에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아침에 함께 식사하면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게 다 어제 테라비스가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말해주고, 지금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에델라에게 각인시켜준 덕분이었다. 그래서 에델라는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일어나면 고맙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아침 인사 대신에 신경질적인 말을 듣자, 고맙다는 소리가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얼굴에 화를 가득 담고서 테라비스가 말했다. 왜 화를 내냐는 에델라의 말에 언성은 조금 낮췄지만, 표정은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내가 왜, 무슨 이유로 화를 내겠어? 화낼 일이 전혀 없잖아? 날씨는 화창하고, 내 프리랜서 직원은 잠도 안 자고 새벽같이 일을 하고 있고, 아주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화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전혀.”

분명히 화가 난 것 같은데, 본인이 절대로 아니라고 하니 방도가 없었다. 에델라는 매우 찜찜했지만,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침은?”

“먹어야지.”

“뭐로?”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뭔데?”

“…….”

에델라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삐딱하게 서서, 삐딱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테라비스의 얼굴에는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아무거나라는 식자재는 없어.”

유치했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귀족 나리들이 먹는 음식 중에 아무거나라는 게 있나?”

아주 유치했다.

“…….”

“…….”

그리고 그걸 에델라뿐만이 아니라, 테라비스도 알았다.

“……식사 준비가 다 되면 부르러 오지.”

조용히 테라비스는 서재에서 나왔다. 그리고 서재로 달려갈 때만큼이나 빠르게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아! 미쳤나! 진짜!”

그리고 죄 없는 베개를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왜 그랬지…….”

조금 전까지 주먹으로 마구 쳐댔던 그 베개에 테라비스는 제 얼굴을 처박았다. 앞이 깜깜하고, 숨이 턱 막혔지만, 어린애같이 유치하게 굴었던 자신은 이런 체벌을 받아도 쌌다. 눈을 뜨고 에델라가 자신의 옆에 없는 것을 보자 화가 났다. 태연한 얼굴로 일을 하는 것을 보자 더 화가 났다.

“아……. 진짜 왜 그랬지?”

  * * *

“벌써?”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에델라를 보자마자 테라비스가 한 말은 그것이었다.

“왜?”

“너무 빠르잖아.”

테라비스는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빨리하면 오늘 중으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던 에델라는 오전 중에 서류의 번역을 다 마치고 이곳으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한 거야?’

다시 테라비스의 인상이 구겨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지. 내가 화낼 일이 아니잖아.’

그는 안간힘을 쓰며 찌푸려지려던 이맛살을 힘주어 폈다. 에델라가 서류를 빨리해오면 좋은 일이었다. 당장 며칠 뒤에 안다비아에서 손님이 오는데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수고했어.”

테라비스는 방긋 웃으면서 에델라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에델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는 모습이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가게에 들어온 손님을 대하는 점원과 같은 태도에 에델라는 거리감을 느꼈다. 차라리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게 진짜 테라비스 같았다.

“이건 이번 일에 대한 보수야.”

에델라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채, 테라비스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수표를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봉투를 본 에델라는 잠깐 망설였다. 테라비스가 이전에 번역해주면, 그 대가는 따로 주겠다고 말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진짜 이것을 받아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받아.”

에델라의 생각을 읽어낸 테라비스가 재차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번역 일은 우리 계약과는 상관없는 별도의 일이었으니, 이건 받는 게 맞아.”

“하지만 당신도 우리 계약에 없던 일을 내게 해주었잖아. 이 옷이나, 우리 부모님께 음식을 보낸 일 같은 것들.”

“그건 그냥 부수적인 것들이었지. 당신이 내 아내가 되는 데 필요한 일들. 아, 참! 모레가 포웨이스 남작 주체의 무도회 날인 것 알지?”

“기억하고 있어.”

“좋아. 거기서 내가 사준 드레스를 입고, 마음껏 내 귀족 아내라는 것을 뽐내줘. 그러라고 사준 드레스니까.”

“귀족 아내라는 것은 어떻게 뽐내야 하는데?”

“그야 나는 모르지. 나는 귀족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테라비스는 되받아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맞는 말도 아니었다.

“자, 자. 받아 두라고. 어차피 번역가는 고용할 생각이었고, 고용하면 당연히 상단에서 지급할 돈이었어. 오히려 이렇게 빨리 일을 해줬으면, 웃돈을 얹어줘도 시원치 않을 판이야.”

테라비스는 아직도 가만히 서 있는 에델라의 손에 거의 억지로 봉투를 쥐여주었다.

“이번 일이 잘되면, 계속 안다비아어 번역가가 필요할 수도 있어. 그때가 되었을 때 모른 척하지나 말아줘.”

“그럴 일 없어.”

“좋아. 그리고 우리랑 독점이야. 다른 상단의 안다비아 번역 의뢰를 맡지 마. 그것까지 고려해서 넣은 보수니까.”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자신이 들고 있는 봉투가 얼마짜리인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체면상 차마 그의 앞에서 봉투를 열어볼 수는 없었다.

“열어봐도 돼.”

그리고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시선과 표정을 그대로 읽어냈다.

“그쯤이야.”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장사의 잔뼈가 굵은 그에게 순진한 귀족 영애의 생각을 읽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듯이 말이다. 다만, 그 귀족 영애가 가끔 생각지도 못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문제였지. 테라비스에게 강제로 양해를 당한 에델라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

그리고 놀랐다. 봉투 안에는 에델라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단 며칠 동안 한 일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다.

“너무 많…….”

“지 않아.”

에델라가 무슨 말을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듯, 테라비스는 그녀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말했듯이 독점에 대한 웃돈과 빠른 마감에 대한 웃돈을 얹은 금액이야.”

“그래도 너무 많…….”

“지 않아. 당신이 일한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거든.”

이번에도 에델라의 말을 싹둑 잘라내며, 테라비스는 뒷말을 자신이 이어버렸다. 대강 훑어보았지만, 에델라가 건넨 서류는 매우 흡족했다. 본인 말로는 시간이 없어서 문장이 매끄럽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문학작품도 아닌데 문장이 유려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사업서류이니, 문장이 딱딱한 것은 당연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있느냐였고, 빈 곳이라고는 없는 걸 봐선 에델라의 안다비아어가 정확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내가 한 번역이 마음에 들었어?”

“매우.”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어버렸다. 그리고 봉투를 쥔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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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맡게 된 일이었지만, 테라비스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테라비스가 이제껏 에델라를 배려해주고, 도움을 주었듯, 자신도 테라비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원래 성실하기도 했지만, 그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번역에 매달린 에델라였다. 틀린 해석이라도 있을까 봐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했었다. 제국어로는 설명하기 힘든 안다비아 특유의 표현들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끙끙거렸다. 마틴에게서 급한 일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빨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욱 일에 매달렸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며 일을 할 만큼. 하지만 피곤함과 힘듦이 방금 테라비스가 한 말로 전부 보상받은 것 같았다. 자신의 가치가 그저 귀족 영애라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 사실이 에델라에게 더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에델라는 웃으며 테라비스에게 말했다.

“…….”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테라비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테라비스?”

“어, 어? 아! 응. 그래.”

에델라가 그를 부르자, 선 채로 잠이 든 것처럼 멍하니 있던 테라비스는 그제야 퍼득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자신이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는 듯했지만.

“말이 나온 김에 안다비아에서 온 계약서를 줄게. 이건 몇 장 되지 않으니까, 금방 끝날 거야.”

테라비스는 방금 자신이 멍하니 있었던 것을 덮으려는 것처럼, 황급히 서류를 찾았다.

“자, 여기.”

“알았어.”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자마자 에델라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계약서를 든 에델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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