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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저마다의 밤 (31/92)

31화. 저마다의 밤2021.08.16.

  째깍, 째깍. 시간이 가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마틴을 쳐다보았다. 이 인간이 지금 뭐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쉭~ 쉬익~.”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오늘 이사벨라의 먹이인 알을 보며 빨리 달라고 보채보지만, 마틴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집에 들어올 때부터 그는 이상했다. 나갈 때는 멀쩡했던 그가 들어올 때는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한쪽 다리에는 허연 것을 둥둥 감고서.

“하아…….”

한숨과 함께 마틴의 손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사벨라가 몸을 일으키면 그의 손에 닿을 만한 거리였다.

“아! 그래, 그래.”

이사벨라가 둥근 머리로 마틴의 손을 툭툭 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마틴이 손에 든 알을 이사벨라에게 내밀었다. 신이 난 이사벨라는 그대로 꿀꺽~ 통째로 알을 삼켰다. 평소라면 그런 이사벨라를 신기하고, 기특하게 쳐다보고 있을 마틴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마틴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이사벨라가 먹이를 먹는 모습이 아니라, 오늘 낮에 보았던 로즈의 모습이었다.

“멋있었지…….”

로즈가 날아올랐던 그 모습이 몇 번이나 마틴의 눈앞에 되살아났다. 찰랑이던 단발머리가, 입을 꽉 다문 그 모습이, 역광으로 보이던 그녀의 그림자가, 그 눈부신 후광이 몇 번이나 마틴의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저렇게나 계속 뛰면, 로즈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아…….”

로즈의 그 모습을 생각하자, 마틴의 입에서 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것은 걱정이나, 힘들어서 나오는 한숨이 아니었다. 마치 짝사랑하는 상대를 멀리서 바라보는 소녀의 애달픈 한숨과 비슷한 것이었다. 상대방의 모습을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대는 것도 거의 비슷했다.

“이사벨라.”

동그란 알을 삼킨 채, 바닥에 편안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자신의 반려뱀의 이름을 부르는 마틴의 목소리는 어쩐지 몽롱했다. 꿈꾸는 것 같기도 하고, 잠이 덜 깬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현실이 아니라 머릿속의 영상만 자꾸 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자신이 보았던 로즈는 꿈인 듯, 꿈이 아닌 듯,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꼭 이사벨라 같았어.”

마틴은 이사벨라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돌멩이를 든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한쪽으로 그것을 던지고 있었다. 길고양이나 떠돌이 개를 맞히고 있는 건가 싶어서 마틴은 일단 호통을 쳐서 아이들을 내쫓았다. 그들의 몸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동물이 비로소 마틴의 눈에 들어오자, 그도 놀랐다. 그것은 흔히 보이는 개나 고양이가 아니었다. 숲속에서나 있었어야 할 뱀이었다. 아이들의 돌에 맞아서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뱀. 잠시 당황했던 마틴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게 뱀이라도 다친 동물이라는 것은 변함없었으니까. 마틴은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뱀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흙이 묻어 있었고, 피가 묻어 있었지만, 조금도 더럽다고 느껴지지 않았었다.

“이사벨라.”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로즈에게 몸을 기대었을 때, 더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그녀의 땀 냄새가 조금 느껴졌고, 점심때 무엇을 먹었는지 로즈의 옷 소매에는 뭔지 모를 노란색 소스가 묻어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게 역겹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 혹시…… 반한 걸까?”

“쉭~ 쉬익~.”

마틴의 중얼거림에 이사벨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 * * 마틴이 이사벨라와 문답을 하고 있던 그 시각.

“크흐!”

마틴의 머릿속에서 성스럽고, 정의로웠으며, 한없이 멋있었던 로즈는,“마스터! 여기 한잔 더!”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어이, 로즈!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오늘은 특히 잘 마시는데?”

마스터는 술을 주며 로즈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단숨에 술을 마시느라 바로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기 위해서 술을 끊을 수도 없었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간질간질하다 못해, 따끔따끔해져 가는 그 순간을 가장 좋아하는 로즈였다. 고작 질문에 대답해주기 위해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 순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로즈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이 주점을 운영했던 마스터는 단골들의 취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로즈의 취향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비어버린 로즈의 땅콩 접시를 채워주며 느긋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푸하!”

숨까지 참아가며 커다란 잔의 반쯤 술을 마시고 나서야, 로즈는 잔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목구멍이 따가웠고, 그 여운을 로즈는 흐뭇하게 즐겼다.

“좋은 일, 있죠!”

나머지는 조금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로즈는 씩 웃으며 마른 땅콩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오! 무슨 일인데?”

“쌍검 로즈의 단도가 또! 없어졌습니다.”

“뭐? 또 던졌어?”

“네. 우리 귀여운 부단장님이 다칠 뻔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냅다 던졌지요.”

“아, 전에 말했던 그 귀엽다는 부단장?”

“넵!”

로즈는 웃으면서 땅콩을 위로 던져, 입으로 받아먹었다.

“근데, 검을 잃어버려 놓고 뭐가 좋은 일이라는 거야?”

“검을 잃어버렸으니까, 새 검을 살 수 있잖아요. 새 검을 길들일 생각을 하니 아주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후후훗.”

로즈는 제법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이왕 새 검을 장만해야 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런 거에만 가슴이 두근두근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거에만 이라뇨? 그거 말고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야 많죠.”

“뭐가 있는데?”

“일단, 월급날.”

“그 점은 매우 인정하지.”

로즈의 말에 마스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날 우습게 보던 놈들을 때려눕히는 순간.”

“이제 그런 날은 별로 없겠군.”

“그렇죠.”

이제 루젠타에서 로즈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녀를 우습게 볼 사람도 없었다.

“또 나보다 훨씬 큰 상대를 때려눕히는 순간.”

“사람을 때려눕히는 순간 말고는 없어?”

“음…….”

“그 사람을 보면 두근거린다던가?”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한 로즈를 보며, 힌트를 주려는 듯 마스터가 말했다.

“아! 있어요!”

“있어? 그런 사람이 있어?”

“네.”

로즈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마스터는 환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성년이 되자마자 출생 증명서를 이마에 딱 붙이고 주점 문을 열고 들어온 로즈였다. 그녀는 처음 찾아온 그 날부터 자신도 놀랄 만큼 애주가가 되었고, 웬만해서는 취하지 않는 주당이 되었으며, 멀리 일을 가지 않을 때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는 단골이 되었다. 물론, 마스터는 로즈가 단골이 되어서 좋았다. 잘 취하지 않으니 술을 많이 마셨고, 인사불성이 되어 곤란하게 만든 적도 없었다. 항상 계산은 현금이었고, 나누는 대화도 유쾌한 손님이었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 보아 온 로즈였지만, 한 번도 연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가끔 남자와 함께 온 적도 있었지만, 다 용병단의 동료이거나 일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뭔가 분홍빛의 러브모드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굴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바로바로!”

마스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로즈가 연애하는 것인가? 상대는 누굴까? 같은 용병단에 사람 좋다는 마크? 아니면 지금 일하고 있는 상단의 귀엽다는 그 부단장? 누구라도 좋았다. 얼마 전에 결혼했다는 유부남인 단장만 아니라면!

“저 사람!”

로즈는 검지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고, 마스터는 곧장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벽뿐이었다.

“크흐! 4천만 루나라니!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 해서 터져버릴 것 같아!”

로즈는 진짜 자기 심장이 터질까 봐 두렵다는 듯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녀가 가리킨 벽에는 현상범 수배 전단이 붙어 있었다.

“설마, 로즈. 네가 두근거린다는 사람이……?”

마스터는 아니기를 빌었다. 돈만 밝히는 사람이 아닌 그는, 자신의 사람 좋은 단골이 알콩달콩 어여쁜 사랑을 하기를 바랐다. 매출이 좀 떨어져도 좋으니, 술집은 그만 오고 데이트를 하기를 바랐다.

“내가 언젠가는 잡아서! 어! 인생 역전하고 만다!”

하지만 맞았다. 로즈는 큰소리를 치곤, 호기롭게 잔에 남아 있던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마스터! 한 잔 더요!”

그리고 다시 소리쳤다. 아무래도 마스터가 바라는 날은 아직 먼 것 같았다. * * *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등을 몇 번 더 두드렸다. 토닥이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떨리고 있던 에델라의 등이 점차 잠잠해졌다. 아래위를 오르내리던 숨이 느려지고, 마침내 닿은 손에서 고른 호흡이 느껴질 정도가 되자 테라비스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꺾어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에델라?”

아주 작은 부름이었다. 혹여, 그녀가 잠이 들었다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

그리고 잠이 든 에델라는 대답 대신 고른 숨소리를 테라비스에게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추켜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몸을 뒤로 기울였다. 한참이나 허리가 불편하게 앉아 있었던 터라, 뻐근해진 허리가 학대를 멈추라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테라비스는 조용히 인상을 쓰며 그것을 무시했다. 한쪽 팔로 에델라를 감싼 채, 다른 한쪽 팔은 팔꿈치로 제 몸을 지지했다. 끙하는 소리가 날 만큼 복부에 힘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테라비스의 움직임은 느렸다.

“흐음…….”

제 몸이 기울여지는 것이 불편했던지, 에델라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나오자, 테라비스의 눈이 커지며 그대로 몸이 굳었다.

‘휴우~.’

몇 초간 그러고 있던 테라비스는 아까 그 소리가 그저 작은 잠꼬대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아주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였다. 등이 침대에 닿자 잔뜩 힘을 주었던 복근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하지만 아직 일이 남아 있었다. 테라비스는 그의 몸을 침대 삼아서 누운 에델라를 아주 조심스럽게 옆으로 뉘었다. 테라비스의 가슴에 닿았던 에델라의 머리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그제야 에델라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 걱정 없이 잠든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다행이었다. 무서운 기억이 에델라의 악몽까지 스며든 것 같지는 않았다.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더라면, 에델라의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나쁜 기억이었다. 끄집어내서 별것 아니었다고, 이미 지나온 일이라고 확실하게 해두지 않는다면 말이다.

“잘 자.”

테라비스는 조용히 잠든 에델라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빼고, 베개를 받쳐주려고 했다. 조심스럽게 테라비스가 팔을 빼내려는 순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테라비스는 잠든 에델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곱게 감긴 눈꺼풀과 새근새근 숨을 쉬는 붉은 입술을 보자, 더 팔을 빼기 싫어졌다.

“그래. 뭐…… 아직 포옹 시간이 남았으니까.”

테라비스는 팔을 빼려던 것을 멈췄다.

“계약서대로 철저하게 해야지. 안 그래?”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하며 테라비스는 삐죽,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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