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품속에서2021.08.13.
사실 테라비스도 머릿속으로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에델라가 잠시 쉬기를 원했다. 계약과 포옹은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무릎에 앉으라고 하면 모양새가 좀 그렇고…….’
테라비스는 탄탄한 자신의 허벅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에델라의 무게쯤이야 거뜬히 버틸 수 있었지만, 모양새가 영 그랬다. 예의범절만은 황실에 데려다 놓아도 손색없을 귀족 영애인 에델라가 그런 자세로 자신에게 안길 리가 없었다.
‘앞쪽으로는…….’
슬쩍 제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며 테라비스는 생각했다. 손바닥만큼의 공간이 드러나며 소파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니, 이것도 좀 그렇지.’
테라비스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제길! 포옹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분명 포옹이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진짜 알고 있는 건지 테라비스의 머릿속에서 혼동이 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에델라는 이미 테라비스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정쩡하게 팔을 벌린 자세로.
‘이게 아닌데?’
테라비스가 원한 것은 에델라가 좀 쉬는 거였다. 선 채로 1시간 동안 테라비스를 껴안고 있는 것은 쉬는 게 아니라, 기합이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동안, 테라비스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포옹을 하면서 쉬게 만들 수 있지?
“침실로 가는 게 어때?”
일단, 장소를 옮겨야 했다. 저 서류에서 에델라를 떨어지게 만들어야 했다.
* * *
“일단…… 앉을까?”
테라비스의 제안에 에델라는 순순히 침대에 앉았다. 테라비스도 그녀의 옆에 앉자, 묵직한 무게감이 침대의 쿠션을 통해서 전해져왔다.
“자, 그럼.”
테라비스는 슬쩍 엉덩이를 떼더니, 조금 더 에델라의 옆으로 다가왔다. 조그만 에델라의 주먹 정도만 두 사람의 사이에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는 팔을 벌렸고, 에델라는 제 몸을 살짝 테라비스의 쪽으로 기울였다. 비스듬한 아치 모양으로 테라비스와 에델라의 몸이 맞닿았다. 조금 어정쩡한 자세로 공중에 들려 있던 테라비스의 손이 살며시 에델라의 등에 닿자, 그녀가 움찔하는 것이 손을 통해서 느껴졌다. 동그란 어깨가 솟아오르는 것도 눈에 보였다.
“…….”
테라비스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솟아올랐던 에델라의 어깨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에델라의 배 앞에 가만히 모아 있던 손이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머뭇머뭇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공중에서 잠시 멈췄던 손은 테라비스의 가슴과 허리 중간쯤에 살포시 얹어졌다.
“…….”
조금은 어정쩡하고, 또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어쨌든 둘은 포옹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몸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에델라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절로 힘이 빠져나갔다. 빳빳하게 들려 있던 머리도 천천히 힘이 빠지더니, 결국 테라비스의 가슴에 기대었다.
‘처음 손잡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어색해 죽을 것 같았던, 손을 잡았던 첫날이 떠오른 에델라는 오히려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신체적 접촉이 더 많아서 더 힘들 것으로 생각했던 포옹은 오히려 그것보다 쉬웠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에델라는 그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아니면 눈이 보이지 않아서?’
처음에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몰랐던 것이나, 서로 눈이 마주치면 그게 더 어색했던 것이 생각나 에델라는 그렇게 추리하고 있었다.
‘아…… 허리야…….’
하지만 사실 에델라의 추리는 크게 어긋나 있었다. 지금 에델라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테라비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주도했던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편히 기댈 수 있게 최대한 몸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에델라의 머리카락이 그의 볼을 간지럽히고 있어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녀가 너무도 편안하게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힐끗, 테라비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에델라의 이마와 감은 듯, 감지 않은 듯, 가지런한 에델라의 속눈썹이 보였다. 고개를 기울여서인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자나?’
속으로만 생각했었는데, 마치 그 질문을 듣고 대답하는 것처럼 에델라의 속눈썹이 한번 깜박였다.
“에델라?”
그녀가 자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테라비스는 말을 걸었다.
“응?”
테라비스의 품이 편안해서 나른해져 있던 에델라는 자세는 그대로인 채 대답했다. 보통이라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대화하는 상대방을 쳐다보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른해진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무섭지 않았어?”
“응?”
갑작스러운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괜찮아. 그대로 있어.”
하지만 테라비스의 커다란 손이 에델라의 등을 살짝 힘을 주며 눌렀다. 조금 전까지 에델라가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테라비스도 알고 있었다. 에델라의 나른한 목소리가, 긴장을 풀고 늘어진 몸이, 그리고 방 안의 공기가 그에게 지금 에델라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테라비스는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예전에 배를 탄 적이 있었어.”
“선원 일을 했었어?”
“응. 아주 어릴 때 붉은바람 상단을 만들기 전에 뱃일을 잠깐 했었지.”
마치 어린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테라비스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조곤조곤했다.
“그 일이 익숙해져 갈 무렵에, 해적을 만나게 되었어.”
“해적?”
“응. 해적.”
테라비스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굵고, 깊게 울렸다. 에델라가 그의 가슴에 귀를 붙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 배를 탔지만, 해적은 처음이었어. 엄청나게 당황했고, 이전에 다른 선원들이 해적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라고 말해준 건 몽땅 까먹고 꽁지가 빠지라 도망갔어.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는데 말이야.”
“그래? 당신이 그랬다니 상상이 가지 않아.”
“왜?”
“글쎄, 당신이라면 ‘내가 바로 테라비스 바넬레오다! 덤벼라!’라고 할 것 같아서?”
에델라는 짐짓 굵은 목소리로 테라비스를 흉내 내며 말했다. 물론, 하나도 비슷하지는 않았다. 저도 그것을 아는지, 에델라의 마지막 말은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때의 테라비스 바넬레오는 아주 어렸거든.”
테라비스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의 근육의 움직임이 에델라의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만큼 둘은 꼭 붙어 있었다.
“몇 살이었는데?”
“갓 열여덟이 된 나이……라고 나를 고용한 선장님은 알고 계셨지만, 사실은 열일곱이었지.”
“속인 거야?”
“생일만 조금.”
“어떻게?”
“출생증명서의 12월에서 2를 살짝 지웠지.”
“12월을 1월로? 그건 조금이 아니잖아. 거의 1년인데?”
“11개월은 절대로 1년이 아니야. 그건 매우, 매우, 큰 차이라고.”
테라비스의 정색에 에델라는 대답 대신 웃어버렸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지만, 테라비스는 그녀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얇은 셔츠의 너머로 에델라의 뺨이 움직인 것이 느껴졌고, 작은 숨결이 셔츠 사이로 파고들어 테라비스의 가슴을 간질였다.
“그 뒤는 어떻게 됐어?”
“다행히 다른 선원들은 나와는 달리 해적에게 꽤 익숙했기 때문에 능숙하게 배를 돌려서 빠져나올 수 있었어.”
“다행이네.”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나는 그때, 무서웠어.”
천천히 테라비스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드러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밤마다 그 해적이 내 꿈에 나타날 만큼이었어. 밤마다 악몽을 꿨고, 새벽이면 잠에서 깼고, 아침이면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지. 당연히 식욕도 없었어.”
“저런.”
에델라는 진심으로 어린 테라비스가 겪은 악몽이 안타까웠다. 그 어린 나이에 나이를 속여가며 배를 탔다면,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아서 더 그랬다.
“내가 그 악몽을 꾸지 않게 된 건, 내가 점점 나무 꼬챙이처럼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선장님의 부름을 받은 뒤였어.”
“그분이 해결해주신 거야?”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델라는 그의 고갯짓을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느꼈다.
“어떻게?”
“들어주셨어.”
“들어주셨다고?”
“응.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얼마나 겁에 질렸었는지, 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놈인지를, 엉엉 울면서 나는 말했고, 선장님은 다 들어주셨어.”
“그리고?”
“물을 한 잔 주셨어.”
“그다음에는?”
“그게 끝이야.”
“끝이라고?”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그를 쳐다보았다.
“응. 그게 끝이야.”
“그런데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응.”
에델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에델라.”
조용히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불렀다.
“오늘, 무섭지 않았어?”
그리고 테라비스는 처음에 물었던 것을 다시 물었다.
“나는…….”
에델라는 오늘 낮의 상황을 떠올리려고 했다.
“잘 모르겠어. 너무 순식간에 일이 일어나서.”
마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군가가 에델라의 앞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동시에 손이 아팠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파악하지 못했을 때, 마틴이 소리를 질렀다. 에델라는 그제야 자신이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도 소리를 쳤을 때, 그가 칼을 들고 마틴에게 덤벼들었다. 마틴이 쓰러지고, 에델라는 도와달라고 소리를 쳤다.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고, 너무나 급하게 일어났다. 에델라가 어떤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을 만큼.
“나는…….”
정신없는 이미지들이 순식간에 에델라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마틴이 쓰러졌다. 무서운 사람이 칼을 들고 있었다. 손이 아팠다.
“……무서웠어.”
에델라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그때의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파르르, 에델라의 몸이 떨렸다. 붕대를 감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에델라.”
다정한 목소리가 에델라를 불렀다. 멍하니 그때의 장면을 보고 있던 에델라의 고개가 커다란 손에 의해서 사뿐히 들어 올려졌다. 그러자 그 장면 대신 에델라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었다.
“이제 괜찮아.”
커다란 손이 에델라를 감싸 안았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토닥였다. 든든한 가슴에 에델라는 몸을 기대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었다.
“이제 괜찮아, 에델라.”
다시 한번 다정한 목소리가 에델라의 머리 위에서 나풀거리며 내려앉았다. 커다란 손은 토닥토닥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에델라는 가슴 안에 있던 날카로운 기억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도, 바닥에 쓰러진 마틴도, 날카로웠던 칼도, 무서운 그 남자도, 모두 녹아내리고 있었다. 스르륵, 에델라의 눈이 감겼다. 다정한 목소리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고요한 평화가 에델라의 마음에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