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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침실로 갈까? (29/92)

29화. 침실로 갈까?2021.08.09.

“불편하지 않아?”

서재의 책상에 앉은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집중한 표정으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에델라는 3초 정도 뒤에 고개를 들었다.

“응? 뭐라고 했어?”

“다친 손 말이야. 일하는데 불편하지 않냐고.”

“오른손이면 좀 불편했을 테지만, 왼손이라서 괜찮아.”

에델라는 붕대를 감은 손을 들어 테라비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그야말로 베인 것뿐이었다. 병원에 갈 정도도 아니었고, 이렇게 붕대를 감을 정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테라비스가 파상풍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아냐며, 잘못하면 살이 썩어들어가거나 죽을 수도 있다며, 에델라에게 겁을 주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소독하고 조금 과하게 붕대를 감아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사실, 에델라는 파상풍이 종이에 베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 것도 알았고, 그저 소독으로 예방할 수 있는 병이 아닌 것도 알았다. 아마 테라비스보다 에델라가 의학지식은 더 가지고 있을 터였다. 에델라의 취미는 독서였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병원에서 호들갑을 떠는 테라비스가 좀 창피해서였다. 집에서 소독하면 나을 찰과상 정도에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엄청나게 다친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아프잖아. 아프면 일하기가 힘들지 않아?”

바로 지금처럼.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아. 이건 그냥 베인 상처잖아.”

“하지만 피가 많이 났잖아.”

“그렇게 많이 나지도 않았어. 게다가 피가 하나도 나지 않은 부단장님이 훨씬 더 많이 다쳤잖아.”

그랬다.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은 마틴이었다. 부러졌다는 로즈의 의견은 다행히 틀렸다. 마틴의 다리는 뼈에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두꺼운 붕대로 꽁꽁 싸매 다리를 고정한 마틴이야말로 에델라보다 훨씬 불편한 처지였다.

“게다가 시간이 없잖아.”

에델라는 늦은 밤까지 자신이 일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없어진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했고, 안다비아의 거래처가 루젠타로 올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잖아.”

테라비스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이 흐린지 밤하늘의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아서 그야말로 밖은 깜깜했다.

“원래 그렇게 할 일을 뒤로 미루는 편이야?”

“내가?”

“그래.”

“전혀 아니야. 당신이 잘 모르는 모양인데, 붉은바람 상단의 테라비스 바넬레오는 일벌레라고 불린다고.”

“그런데 왜 그래?”

“뭘?”

“급한 번역인데, 왜 급하지 않다고 하냐고. 오늘 부단장님에게서 다 들었어. 며칠 뒤에 안다비아에서 사람이 온다며? 그런데 나더러 예로니아 저택에서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고, 천천히 오라고 했잖아.”

“낮에도 말했지만, 당신도 밥은 먹고 일해야 하잖아.”

“하지만 일이 급하면 밥을 빨리 먹고 일을 해야지.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느긋하게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게 아니라.”

에델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도를 만나는 바람에 잊고 있었던 의문이 테라비스의 말에 되살아나서였다.

“그레인이 왔을 때도 그래. 이게 그렇게 급한 일인지 말을 해줬으면, 일찍 들어왔거나 그날 밤에 조금이라도 일을 했을 거잖아.”

“그날? 밤새도록 그레인의 손수건에 이니셜을 새겨준다며 바느질을 한 그날?”

“이 일이 그렇게 급한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레인의 손수건은 뒤에 해서 소포로 보내주면 되니까.”

“퍽이나 그랬겠다. 그날 얼마나 피곤했는지 코를 곤 건 기억도 안 나?”

“내가?”

“그래.”

“말도 안 돼! 나는 코를 골지 않아!”

“그럼 내 옆에서 코를 골고 자던 그 여자는 누군데? 지금 날 불륜남 취급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그럼 코를 곤 건, 네가 맞아.”

“그럴 리도 없어!”

에델라는 발끈해서 테라비스의 말을 부정했다. 한 번도 자신이 코를 곤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 녹스 할멈이랑 잔 적을 제외하면 누군가와 같이 잔 적도 없어서, 진짜 코를 골았다고 해도 그걸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지만. 어쨌든, 자기가 코를 골 리가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에델라는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저 능구렁이 같은 테라비스의 특기가 논점을 흐리는 것이고, 상대를 발끈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에델라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도 별것 아닌 상처인데, 자꾸 환자 취급을 하면서 일을 천천히 하라고 하고 있잖아.”

“별것 아니라니? 낮에도 말했지만, 작은 상처를 우습게 여기다가 파상풍에라도 걸리면…….”

“파상풍은 종이에 베인다고 걸리는 병이 아니야.”

“……그래?”

“그래.”

에델라가 너무도 단호하게 확신하자, 테라비스는 주춤했다. 분명 전에 선원 하나가 다쳐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파상풍의 위험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선원만 걸리는 병인가?

“대체 왜 그래?”

지금은 파상풍이 어떻게 걸리는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유를 알아내고 말겠다는 듯이 테라비스를 몰아붙이고 있는 에델라가 문제였다. 안다비아 서류가 급한 일인 것? 물론, 테라비스는 알고 있었다. 서류가 빨리 되지 않아서 제일 속이 바싹바싹 타는 것은, 이 일에 큰 기대를 하고 막대한 인력과 돈을 투자할 붉은바람 상단의 단장인 그였다. 그런데도 에델라에게 별로 급하지 않은 일인 양 구는 이유? 그건 에델라 때문이었다.

‘당신이 부모님을 보고 싶어 했잖아.’

그 말이 테라비스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 병환은 괜찮은지, 어머니는 잘 계신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잖아.’

그날 아침, 테라비스가 본 에델라는 딱 그랬다. 그래서였다.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돌아오려는 에델라를 설득한 것은. 에델라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

하지만 에델라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 왜 그런 걸 신경 쓰는데?’

에델라가 그렇게 말을 할까 두려웠다.

‘우리는 계약상 부부일 뿐이야. 당신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또 그렇게 말할까 봐 무서웠다.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뤄내려고 죽을 듯이 노력하고, 또 마침내 그걸 해내고야 마는 일벌레, 독한 놈, 능구렁이 테라비스 바넬레오는 이상하게도 저 가녀린 여자 앞에서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제길! 이것도 다 저 빌어먹을 드 때문인가?’

테라비스는 뼛속까지 귀족 같은 에델라의 앞에서 자신의 평민 콤플렉스가 도드라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테라비스.”

한참이나 테라비스가 묵묵부답이자, 답답해진 에델라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대답을 종용했다. 이제 뭐라도 대답해야 했다.

“난 여유로운 남자거든.”

“뭐?”

“조급해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테라비스는 상체를 뒤로 기울여 등받이에 제 등을 붙이며 거만해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당신에게만 알려주는 내 비즈니스 비법이지.”

찡긋, 윙크까지 하며 그는 비즈니스로 점철된 환한 미소를 띤 채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에델라는 기막혀했다. 더불어 재수 없어 했다.

‘진지하게 물어보려고 했던, 내가 바보지.’

에델라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나처럼 테라비스는 능구렁이처럼 쏙 빠져나가 버렸다.

“그렇게 방해할 거면, 그냥 먼저 가서 자.”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에델라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이미 봤던 내용이었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사전을 찾아볼 수 있어서 다행히 속도는 빨랐다. 오늘 밤을 새운다면, 좀 문장이 거칠긴 하지만 내일 오전 중에 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저러지.’

그리고 테라비스는 그런 에델라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었다. 에델라가 밤을 새워서라도 일을 끝내려고 한다는 것을. 테라비스의 계약 아내는 고집이 세고, 제 몸을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고마웠다. 에델라가 제 아버지를 위해서 제 인생을 희생했기 때문에, 테라비스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고, 결혼할 수 있었으며, 원하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에델라가 제 몸이 축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골이 났다. 저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걸 보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눈을 돌려 시계를 보자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에델라가 저렇고 앉아 있은 지 벌써 5시간째라는 말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일한 시간까지 합친다면 8시간이 넘었고.

‘저렇게 계속 쓰다간 손목 부러지는 거 아니야?’

아무리 에델라의 손목이 가늘다고 해도, 온종일 글자를 쓴다고 부러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테라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도 좀 빨간 것 같은데?’

테라비스의 착각이었다. 에델라의 눈은 멀쩡했다.

‘아니, 그것보다 사람이 저렇게 무리하면 쓰러지는 거 아니야?’

자신도 일에 몰두하면 밤샘은 물론이고, 이틀 연속으로 잠을 자지 않은 적도 있으면서,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델라.”

“방해할 거면 그냥 가서 잠이나 자라고 이야기했어.”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에델라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을 좀 먹지 않겠느냐고 말을 하려고 했던 테라비스는 머쓱해졌다. 좀 쉬라는 말은 더 안 통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당신 때문에 내가 잘 수가 없어서 그렇지.”

“뭐?”

그제야 에델라가 고개를 들었다. 테라비스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계약 잊었어? 매일, 한 시간.”

“……잊지 않았어.”

물론, 에델라는 잊지 않았다. 다만, 오늘도 테라비스가 그걸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렇게 바쁜데! 심지어 자기 상단 일 때문에 바쁜 건데!

“이리 와.”

불만스러운 에델라의 표정을 무시한 채, 테라비스를 팔을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에델라는 멈칫했다. 계약에 관해서는 잊지 않았던 에델라였지만, 오늘부터 포옹이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던 에델라였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살짝 당황했던 에델라였지만, 테라비스의 말에 애써 태연한 척했다. 드디어! 5시간 만에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5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팔을 벌린 채 앉은 테라비스의 앞에 선 에델라는 또 잠시 망설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에델라는 남성과의 포옹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는 거더라?’

분명 오늘 낮에 어머니, 아버지와 포옹을 나누었던 에델라였다. 하지만 테라비스와 포옹을 하려고 하자 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단 손을 들어 올리기는 했지만, 그 손을 테라비스의 위로 올려야 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그의 팔 아래로 끼워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살짝 상체를 숙였지만, 아직도 팔은 어중간한 상태였다.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드디어 테라비스도 에델라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응?”

일단 자신이 서 있으니 테라비스의 위로 자신의 팔을 얹기로 하고 팔을 뻗던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말에 멈칫했다. 이게 아닌가?

“설마 선 채로 포옹을 하려는 거야?”

이게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선 자세가 영 안 나올 것 같은데, 침실로 가는 게 어때?”

고개를 살짝 젖히며, 테라비스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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