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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잃어버린 원본 (28/92)

28화. 잃어버린 원본2021.08.06.

“아, 죄송해요. 제가 깜박했네요.”

마틴이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멍하니 있는 것을, 그의 결벽증 때문이라고 오해한 로즈는 얼른 손을 거둬들였다. 그날 이후로 마틴과 마주치면 실수로라도 그에게 닿지 않으려고 노력한 로즈였다. 최대한 그와 거리를 두고, 혹시라도 제 손이 제멋대로 움직일까 봐 주머니에 넣거나 열중쉬어 자세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마틴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그를 일으켜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녀의 동료들이 전투 후에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대련 중에 그녀가 때려눕힌 상대방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노 터치. 돈 터치.”

로즈는 이전에 마틴에게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안 잊었습니다.”

이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로즈는 뒤돌아섰다.

“사모님, 괜찮으세요?”

마차에서 내리는 에델라를 보며 로즈가 소리치자, 창백한 안색으로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우리 거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전을 주우며, 로즈가 말하자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혹시나 서류 봉투도 떨어져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요행은 마틴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강도가 바닥에 떨어뜨리고 간 것은 중요한 안다비아 서류가 아니라 에델라와 마틴을 위협하는 데 썼던 칼이었다. 로즈는 자신의 검은 검집에 집어넣고, 대신 강도가 떨어뜨리고 간 칼을 집어 들었다.

“흠…… 싸구려네요.”

칼을 살펴보던 로즈가 마틴을 보며 말했다.

“거기다가 새것 같고요.”

아무 장식도 없고, 쓴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는 칼을 보며 로즈는 덧붙였다. 아무래도 제가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도가 손에 꽂은 채 달아나버린 자신의 검은 비싼 것인데다가, 잘 손질해둔 단도였다. 거기다 충분히 손에 익을 만큼 사용한 물건이기도 했다. 가끔 오늘처럼 비상시에는 던지는 용으로 쓰기 때문에 장검보다는 덜 비싼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싸구려는 아니었다.

‘이걸로는 대신 쓰지 못 하겠으니, 새로 사야겠네.’

못내 아쉬워서 로즈는 입맛을 다셨다. 붉은바람 상단에서 제법 두둑한 월 보수를 지급하기 때문에 단검을 하나 산다고 해도 손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지 못한 지출이 생길 것 같아 속이 쓰라렸다.

“아무래도 이걸로 누군지 밝혀내지는 못할 것 같은데, 없어진 것이 혹시 있나요?”

“서류요.”

“서류요?”

“네. 안다비아 교역 건의 서류를 훔쳐 갔어요.”

“그걸 찾을 수 있으려나?”

로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델라의 가방이나 귀금속이라면 주변의 전당포 같은 곳을 찾아보거나 하겠지만, 서류를 어디서 찾아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안에 현금이 들어 있을 거로 생각했나?”

로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툼한 서류 봉투라면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온 것으로 생각할 법도 했지만, 그런 것을 노린 소매치기라면 보통 은행 앞에서 잠복할 것이다. 이런 상가 거리가 아니라.

“일단, 단장님께 보고드리는 게 좋겠네요. 사모님도 많이 놀라신 것 같고, 손도 좀 다친 것 같아요.”

여전히 창백한 안색과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는 에델라를 쳐다보며 로즈가 말했다. 로즈와 눈이 마주치자, 에델라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미소 지으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창백한 에델라를 보며, 마틴도 고개를 끄덕였다.

“…….”

“…….”

“저기, 부단장님?”

“네.”

“일어나셔야 가죠?”

그제야 마틴은 자신이 아직도 땅바닥에 앉은 상태로 로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잊고 있을 만큼, 마틴은 갑자기 나타난 강도와 또 그에게 서류를 뺏긴 사실로 얼이 빠져 있었다.

“아! 그래요. 그렇죠.”

마틴은 황급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마틴을 보며 로즈 역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으억!”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마틴은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다시 풀썩, 엉덩이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말았다. 다리에 힘을 주자 엄청난 아픔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단장님?”

마틴이 다시 바닥에 주저앉아버리자, 에델라에게 가려고 몸을 돌렸던 로즈가 당황해서 다시 몸을 돌리며 마틴을 불렀다.

“어디 다치셨어요?”

“발목이 아픈데요.”

“발목요?”

마틴의 말에 로즈가 그의 다리 쪽에 무릎을 굽혀 쪼그리고 앉았다.

“잠깐 실례할게요. 바지는 어쩔 수 없이 제가 잡아야겠지만, 부단장님에게는 닿지 않게 조심할게요.”

이 상황에서도 로즈는 마틴의 결벽증을 존중해 손끝으로 살짝 그의 바짓단의 끝을 붙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음…… 둘 중 하나인 것 같네요.”

마틴의 심하게 부은 발목을 본 로즈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용병 일을 하며 자주 보았던 상태였다.

“둘 중의 하나라뇨?”

하지만 평생 사무직만 해온 마틴은 지금 자신의 다리가 어떤지 알지 못했다. 고개를 쭉 빼고 보면, 그저 보통 때보다 부어 보일 뿐이었다.

“삐었거나, 부러졌거나.”

활짝 웃으면서 로즈는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틴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남의 다리가 부려졌다는 말을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말하는 사람은 아마 로즈 에몬테밖에 없으리라.

“걱정하지 말아요. 자르지는 않아도 될 거예요.”

“자른다니요? 제 다리를 말입니까?”

마틴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아마도?”

힐끗, 마틴의 다리를 한 번 더 보며 로즈는 애매하게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표정만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해맑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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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일이야?”

단장실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보고 테라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즈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에델라는 창백한 안색에 주먹을 쥔 한쪽 손에 언뜻 피 같은 것이 보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틴이었다. 늘 깔끔하기 그지없던 옷은 흙투성이인 데다가, 남에게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로즈의 어깨에 제 팔을 둘러 찰싹 붙어 있었다. 테라비스는 그 광경이 얼마나 놀라웠던지, 마틴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말하자면 깁니다.”

세 사람을 대표해서 입을 연 것은 마틴이었다.

“긴 건 나중에 천천히 듣고, 요약해서 말해 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

“네.”

“지갑을 그냥 줘버리지, 그랬어. 몸을 다칠 바에는 그게 낫지.”

“노린 게 지갑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서류를 빼앗겼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마틴이 말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서류인지 잘 아는 그는, 서류를 빼앗긴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 잘 들고 있었어야 했는데……. 부단장님께서 들고 가겠다고 하셨을 때, 그냥 드렸으면 그렇게 뺏기지 않았을 거예요.”

에델라 역시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단 안으로 들어오면서 마틴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서류의 내용을 혹시 외우고 계시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었다. 하지만 에델라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똑똑한 에델라이긴 했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번역하며 어느 정도 개요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수십 장이나 되는 서류의 내용을 다 외우고 있을 리 없었다. 마틴 역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절실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강도를 당했는데 피해자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어찌나 흥분했던지, 테라비스는 사람들 앞에서 에델라에게 존댓말을 하기로 한 것도 잊고 있었다.

“몸은 괜찮은 건가, 다들? 괜찮아요, 에델라?”

뒤에 그것을 깨달은 테라비스는 얼른 말을 돌렸다,

“사모님께서 손을 다치셨습니다.”

“전 괜찮아요. 그냥 봉투에 손을 조금 베인 것뿐이에요. 저보다는 부단장님이 많이 다치셨죠.”

마틴의 말에 에델라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일단 병원으로 가야겠군. 마차는? 밖에 있나?”

“네, 단장님.”

“그래. 그럼 바로 병원으로 가도록 하지.”

“서류는 서류대로 빼앗기고, 몸은 몸대로 다쳐서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고개를 떨구며 마틴이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에델라와 로즈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서류인데…….”

“이미 없어진 것을 뭐 어떻게 하겠어?”

“며칠 뒤에 안다비아 사람들이 올 텐데, 어떻게 협상해야 할지 막막하군요. 아니, 그들과 협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강도를 당한 상단이라니 신뢰도가 바닥이 될 텐데요.”

붉은바람 상단이 안다비아와의 교역 거래에 성공할 것 같아 보이자, 하이에나 같은 무리가 어떻게든 그것을 채어가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안다비아에서는 붉은바람 상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른 이들로 골라잡을 수 있었다.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걸 말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없으면 제대로 된 협상도, 계약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준비가 철저하지 못하면 그 역시 신뢰를 잃을 테니, 거래 성사가 어려울 겁니다.”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하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해보자고.”

“원본 서류 없이 뭘 어떻게 열심히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거래는 파투나고 말 겁니다.”

평소 테라비스가 매우 긍정적인 사람이긴 했지만, 이 문제는 그저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그걸 아는 마틴은 고개를 내저으며 비관적으로 말했다. 붉은바람 상단이 잘 굴러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둘이 서로의 극단에 있어서였다. 낙관론자인 테라비스가 상단의 목표를 제시하고,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러면 비관론자인 마틴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그리하여 성공하면 높은 이윤을 냈고, 실패해도 낮은 손실로 막을 수 있었다.

“그게 계약서도 아닌데, 꼭 원본일 필요는 없지 않나?”

“꼭 원본일 필요는 없지만, 따로 복사본도 없지 않습니까?”

“복사본은 없지만, 그 비슷한 것은 있지.”

“네?”

테라비스의 말에 마틴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자신이 알기론 안다비아 서류는 따로 옮겨적은 복사본이 없었다. 에델라가 번역을 마치면, 번역본을 복사본으로 만들어놓을 생각이었다.

“저 모르게 안다비아 서류를 옮겨적어 놓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까도 말했지만, 복사본은 없어. 하지만 그 비슷한 게 있지.”

테라비스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을 열어 서류 묶음을 하나 가지고 돌아왔다.

“아! 그건…….”

“맞아. 처음에 우리가 맡겼던 서류야.”

에델라가 번역하기 전, 안다비아어를 안다고 했던 사람에게 맡긴 그 서류였다. 해석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빈칸이 많았던.

“워낙 빈칸이 많다 보니, 그가 해석하지 못한 부분을 표시해주기 위해서 윗줄에는 안다비아어를, 아래에는 제국어로 번역한 내용을 적었고, 미처 해석하지 못한 안다비아어는 동그라미로 표시를 해주었지. ”

“맞아요! 제가 처음 읽은 것도 그 서류였어요! 그래서 원두를 콩으로 번역한 것을 바로 알아보았죠.”

에델라 역시 그것을 기억해냈다.

“일을 처음부터 다시, 더 빠르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한번 봤던 거라서 처음보다는 빨리 될 거예요. 사전도 가지고 왔고요.”

“좋아. 그럼 문제는 다 해결된 것 같은데?”

테라비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 자네 다리만 빼고.”

그가 덧붙인 말에 방 안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마틴의 다리로 향했다. 그의 다리는 가엾게도 이전보다 더욱 부어 있었다.

“이제 병원으로 가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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