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위험한 순간2021.08.02.
“아, 도착했군요.”
마차가 멈춰 선 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마틴이었다. 대체 테라비스가 왜 그랬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에델라는 그의 말에 비로소 마차가 붉은바람 상단 앞에 멈춰 선 것을 알았다.
“서류와 사전을 제가 들도록 하겠습니다. 사모님께선 천천히 내리시죠.”
“아녜요. 하나는 제가 들게요.”
“아닙니다.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요.”
“별로 무겁지 않으니, 제가 들게요.”
마틴은 조금 당황했다. 유순해 보이던 에델라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것도 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는데도 완강히 거절하고 있었다. 에델라는 에델라대로 마틴이 별로 무겁지도 않은 것을 꼭 들어주겠다고 해서 당황하고 있었다. 애초에 에델라에게 마틴은 그리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편한 관계가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 공대와 하대의 선택이 곤란했을 정도였다. 평민이기는 하나, 일단 남편인 테라비스의 회사 동료였고, 일반 직원이 아닌 부단장이라는 직책이 있는 마틴에게 결국 공대를 선택한 에델라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마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럼, 사모님께서 가벼운 서류를 드시지요. 저는 사전과 이 짐을 들겠습니다.”
마틴은 웃으면서 방금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사전 꾸러미와 마차에 실린 짐을 각각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마틴은 자신의 두 손에 짐을 듦으로 해서 빈손이 없게끔 했다. 그래서 마차에서 내리는 에델라를 그저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을 예정이었다. 신사도를 발휘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에스코트하지 않고, 그저 빙긋이 웃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에델라를 기다려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 그건 그냥 놔두시면 돼요.”
“네?”
“집에 가지고 갈 것이거든요. 그대로 마차에 두시면 되세요.”
“그렇……군요.”
마틴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둘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결벽증이라고 에델라에게 밝히거나, 마차에서 내리는 여성을 에스코트도 해주지 않는 무례한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마틴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고민이었다.
“제가 먼저 내릴까요?”
마틴이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자, 에델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마틴은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의 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그러시죠!”
놓칠 수 없었다. 마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여운 마틴. 흔들리는 마차에서 서류를 봐서 어지러운가 봐.’
에델라는 마틴이 멀미를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곤, 그가 천천히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에델라가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골목에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스윽 나타났다. 그리고 에델라의 두 다리가 온전히 밖으로 나온 순간, 그 그림자는 매우 빠른 속도로 그녀의 쪽으로 달려오더니 에델라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번개같이 낚아챘다.
“앗!”
에델라는 거의 본능적으로 손을 움켜쥐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는 이미 그 남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뒤였고, 대신 남은 것은 서류 봉투가 빠져나가며 남긴 상처와 피였다.
“도, 도둑이야!”
날카로운 아픔과 손의 허전함을 동시에 느끼며 에델라가 소리쳤다.
“사모님!”
그리고 마틴 역시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두 사람의 외침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에델라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지만,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마틴이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얼른 에델라의 앞에 나서서 제 손으로 그녀를 가리려고 애를 썼다. 고개를 돌려 방금 도망친 남자 쪽을 쳐다보자, 그도 달아나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체크무늬 모자 아래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매부리코, 그리고 야비해 보이는 얇은 입술이 선명하게 마틴의 눈에 새겨졌다. 도둑을 쫓아야 할지, 아니면 다친 것 같은 에델라를 보호해야 할지 마틴은 순간적으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보기에는 그저 소매치기인 것 같았지만, 어디서 패거리가 또 튀어나올지 몰랐다.
‘제길!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
결국 마틴이 선택한 쪽은 에델라였다.
“거기 서!”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마틴은 도둑을 향해서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순간.
“응?”
물건을 훔친 그 도둑이 정말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마치 마틴의 말에 순순히 복종하는 것처럼. 서란다고 서는 도둑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마틴도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는 순간, 그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칼이었다.
“이런.”
마틴의 입에서 저절로 낭패 어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더욱 나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차에 다시 타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틴은 강도에게서 눈을 고정한 채, 자신의 뒤편에 아직 서 있는 에델라에게 말했다. 힐끗, 마부석을 보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에델라가 마차에 타면 얼른 출발하라고 소리를 칠 참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자신도 같이 타서 이 자리를 함께 빠져나가면 더 좋았다.
‘제길!’
하지만 자신은 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마틴은 알고 있었다. 그의 눈은 강도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칼을 든 손이 아니라, 에델라에게서 빼앗은 서류 봉투를 들고 있는 손을. 안다비아와의 교역에 꼭 필요한 서류였다. 게다가 하나뿐인 원본이었다. 이렇게 빼앗길 수 없었다.
“음?”
어떻게 하면 저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강도의 눈치를 보고 있던 마틴은 그 역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쪽의 손에는 서류 봉투를 쥔 그가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면서 마틴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마틴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종이에 싼 사전을.
‘이걸 왜?’
그제야 마틴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테라비스의 마차는 제법 비싸고 큰 마차였다. 말하자면 돈이 좀 있는 사람이 탈법한 마차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린 에델라 역시, 귀부인처럼 보였다. 돈을 좀 가지고 있을 듯한. 그러니 소매치기범이 이 마차에 탄 에델라를 노린 것은 직업적 선택 상 온당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정작 훔친 것은 서류 봉투였다. 달리 하녀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에델라는 가방을 스스로 들고 있었다. 진짜 소매치기범이라면 당연히 그녀의 가방을 노려야 했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갈색의 서류 봉투가 아니라.
‘아니. 뭐가 들어 있는지 알아서 노린 건가?’
마틴의 머릿속에 번뜩 그 생각이 들었다.
“부단장님!”
에델라의 목소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던 마틴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어느새 그 소매치기가, 아니 강도가 마틴의 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크윽!”
번뜩이는 칼날이 위협적으로 마틴의 코앞을 지나쳤다. 얼른 뒤로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마틴의 코가 2개가 되었으리라.
“출발하십시오!”
“안 돼요! 부단장님도 타셔야죠!”
“제길! 얼른 출발……!!”
마틴의 두 번째 외침은 그 끝을 맺지 못했다. 이번에는 마틴의 옆구리를 노리며 강도가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마틴은 허겁지겁 옆으로 몸을 피하려다가 마차의 바퀴에 발이 걸리며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평소 마틴이 가장 싫어하고, 불결하게 생각하는 땅바닥이었음에도 지금의 그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넘어질 때 바닥을 짚은 흙투성이의 손도, 수많은 세균과 박테리아가 있는 흙바닥에 닿은 엉덩이와 다리도 아니었다. 자신이 넘어지면서 놓친, 사전이 담긴 꾸러미였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것은 마틴만이 아니었다. 강도 역시,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헉!”
마틴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것을 주우려고 했다. 다행히 마틴에게 훨씬 가까운 위치였다. 아니, 불행히도 마틴에게 가까운 위치였다. 자신보다 마틴이 먼저 그것을 주울 것으로 보이자, 강도는 마틴을 먼저 무력화시킨 다음에 천천히 그것을 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는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서류 봉투로 빈손이 없는 처지였다. 칼로 마틴을 찌르고, 그의 몸에 칼을 꽂아놓은 채 손을 놓으면, 빈손으로 여유롭게 저것을 주울 수 있었다.
“헉!”
그리고 칼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 마틴도 그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칼날에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이는 순간, 마틴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제기랄! 우리 이사벨라는 어떻게 하지!’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마틴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의 반려뱀이었다. 가여운 이사벨라는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와 먹이를 주고, 말을 걸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윽!”
날카로운 칼이 여린 사람의 피부를 가르자, 피와 함께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틴이 아니라, 강도의 입에서.
“어?”
엉뚱한 데서 나온 신음에 당황한 마틴이 얼른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단도에 손을 꿰뚫린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강도의 모습이었다. 야비하다고 생각했던 얇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는 마틴의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겁지겁 마틴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쳐다보았다.
“부단장님!”
자신을 부르며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긴 장검을 들고서.
“에몬테 님?”
그게 누구인지 마틴이 알아본 순간, 그 부름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그녀가 날았다. 로즈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볍게 마틴을 뛰어넘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마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즈를 따라서 돌아갔다.
‘눈부셔.’
땅바닥에 누운 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오른 로즈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태양이 마치 로즈의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인상을 쓴 채, 매서운 눈으로 앞을 쏘아보고 있는 로즈의 모습은 흡사 전쟁의 신처럼 보였다. 약한 자를 보호하고, 악한 자를 무찌르는 정의로운 신. 마틴의 앞으로 로즈가 가볍게 착지하자, 이제 마틴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녀의 등이었다.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마틴을 지켜줄 것만 같은 단단하고, 듬직한 등.
“괜찮아요, 부단장님?”
로즈의 목소리에 마틴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고 있었는데. 로즈가 고개를 돌려 마틴을 쳐다본 것은, 그녀가 날린 단검에 의해 손에 관통상을 입은 강도가 멀리 달아나버려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도, 자신이 쫓을 수도 없다고 판단을 내린 뒤였다.
“괜찮으세요?”
한 번 더 마틴에게 물으며, 로즈는 아직 넘어져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자신이 왔으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입술에 머금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 강해 보였던 로즈가 강렬한 태양이라면, 지금의 로즈는 따사로운 햇살 같았다, 그리고 마틴은 땅바닥에 누운 채, 그저 멍하니 로즈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