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안녕2021.07.30.
사랑하는 에델라. 오늘 아버지께 너희 집에 큰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지 않아서 나는 더 걱정돼. 괜찮니, 에델라? 아니, 괜찮지 않을 것 같아. 당장 루젠타로 달려가고 싶어. 그래서 네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 우리의 이 먼 거리가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에델라. 나의 에델라. 나의 작고 귀여운 신부님. 조금만 기다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루젠타로 갈 테니까. PS. 울지 말고, 기다려줘. * * * 친애하는 샤를에게. 샤를!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나는 지금 무섭고 두려워. 집에 무서운 사람들이 찾아왔어. 그리고 아빠에게 돈을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어. 아빠가 외삼촌을 도와주기 위해 서 보증이라는 것을 해줬대.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닌데 아빠에게 마구 화를 내고 있어. 그리고 집에 있는 가구나 그릇을 마구 가져가고 있어. 내 옷장도, 내 침대도, 내 서랍장도 그 아저씨들이 다 가져버렸어. 난 이제 드레스도 모자도 구두도 없고, 인형 친구들도 없어. 엄마와 나는 무서워서 서로 꼭 껴안아 주었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서웠어. 미안해, 샤를. 나는 너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어. 나는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울어버렸어. 지금도 그 아저씨들이 또 찾아올까 봐 무서워. 네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어. 나는 네가 필요해, 샤를. PS. 내가 울보라서 이제 내가 싫어진 것은 아니겠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에델라는 초조하게 편지를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안다비아와 루젠타 사이를 배가 두 번이나 오가는 동안에도 샤를의 편지는 예로니아 저택에 당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델라는 다른 편지를 하나 받았다. 그것은 예로니아 백작에게 온 편지였지만, 에델라의 편지이기도 했다. 친애하는 예로니아 백작님. 귀 가문에 생긴 일에 대해서 먼저 위로를 보냅니다. 부디 잘 해결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귀하의 딸 에델라와 저의 아들인 샤를리안 사이에 있었던 약혼을 파기하고자 합니다. 아직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어른들이 성급하게 정한 것이 아닌가 싶어 계속 마음에 걸리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백작님께서도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동의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귀 가문의 앞날이 평온하기를 바랍니다.
“거짓말이에요!”
에델라는 눈물과 함께 소리쳤다. 울음 섞인 딸 아이의 외침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 역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샤를이 그럴 리가 없어요! 샤를은 항상 내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내 작고 귀여운 신부님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에델라. 그 샤를의 편지도 이제는 오지 않잖아.”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내뱉은 송곳 같은 사실이 어린 에델라의 가슴을 찔렀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눈물은 샘솟았다.
“왜요? 이제 예쁜 드레스도 없고, 예쁜 모자도 없어서, 내가 못난이 같아서 싫대요?”
“에델라.”
“아니면, 에델라가 울보라서 싫대요? 샤를이 아기같이 우는 애는 싫대요?”
“에델라.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단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샤를은 제가 싫대요?”
“샤를도 네가 싫어진 건 아닐 거야.”
“하지만, 하지만, 샤를이 답장하지 않잖아요. 에델라를 보러 오지 않잖아요.”
다시 에델라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에델라.”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은 없었지만, 그 이름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어린 에델라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샤를의 편지가 더는 오지 않을 때부터, 에델라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샤를과의 인연이 여기서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아서 계속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엄마!”
에델라는 그대로 엄마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래. 아가. 괜찮아.”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들썩이는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가슴 언저리를 젖게 만들고 있는 것이 에델라의 눈물인지, 어린 딸이 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가슴이 찢어지는 어미의 피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싫어!”
상처받은 어린 목소리가 소리쳤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을 거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프고, 아팠다.
“결혼 같은 것, 정말 싫어!”
* * *
“어렸었지.”
말린 꽃반지가 이끄는 꿈같은 과거에 잠겨 있던 에델라는 자신의 중얼거림에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다 과거의 일이야.”
고개를 흔드는 에델라의 몸짓은 과거의 흔적을 떨쳐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설렘도, 과거의 아픔도, 전부 과거의 것이었다.
“사전도 찾았으니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어.”
마차가 오기로 한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음식을 가지고 온 바구니도 정리해야 하고 부모님과 인사도 해야 했다. 다시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조금 긴 작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에델라는 자신이 말린 꽃반지를 아직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납작 눌린 꽃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미 빛바래 있었고, 금세라도 바스러질 듯 메말라 있었다.
“…….”
에델라는 말없이 창문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따스한 오후의 햇볕이 쏟아져 내렸다. 돌볼 여력이 없는 예로니아 저택 정원의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와 꽃, 그리고 잡초들의 냄새가 늦은 봄인 듯, 초여름인 듯, 에델라를 헷갈리게 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과거의 봄과 미래의 여름이 만나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현재인 것처럼.
“안녕.”
에델라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나풀거리며 아래로 떨어지던 말린 꽃반지는 어느 순간 부는 바람에 몸을 싣더니,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 * * 에델라는 마차 안에 있는 뜻밖의 얼굴에 살짝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깍듯한 마틴의 인사에 에델라는 이내 미소와 함께 묵례를 건넸다.
“부단장님께서 어쩐 일이세요?”
마차에 오른 에델라의 질문에 마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저도 자신이 여기 있을지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단장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모양이죠?”
“네.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어요.”
“안다비아 서류의 번역을 거의 다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초벌 번역은 다 된 상태인데, 모르는 단어들 때문에 조금 더 살펴야 해요. 그래서 오늘 사전을 가지러 온 거였고요.”
에델라는 옆자리에 놓인 두꺼운 사전을 싼 종이 꾸러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래된 책인지라 몇 군데 뜯어지려는 부분이 있어, 낱장이 유실될까 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네. 그것도 들었습니다. 더 보완할 사항이 있는 것은 알지만, 일단 초벌 된 서류만이라도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사모님께서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물론이죠.”
에델라는 챙겨온 서류를 마틴에게 내밀었다. 예로니아 저택에서 사전을 챙겨와 붉은바람 상단에 가서 잠시 일을 할 생각으로 챙겨온 것이었다. 모르는 단어들을 찾고, 문장을 매끄럽게 고치는 일이 빨리 끝나면, 바로 상단에 서류를 넘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감사합니다.”
마틴은 에델라에게서 서류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안경을 한번 추켜 올리고,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마차가 경사진 예로니아 저택 진입로를 내려가느라 몸이 기우뚱했지만, 마틴은 전혀 미동도 없이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델라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지금의 마틴은 매우 심각해 보였고, 서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굳이 글을 읽을 만큼 급해 보였다.
“저기!”
마틴이 한 페이지를 다 읽고 난 뒤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서 잠시 서류에 눈을 뗀 순간, 에델라가 급하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마침내 마틴이 고개를 들고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그 서류요, 급한 것이었나요?”
“네.”
에델라의 질문에 마틴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에델라는 당황했다. 테라비스는 분명 괜찮다고 했었다. 어차피 밥은 먹으면서 일을 해야 하니,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차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라고 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마틴이 조금이라도 빨리 서류를 확인하기 위해서 아직 번역도 끝나지 않은 것을 보러 올 정도로 급한 것이었다.
“곧 안다비아에서 사람이 올 예정이거든요. 그 전에 검토를 끝내야 하니까요. 아, 서류가 하나 더 있는 건 아시죠?”
“네. 그건 들었어요. 안 그래도 오늘 상단에 가면 그 서류를 받아오려 했어요.”
“지금 번역하고 계신 것은 전반적인 자료들이라서 양이 제법 되지만, 남은 서류는 그쪽의 요구사항을 담은 계약서류라 장수는 이것보다 적을 겁니다. 아! 그리고 저희 쪽 서류를 안다비아어로 작성하는 것도 가능하실까요?”
“네.”
“그럼 그것도 부탁드려야겠군요. 아직 내부에서도 조율할 부분이 좀 남아 있긴 한데, 되도록 빨리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한 모양이 일의 순서나 서류의 동선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다비아에서 사람이 언제 오는데요?”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출발한 날짜가 있으니, 아마 3~4일 뒤쯤에 도착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네? 그렇게 빨리요?”
“그래서 급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마틴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에델라에게 말한 대로, 시간은 촉박했다. 에델라가 번역한 서류를 토대로 자신들이 임시로 정해놓은 계약사항들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었고, 안다비아 쪽의 서류를 빨리 번역해야 그들의 구체적인 계약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둘을 교차로 확인해야 하는 것도 마틴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였다. 이전에 테라비스와 자신이 직접 안다비아에 방문해 대화로 나누었던 조건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지 역시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안다비아의 거래처 측이 루젠타에 당도하기 전에 끝내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다시 서류에 몰두하는 마틴을 더 붙잡아둘 수 없어, 에델라는 애꿎은 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급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더니, 일이 아주 급하잖아? 4일 뒤라니!’
에델라는 여유로운 말투로 예로니아 저택에서 식사하고 오라고 말했던, 오늘 아침의 테라비스를 떠올렸다.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레인이 갑자기 찾아왔을 때도, 그녀 때문에 녹초가 된 에델라에게 쉬라고 말했을 때도,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조금도 재촉하지 않았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