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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예로니아 저택 (23/92)

23화. 예로니아 저택2021.07.19.

“어머니!”

에델라는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용한 저택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마저도 반가웠다.

“에델라?”

부부침실의 문을 활짝 열자, 딸의 목소리에 설마 하며 엉거주춤 일어나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눈이 커다래지며 에델라의 이름을 불렀다.

“오! 내 딸!”

침대에 누워 있던 예로니아 백작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머니! 아버지!”

에델라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어머니를 껴안았다. 익숙한 품에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에델라는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참아 냈다.

“아버지.”

그리고 이어서 침대에 몸을 기울여 아버지를 안아드렸다. 어릴 적, 어린 에델라를 안아서 키우고, 번쩍 들어 올려서 웃게 해주었던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새 그녀가 안아주어야 할 만큼 작아져 있었다.

“어디, 얼굴 좀 보자꾸나.”

벌써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에델라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자 다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에델라는 꾹꾹 참아 냈다. 눈물 대신 에델라가 부모님들께 보여준 것은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좋아 보이는구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웃으면서 에델라에게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원래도 예뻤던 제 딸이었지만, 오늘은 더 예뻐 보였다. 화사한 새 옷 때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꼭 겉모습 때문은 아닐 수도 있었다. 화사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어여쁜 신부 화장을 했던 결혼식장에서의 에델라는 더없이 가련해 보였으니까.

“네. 테라비스가 잘해주거든요.”

“그래? 몰락 귀족이라고, 돈 없는 부인이라고 괄시하지는 않고?”

“전혀 안 그래요, 아버지.”

예로니아 백작의 말에 에델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식당에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먹으라고 하고, 새 옷도 사주었는걸요. 보세요.”

에델라는 보란 듯이 제 드레스 자락을 펼쳐 보였다.

“아! 같이 점심을 먹으라고 음식도 보내주었는데, 바구니를 현관에 두었네요. 얼른 가져와야겠어요. 근처에 그걸 훔쳐 갈 사람은 없겠지만요.”

“음식도 보내주었다고?”

“네.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근사한 냄새가 났어요. 맛있을 거예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침이야 먹었지.”

“하지만 곧 점심때잖아요.”

에델라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하는 식사였다. 여러 가지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먹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랜만이었다. 당연히 에델라는 기분이 좋았다. . . .

“어머, 이건!”

식사 후, 에델라가 내놓은 디저트를 보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쳤다.

“네. 녹스 할멈이 만든 푸딩이에요.”

어릴 적 에델라가 좋아했던 간식이 테라비스가 챙겨준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다. 예로니아 백작 내외도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물론, 테라비스가 그들의 취향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 것은 질색인 자신도 녹스 할멈의 푸딩만은 좋아하기 때문에 혹시 만들어 둔 것이 있으면 챙기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녹스 할멈의 푸딩은 딱 적당히 달고, 고소했다. 누구나 좋아할 만큼.

“그리고 차도 있어요.”

그들이 주로 마셨던 싸구려 차가 아니었다. 아주 고급 차였다.

“향기가 좋구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 그리웠던 디저트를 앞에 두고, 오랜만에 차다운 차의 향기를 맡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마치 그리운 옛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로니아 가문이 멀쩡하고, 남편이 아프지 않고, 제 딸은 고생을 모르고 그저 해맑았던, 행복했던 그때로.

“…….”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예로니아 백작이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손을 잡았다. 잡은 손에서 애틋한 마음이 전해졌다.

“자, 드셔요.”

에델라는 무거워지려는 분위기에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두 분의 잔에 차를 따랐다. 진하게 우려낸 향긋한 차향이 방안 가득 퍼지자 다시 분위기는 훈훈하게 바뀌었다.

“그…… 사람이 다녀오라고 한 거니?”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예로니아 백작이 물었다. 평민의 신분을 가졌으니 ‘테라비스’라고 그냥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 듯했지만, 엄연히 딸과 결혼을 했으니 ‘사위’라고 불러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진짜 사위’는 아니니, ‘사위’는 맞지 않은 호칭 같았다. 커다란 상단의 단장이라고 듣긴 했지만, 거래처도 아닌데 ‘단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스웠다. 그렇다고 이런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그자’ 같은 호칭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국, 예로니아 백작은 애매한 인칭대명사로 테라비스를 지칭한 것이었다.

“겸사겸사요. 필요한 것이 있어서 들러야 했는데, 간 김에 함께 식사도 하고 시간도 보내고 오라고 했어요.”

“필요한 것?”

필요한 것이라는 말에 예로니아 백작 부인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부자라는 그의 집에 없는 것이 예로니아 저택에 있을 리 없다는 듯이.

“안다비아어 사전요. 테라비스의 상단이 그곳과의 교역을 추진 중인가 봐요. 그래서 그 일을 제가 조금 돕고 있어요. 덕분에 계약 외의 다른 돈도 조금 생길 것 같아요.”

“안다비아…….”

에델라의 말에 예로니아 백작은 신음처럼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때, 그 일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네가 이렇게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예로니아 백작 부인 역시 못내 안타깝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때 일 덕분에 제가 안다비아어를 배운 게 지금 쓸모가 있잖아요. 얼마나 다행이에요.”

에델라는 웃으면서 푸딩을 떠먹었다. 한입씩 사라지는 것이 아쉬울 만큼 푸딩은 맛있었다. 어쩌면, 부모님과 함께 먹는 추억의 음식이라서 그럴 수도 있었다. 마치 그녀의 행복한 과거를 재연한 것 같은 느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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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에델라는 서재에서 또 다른 자신의 과거를 마주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자, 오늘 에델라가 예로니아 저택을 찾아온 목적이었다.

“…….”

에델라는 조용히 안디비아어 사전을 책꽂이에서 꺼냈다. 습관처럼 두꺼운 사전의 페이지를 차르륵 넘기자, 그사이에 끼어 있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아!”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본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그녀의 또 다른 과거가 그곳에 있었다. 에델라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납작하게 접혀서 바싹 마른 꽃반지였다.  

“에델라.”

  희미한 목소리가 에델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린 에델라를 설레게 했고, 두근거리게 했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샤를.”

에델라의 입술에 희미한 목소리의 이름이 얹어졌다. 마치 주문처럼, 그 이름이 에델라를 과거로 데려갔다. * * *

“안녕, 에델라?”

낯선 아이가 낯선 억양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일곱 살의 어린 에델라는 깜짝 놀라 얼른 어머니의 치맛자락 뒤로 숨어버렸다. 어머니의 남색 치맛자락이 에델라의 시야에 가득 차자, 낯선 아이의 얼굴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에델라. 이러면 못써. 착하게 굴어야지?”

어머니의 말에도 에델라는 그녀의 치맛자락만 더 꼭 붙잡을 뿐이었다.

“미안해, 샤를리안. 에델라가 낯을 가려서.”

‘샤를리안?’

어머니가 언급한 이름이 에델라의 귀에 쏙 들어왔다. 샤를리안이라고 하면, 얼마 전에 에델라에게 편지를 쓴 그 아이였다. 저 먼 나라에 산다고 한, 그 아이. 에델라는 용기를 내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아까 그 낯선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에델라보다 조금 연한 빛을 띠는 백금발이었다. 그리고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는 맑은 초록색이었다. 분명 사용하는 단어가 어린애 같아서, 어린아이일 줄 알았던 샤를리안은 에델라보다 더 키가 크고, 서너 살은 더 많아 보였다.

“안녕, 에델라?”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다시 에델라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운 초록색의 눈동자가 웃었다.

“아, 안녕.”

한 점의 티끌도 보이지 않는 환한 웃음에 에델라는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 사실에 저도 놀라서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그런 에델라가 귀엽다는 듯이 소년은 다시 웃었다. 곱게 눈이 접히고, 하얀 이를 드러낸 미소가 그야말로 맑았다. . . .

“참 귀여운 아이들이네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엔젤로테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예로니아 저택 정원의 꽃밭에 앉아 있는 에델라와 자기 아들 샤를리안이 있었다. 안다비아에서 루젠타까지 오는 길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계절풍에 맞추어 순풍을 타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열흘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엔젤로테 가문이 가진 가장 큰 배였지만, 그녀가 지내는 저택에 비하면 보잘것없었고, 뱃멀미는 지옥 같았다. 남편과 아들이 없는 곳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저주의 말을 퍼부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시간이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루젠타라는 도시는 그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항구도시가 아니었다. 예로니아 백작 가문 역시도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것 같았다. 평소 집을 보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엔젤로테 부인은 예로니아 저택이 마음에 들었다. 루젠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의 저택은 아주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었고, 정원도 아주 잘 관리되어 있었다. 저택에 배치된 고가구들은 예로니아 백작 가가 아주 유서 깊은 가문임을 알 수 있었고, 곳곳에 있는 오브제나 꽃병, 그리고 초상화에서 단아한 품성을 엿볼 수 있었다.

“따님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그녀의 마음에 가장 들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집의 딸인 에델라였다. 안다비아에서 받아본 초상화보다 아이는 훨씬 귀엽고 예뻤다. 게다가 적당히 낯을 가리고, 수줍음을 타는 것이 그녀의 눈에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무엇보다도 에델라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작은 소녀가 무척 예의 발랐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로 말하는 자신을 살짝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꼭 한다는 것처럼, 작은 손으로 치마를 잡고 무릎을 굽혀 열심히 외운 듯한 인사를 건넸다. 서툰 안다비아어가 그렇게 귀엽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여보, 내 말을 잘 전하고 있어요?”

엔젤로테 백작 부인은 옆에 앉은 엔젤로테 백작에게 물었다.

“아, 그걸 전해야 하는 거였나?”

“당연하죠. 그래야 우리가 저 꼬마 천사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저쪽에서 알 수 있잖아요.”

“글쎄. 이미 저쪽에서도 알 것 같은데?”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야 당신이 예뻐죽겠다는 눈으로 저 아이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자신이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서 엔젤로테 백작 부인이 머쓱해 하는 순간, 엔젤로테 백작이 그녀의 팔꿈치를 톡톡 쳤다.

“그리고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남편의 말이 옳았다. 맞은편에는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더없이 훈훈한 미소를 띤 채, 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아이가 사이좋게 앉아 있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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