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콧노래2021.07.16.
올 때는 작은 가방 하나이던 그레인의 짐은 돌아가는 마차의 짐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또 올게!”
“또 오긴 뭘 와? 오지 마!”
그레인의 인사를 테라비스는 단칼에 잘라냈다.
“오빠 보러 오는 거 아니거든요? 에델라 언니 보러 올 거거든요? 언니, 나 또 와도 되죠?”
“물론이지. 언제든 환영이야.”
“역시, 역시!”
그레인은 에델라의 말에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손수건도 봤어요. 너무, 너무, 너무, 예뻤어요. 정말 고마워요!”
“별것 아니야.”
“별것 아니긴요. 자그만 꽃들이 내 이니셜에 콕콕 박혀 있는 게 얼마나 예뻤는데요! 학교 가서 자랑해야지~.”
그레인은 손에 힘을 주어, 이미 안고 있는 에델라를 더욱 꼭 껴안았다.
“언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요.”
에델라보다 키가 작은 그레인은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뭔가 포근하고, 향긋한 냄새였다.
“어제 산 향수 냄새는 아닌데? 뭐지? 뭐예요?”
킁킁거리는 코를 에델라에게 더욱더 들이대며 그레인이 물었다. 그리고 그레인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테라비스도 귀를 쫑긋 세웠다. 드디어 궁금했던 에델라의 비밀이 밝혀지는 건가 해서,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안 발랐는데. 비누 냄새인가?”
‘비누 냄새는 절대 아니라고!’
에델라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칠 뻔한 테라비스였다.
“그건 아닐걸요? 비누 냄새는 아닌데?”
다행히 그레인이 대신해서 에델라의 말을 부정해주었다.
“빨리 마차에 타. 기다리시잖아.”
결국, 에델라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테라비스는 제 할 일을 똑바로 하지 못한 그레인을 쫓아내려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에델라 언니, 편지할게요! 답장 꼭 해줘야 해요!!”
마치가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레인의 소란스러운 인사는 계속되었다. 마차의 창문에서 그레인의 얼굴과 손이 거두어진 것은, 마차가 아주 멀리 가버려 점이 되고 나서였다.
“드디어 갔군.”
한참 만에야 테라비스는 중얼거렸다.
“그레인 때문에 아주 귀찮았지?”
테라비스는 옆에 선 에델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면 이번 그레인의 방문으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에델라였다. 어제 거의 온종일 그레인이 끌고 다닌 사람은 에델라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테라비스는 그레인에게 평소보다 훨씬 덜 시달렸다고 볼 수 있었다.
“아니. 난 재미있었어.”
에델라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젯밤에 그레인과 함께해서 즐거웠다고 한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난 외동딸이라서 형제가 없잖아. 꼭 여동생이 생긴 기분이었어. 그리고 그레인은 귀엽잖아.”
“부탁인데 그레인 앞에서는 절대 그 말은 하지 마. 그러면 정말 자기가 귀여운 줄 알고, 온갖 귀여운 척을 다 하고 다닐 테니까.”
생각만 해도 오싹한 지 테라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레인을 엄청나게 귀여워하는 건 당신이잖아?”
“내가? 누굴? 오빠를 고작 돈줄로 여기는 저 소악마를?”
“응.”
테라비스는 이미 사라져버린 마차 쪽을 향해서 손가락질까지 하며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런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여동생을 원한다면, 기꺼이 그레인을 당신에게 양보하겠어. 아니, 양보가 아니라 그냥 줄게. 당신 가져.”
테라비스는 매우 단호하게 에델라에게 말했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계약서를 써주겠다는 듯이. 하지만 에델라는 그런 테라비스를 보며 그저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아까 마부에게 웃돈을 얹어준 사람은 누구였지?”
“그건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불렀는데도 흔쾌히 와준 것에 대한 답례지. 내가 상도덕이 좀 있는 장사꾼이거든.”
“그래? 그 웃돈을 주면서 하는 말을 내가 다 들었는데?”
“뭘 들었는데?”
저택의 안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에델라가 말하자, 테라비스는 황급히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과 말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아마 마부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고 했지?”
“그거는 그냥 인사지. 당신이 좋아하는 그 예의 말이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마차를 몰아주십사 부탁한다며 돈을 건네는 걸 내가 보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사회생활에선 그 정도의 센스는 있어야…….”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 마차를 쳐다보고 있던 사람은 또 누구더라?”
“…….”
마지막에 되받아치지 못한 쪽은 테라비스였다. 할 말이 없어졌는지 죄 없는 제 콧잔등만 구기고 있는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는 속으로 큭큭거리며 웃었다.
‘좋아하고 아끼면 그냥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될 텐데.’
그 말 역시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 소리 내 말을 해봤자, 테라비스는 절대 아니라며 펄쩍 뛰기만 할 테니까. 이제 테라비스에 대해서 좀 알 것 같기도 한 에델라였다. * * *
“예로니아 저택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막 입에 집어넣으려던 소시지를 도로 내려놓았다. 소시지를 먹으면서 말하면, 에델라가 질색할 테니까.
“왜? 예로니아 저택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안다비아어 사전이 필요해서. 중간중간 모르는 단어들이 좀 있더라고.”
교역용 서류이다 보니, 일상생활에서는 쓰지 않는 단어들이 제법 있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에델라가 어린 시절에 배웠던 언어라, 기억나지 않는 단어들도 있었다.
“예로니아 저택에는 사전도 있어?”
별 희한한 것이 다 있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말했지만, 속사정을 알고 나면 그리 신기해할 것도 아니었다. 예로부터 루젠타에 터를 잡고 수 대를 살았던,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이니만큼 예로니아 저택의 서재에는 양질의 장서들도 많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예로니아 저택을 쳐들어왔던 빚쟁이들은 귀금속이나 비싼 가구는 눈독을 들였지만, 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했다. 그래서 예로니아 백작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그들 몰래 조금씩 책들을 팔아서 생계에 보태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원하는 사람이 많은 책은 금방 비싼 값에 팔렸고, 그렇지 않은 책은 헐값에 팔리거나 계속 예로니아의 서재에 남아 있게 되었다. 교역은 끊기고, 여행하기에는 먼, 거기다가 배우기 어려운 안다비아어 사전을 찾는 사람은 없었고, 결국 끝까지 팔리지 못해서 아직 남아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루젠타에서 안다비아어 사전을 구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 책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지금의 에델라와 테라비스에게는 다행인 셈이었다.
“그럼 내가 나갈 때, 같이 나가도록 해. 내가 먼저 내려야겠군.”
머릿속으로 동선을 생각하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고마워.”
“됐어. 상단 일 때문에 필요한 건데.”
테라비스는 이제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다시 소시지를 입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다른 화제가 생각났다.
“백작님은 괜찮으셔?
“이제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별다른 일은 없는 것 같기는 해.”
사실, 에델라도 그게 궁금했다. 아버지의 병환에 차도는 좀 있는지,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시는지, 식사는 잘하고 계신 건지, 제 걱정에 눈물짓고 있지는 않으신지.
“한 번도 가보지 않았어?”
“……응.”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고 싶은 마음은 많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예로니아 저택은 같은 루젠타 안이긴 하지만, 걸어가기에는 먼 거리에 있었다. 저택에 한 대 있는 마차는 테라비스가 출퇴근을 할 때 항상 사용하고 있었고, 설사 마차가 더 있다고 하더라도 사적으로 테라비스의 재산에 손대고 싶지 않아 하는 에델라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차를 불러 타고 갈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에델라에게는 예로니아 저택까지 갈 교통수단이 없었다.
“흐음…….”
그리고 에델라의 숙인 얼굴에서 테라비스는 그녀의 사정을 쉽게 짐작했다.
“돌아올 마차는 오후에 보낼게. 저택에서 점심도 좀 먹고, 부모님과 밀린 이야기도 하고 돌아와.”
“번역하는 것, 급하다고 하지 않았어?”
에델라는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테라비스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룬다는 것이 에델라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당신도 밥은 먹으면서 일해야 하잖아. 여기서 먹든, 예로니아 저택에서 먹든.”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됐어. 예로니아 저택에서 점심을 먹도록 해. 부모님과 함께 차도 한잔 마시고. 아, 차는 좋아하시는 편이신가?”
“응. 아버지는 술은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차는 아주 좋아하셔.”
“잘됐네.”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말하는 사이에 식은 것인지 처음 먹으려고 했을 때만 해도 김이 모락모락 나던 소시지는 싸늘했다. 식은 소시지의 기름기가 입안에서 겉도는 것 같았지만, 테라비스는 개의치 않았다. 에델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저 씨익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입 안이 보이지 않도록 입은 꼭 다물고서. . . . 에델라는 어제 그레인과 샀던 옷 중에 하나를 골라 입었다. 새 옷을 입고가면, 제가 잘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부모님이 에델라에 대한 걱정을 훨씬 덜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에델라가 마차에 올랐을 때, 그것 말고도 훌륭한 증거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당신 점심.”
테라비스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건 에델라의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커다란 바구니에 빵이 한가득 담겨 있었고, 다른 하나는 뚜껑이 닫혀 있어서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빵 바구니보다 더 커다랬다.
“오랜만에 친정에 가서 어머니의 음식을 먹고 싶을 수도 있지만, 그 시간에 대화를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사실은 예로니아 저택에 변변찮은 음식이 있을까 싶어서 준비한 것이었지만, 테라비스는 굳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저렇게나 많이?”
확실히 3인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3인분이 아니라 3일 치 식량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뭐, 모자라는 것보다는 낫잖아?”
“고마워. 신경 써줘서.”
“별말씀을.”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가 출발했다. 테라비스는 무심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출근길의 풍경이 두 사람의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러다 힐끗, 테라비스가 에델라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바구니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에델라가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눈을 돌리기 전에, 테라비스는 얼른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날씨가 좋네.’
괜히 콧노래가 나올 만큼.
* * *
“크, 큰일 났습니다!”
오후에 출근한 하녀가 주방으로 들어오며 호들갑스럽게 소리쳤다.
“왜? 어디 불이라도 났어?”
설거지한 그릇을 닦던 다른 하녀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장 본 식료품이 다 없어졌어요! 도둑이 들었나 봐요! 바넬레오 님이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어제 재워둔 백립이 아주 통째로 없어졌어요! 거기다 엄청 귀하고 비싸다고 한 열대과일도 없어졌어요! 바넬레오 님도 아껴 드시는 캐비어도요!”
“난 또 뭐라고.”
하녀는 다시 무심히 설거지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도둑 든 것 아니니까, 빵 반죽이나 해.”
“빵 반죽요? 아침에 항상 하루 치를 다 하잖아요.”
“다 굽고 없어.”
“네?”
빵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백립이랑 열대과일도, 캐비어도, 전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