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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우리 오빠 어디가 좋아요? (21/92)

21화. 우리 오빠 어디가 좋아요?2021.07.12.

“아까 말한 오빠 일을 도와준다는 게 무슨 외국어 번역이라면서요?”

“아, 응.”

“그리고 언니 말고는 그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도시에 없다면서요. 그래서 꼭 언니가 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응. 맞아.”

“그럼 결론적으로 언니는 예쁘고, 똑똑한 데다가 귀족이기까지 한데, 왜 우리 오빠 같은 거랑 결혼 한 거예요?”

“오빠에게 같은 거라고 하면 못써.”

“그럼 우리 오빠 따위랑 왜 결혼 한 거예요?”

그레인이 다른 질문을 하자 얼른 대답했던 에델라는 그녀가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난감했다. 그래서 그레인의 말버릇을 지적하며 이야기를 돌리려고 했지만, 그레인은 순순히 에델라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에델라가 자신의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레인에게 사실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결심한 것이 불과 10분 전이었다.

“솔직히, 우리 오빠 성격 좀 이상하지 않아요? 옷 입는 건 진짜 이상하고.”

“아, 옷은 좀 그렇지.”

“좀 그런 게 아니죠! 같이 다니기 부끄러울 정도라고요!”

그레인은 악몽과도 같은 지난날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다가 얼마나 막말을 잘하는데요. 저한테 못난이라고 하는 거 보셨죠?”

“그래. 실례되는 말을 좀 잘하는 편이긴 하지.”

“그런데도 언니는 오빠랑 결혼했잖아요. 대체 우리 오빠 어디가 좋아요?”

‘돈.’

단 하나의 단어가 에델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테라비스의 장점, 장점, 장점!’

에델라는 필사적으로 돈이 아닌 테라비스의 다른 장점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우선 그는 잘생겼다. 그 이상한 옷만 입지 않으면 그럴싸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몸도 아주 근사했다. 그는 너른 어깨와 단단한 팔을 가지고 있었다. 가슴 역시 넓었고, 배는 선명하게 복근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아니다. 그의 동생에게 ‘네 오빠의 얼굴과 몸을 보고 결혼했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정숙한 숙녀인 에델라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소리였다.

“착해.”

“네?”

“그리고 다정해.”

“에엑?”

에델라가 내놓은 테라비스의 장점에 그레인은 거의 바퀴벌레가 사랑스럽다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아니, 그레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게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다정하고 착한 트레비스라니! 하지만 에델라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계약을 받아준 착한 사람이었고, 첫날밤을 주저하는 자신을 위해서 유예기간까지 준 다정한 사람이었다.

“오빠가 착하고 다정하다고요?”

그레인의 물음에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빠가 다정하고, 착해서 결혼을 결심한 거예요?”

‘아니, 돈.’

이번에도 진실한 대답을 꿀꺽 삼키는 에델라였다.

“든든하기도 하고.”

“든든요? 오빠가요?”

“응.”

“세상 가볍고, 경박한 사람이 우리 오빠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전 오빠랑 따로 살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같이 살았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절연했을 거예요. 엄마도 마찬가지고요.”

그레인의 말에 에델라는 애먼 미소를 띠었다. 테라비스의 성격은 그럴지언정, 그의 돈은 매우 든든했다. 그녀와의 계약 즉시 현금을 지불하고, 그 돈으로 아버지의 밀린 병원비와 약값을 댈 수 있을 정도로. 테라비스의 돈은 테라비스의 것이니, 그가 든든하다는 에델라의 말은 꼭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긴, 아무리 오빠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대하는 건 좀 다르겠죠.”

그레인의 말에 막 포크를 집으려던 에델라의 손이 멈칫했다. 자신이 아는 테라비스는 사실 그레인이 평가한 테라비스와 거의 비슷했다. 무례하고, 경박하고, 못 하는 말이 없는 사람. 그런 테라비스도 사랑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그녀에게는 다르게 대할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예의 바르게 굴고, 짜증을 내지도 않고, 말도 상냥하게 하겠지. 누군지 모를 그녀에게는 정말로 착하고, 다정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한테 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생각하자, 에델라는 괜히 섭섭해져서 마음이 쓰라렸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 그게 진짜인 것처럼 느껴져서 속상하기까지 했다.

“언니! 제가 잘할게요.”

갑자기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그레인 덕분에 에델라는 속상한 마음을 간신히 떨쳐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그레인에게 자신이 테라비스의 가짜 아내라는 것을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망나니 같은 울 오빠랑 결혼한 불쌍한 에델라 언니. 내가 잘 해줘야지!”

“그레인. 아까도 말했지만, 네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그럼, 언니는 정말 정말 테라비스 오빠가 좋은 거예요?”

“그래.”

“정말 우리 오빠 사랑하는 거예요?”

순간, 말문이 막힌 에델라였다. 테라비스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냐고 묻는 그레인의 말에는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랑은 그저 좋아한다는 것과 달랐다. 아무리 순진한 에델라라도 그 둘의 차이는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볍게 입에 올리기에는 에델라는 너무 성실했다. 설사 눈을 질끈 감고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해도, 거짓말은 금방 들통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레인에게 사실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

그래서 에델라가 택한 것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떨리는 입술에 힘을 꽉 주고, 그레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 그저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언니!”

그레인이 에델라의 손을 꽉 쥐었다.

‘들켰나?’

순간, 아찔함이 에델라의 전신을 휘감았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해달라고?

“너무 귀엽잖아!”

그레인은 에델라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손만큼이나 에델라의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 지금 얼굴 빨개진 것 알아요? 아, 진짜 예쁘고, 똑똑하고, 우아한데 귀엽기까지 해요? 진짜 다 가졌네!”

그레인의 말에 에델라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졌다. 조금 따끈한 것 같기도 했다.

“아, 진짜 우리 오빠한테는 너무 아깝다. 내가 언니를 먼저 알았으면, 오빠 말고 다른 사람 소개해줬을 텐데.”

“아, 아니. 난 괜찮아.”

“그렇겠죠.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오빠를 좋아하니까요.”

“그, 그게…….”

아니라고 말해도 되나?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로 생각하는 게 더 낫겠지?

“그래. 맞아.”

결국, 에델라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새언니한테 잘해, 오빠!”

“대체 뭘 온종일 언니한테 잘하라고 하는 거야!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

안 그래도 쇼핑 상자들로 발 디딜 틈 없는 복도를 보며 짜증을 냈던 테라비스는 저녁 식사 내내, 차를 마시면서, 또 집으로 배송된 산더미 같은 상자들을 뜯으면서, 새언니에게 잘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대는 그레인 때문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물론, 그레인은 테라비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손님방에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지만.

“도대체 애를 뭘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그냥 같이 쇼핑하고, 차 마시고, 머리를 했어.”

침실에 들어온 에델라는 어제 테라비스의 소매 단추를 달아주었던 바느질함을 다시 꺼내며 대답했다.

“고작 그거 가지고 저 소악마가 그럴 리가 없는데?”

테라비스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렇게 해준 적 있어?”

“뭘?”

“같이 쇼핑하고, 차 마시고, 머리한 적.”

“그럴 리가 있겠어?”

테라비스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이 반응했다. 몇 시간이 걸리는 그레인과 모친의 쇼핑은 그를 질리게 했고, 혀가 녹을 듯이 단 디저트와 끝없는 수다는 튼튼한 테라비스도 지치게 했다. 여자들의 전용공간이나 다름없는 미용실은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그레인은 그런 게 하고 싶었나 봐.”

“자기가 늘 하던 건데 뭘 새삼스럽게 그게 하고 싶었다는 거야?”

“가족과 같이하는 건 처음이라고 하던걸? 그래서 좋았나 봐.”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은 지금 뭘 하려는 거야?”

잠잘 준비는 하지 않고 바느질을 하려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물었다. 오늘은 떨어진 단추도, 꿰맬 옷가지도 없었다.

“새로 산 손수건에 그레인의 이니셜을 수놓아줄까 해서.”

“뭐? 왜?”

“나도 오늘 즐거웠거든. 그래서 그레인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

그랬다. 자신은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고 말한 에델라였지만, 사실 이제껏 쇼핑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아서 좋아하는지 어떤지도 몰랐었다. 확실한 건, 그레인과 함께한 오늘이 즐거웠다는 것이었다. 예쁜 옷을 입어보고, 서로 품평해주고, 서로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주고, 또 그게 어울리면 함께 기뻐했다. 함께 먹었던 디저트도 맛있었고, 새로 한 머리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거기다 자신을 새언니라고 부르며 좋아해 주는 그레인이 귀엽고 고마웠다.

“그레인도 오늘 엄청 즐거워한 것 같으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그레인 덕분에 나도 엄청 즐거웠으니, 굳이 해주고 싶어.”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테라비스는 투덜거리며 먼저 침대에 누웠다. 지난번에 고작 옷 세 벌을 입어보는 것만으로도 피곤해했던 에델라였다. 그런데 오늘 온종일 그레인과 돌아다녔으니 분명 피곤할 텐데 굳이 수를 놓고 자겠다니.

‘하지만 저 고집쟁이가 내 말을 들을 리가 없겠지.’

침대에 누워 수를 놓고 있는 에델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설득하는 걸 빠르게 포기했다.

“그거, 오래 걸려?”

“아니. 금방 해.”

에델라는 그렇게 말했지만, 테라비스의 눈에는 개미 눈물만큼씩 손수건에 색이 자리 잡는 걸 보면 금방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금방 하긴 뭘 금방 해? 잠도 못 자고 밤새우겠네, 밤새우겠어.’

“아, 미안. 손을 먼저 잡을까? 그걸 먼저 해야 당신이 잘 수 있겠지?”

“됐어. 오늘은 그냥 쉬어.”

“뭐? 왜?”

“오늘 그레인이 한 말 못 들었어? 휴일에 일을 시키면 악덕 고용주라잖아.”

“하지만 우리 계약은 그것과는 다르잖아? 서로 합의 하에 한 계약이니, 네가 날 고용한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아, 좀 대충합시다!”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벌컥 화를 내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테라비스의 화에 에델라는 당황해서 수를 놓던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야?”

“내가 언제!”

여전히 버럭 화를 내며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말을 되받아쳤다.

“나도 오늘 피곤해. 그러니까 오늘 계약은 하루 쉬자. 오케이?”

“……알았어.”

결국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자마자 테라비스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누웠다.

“불 꺼줄까?”

“아, 됐어!”

마지막까지 테라비스는 버럭 화를 냈다.

‘눈 나빠질 일 있나, 불을 끄긴 뭘 꺼?’

괜히 속이 부글거려 빨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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