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무례의 정의2021.07.09.
자신을 노려보는 그레인의 눈빛을 받아내는 에델라의 입 안은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아리송했던 그레인의 태도가 싫어하는 쪽이라는 게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레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새언니라는 사람이 자기 오빠의 돈을 펑펑 써대고 있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
“그레인. 이건 약간의 오해가 있어.”
바싹 마른 입을 열어 에델라는 그레인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오해는 무슨 오해요? 이 드레스, 언니 것 아녜요?”
“그건 맞아.”
“이거 하나뿐인 거죠?”
“그래. 더 산 것은 없어.”
“그러니까 언니가 무례한 거죠. 어떻게 드레스를 하나만 살 수가 있어요? 이렇게 예쁜데? 당연히 색깔별로 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뭐?”
“아니. 가난했다면서요. 그러면 그동안 옷을 별로 못 샀을 것 아니야. 그럼 저런 졸부 물주를 잡았으면 당연히 드레스를 열 벌, 스무 벌을 샀어야지! 어떻게! 드레스를! 겨우! 이거 한 벌만 살 수가 있냐고요! 이건 드레스에 대한 완벽한 실례고, 엄청난 결례죠!”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어린 여동생에게 혼나고 있었다. 드레스를 달랑 한 벌만 산 죄로. 제 오빠를 홀랑 벗겨 먹지 않은 죄로.
“안 되겠어요. 지금 당장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가요.”
“뭐?”
“내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비누로 씻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지금 보니까 입고 있는 옷도 완전 촌스럽네! 미모에 가려져서 내가 미처 못 봤던 거잖아?”
대체 욕을 하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그레인의 화법에 에델라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자, 가요, 언니! 빨리 우리 오빠 돈을 흥청망청 쓰러 가자고요!”
“적당히 해, 그레인 바넬레오.”
그레인에게 손목이 잡힌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에델라를 구해낸 것은 테라비스였다. 봄날의 망아지처럼 날뛰는 그레인을 제압할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게다가 에델라는 오늘 바빠. 너랑 놀아줄 수 없어.”
“뭐? 왜 바쁜데?”
“똑똑한 에델라가 지금 내 일을 도와주고 있거든.”
“오늘은 주말이잖아, 이 악덕 고용주야! 휴일에 우리 언니 괴롭히지 마!”
에델라는 오늘 처음 본 그레인에게 벌써 ‘우리 언니’가 되어 있었다.
“오빠나 돈 벌어 오란 말이야! 언니랑 나랑 펑펑 쓰게!”
“에델라는 그렇다 치고, 넌 왜 내 돈을 펑펑 쓴다는 거야?”
“쓴다고 닳아? 오빠 돈이 내가 좀 쓴다고 닳을 정도냐고!”
“닳아! 닳아! 네가 쓰면 닳는다고!”
“좀 닳으면 어때서! 귀여운 동생한테 그 정도도 못 해줘?”
“귀여운 동생이면 해주지. 하지만 넌 못난이잖아!”
“내가 왜 못난이야! 오빠야말로 끔찍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 핫핑크 호피 셔츠를 입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야!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눈 썩는 줄 알았다고! 왜 동생 졸업식에 그따위 옷을 입고 오는 건데!”
에델라를 구해준 용감한 흑기사의 수준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결국 그레인과 똑같은 정신연령으로 둘은 툭탁거리고 있었다.
“이제 둘 다 그만하는 게 좋겠네요.”
그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은 에델라였다.
“그레인?”
“네, 언니! 나랑 쇼핑하러 갈 거죠?”
에델라가 제 이름을 먼저 부른 것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려고 한 것으로 생각한 그레인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난 쇼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네? 세상에 쇼핑을 안 좋아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여기.”
에델라의 대답에 그레인은 별 희한한 사람을 다 본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언니. 언니는 옷이 필요해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진짜 별로라고요. 화장품도 필요하고요. 드레스 한 벌에 구두 한 벌로는 부족하다고요!”
“구두?”
“네. 저기엔 구두가 들어 있던데요.”
그레인은 조금 전에 자신이 열었던 상자 중 작은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때 구두는 사지 않았는데?”
그레인의 말에 에델라는 상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 에델라가 산 것은 드레스 한 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레인이 말하는 걸 봐선, 저곳에 든 것은 여성용 구두인 게 틀림없었다.
“아, 그건 내가 산 거야.”
“뭐?”
“오빠가?”
한꺼번에 두 여자의 의아한 시선을 받은 테라비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옷을 입어보는 동안, 내가 골랐어요.”
테라비스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상자에서 구두를 꺼냈다. 다행히 테라비스가 고른 것치고는 매우 준수한 모양이었다. 고가의 비싼 리본만 보고 고른 것이었는데, 그것 외의 다른 장식은 없었던 덕분이었다.
“그날 신발까지 고르라고 하면, 분명히 거절했겠죠?”
드레스도 사지 않겠다고 했던 에델라였다. 자신의 체면을 봐서 새 드레스를 맞춰야 한다고 겨우 설득해서 드레스는 입게 했지만, 구두까지 사주겠다고 하면 에델라는 거절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냥 말하지 않고 산 것이었다.
“지금 신어 볼래요?”
“아니, 나는…….”
“맞춤이라서 환불은 안 돼요.”
에델라가 거절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테라비스는 얼른 덧붙였다.
“내 발 치수는 어떻게 알고요?”
“나야 모르죠. 하지만 가게 직원이 딱 보고 알던걸요.”
테라비스는 상자에서 구두를 꺼내 들었다.
“신어 봐요.”
그리고 구두의 주인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어휴, 오빠!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구두를 선물하는 거 아니야!”
“뭐? 왜?”
“구두를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말 몰라? 그러니까, 그건 나 줘!”
“헛소리하지 마.”
테라비스와 그레인이 툭탁거리는 와중에 에델라는 가만히 구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반짝, 새 구두였다. 어쩐지 자신이 신으면 안 될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신발에 달린 리본이 너무 예뻤다.
“손, 잡아줄까요?”
불쑥 에델라의 시야에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황급히 구두를 쳐다보고 있던 눈을 들자, 테라비스가 그녀의 앞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신어봐요, 언니! 어울릴 것 같아! 그리고 안 맞으면 내가 신을래!”
맞기를 바라는 건지, 맞지 않기를 바라는 건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그레인도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델라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며, 조용히 테라비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익숙한 감촉이었고, 익숙한 온도였다. 매일 매일 잡았던 그 손이 에델라를 부축했다.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아!”
옆에 서 있던 그레인이 감탄사를 내뱉았다.
“예쁘다!”
그리고 새 구두를 신은 에델라를 향해서 말했다. 구두가 예쁘다는 건지, 에델라가 예쁘다는 건지, 혹은 제 오빠 부부를 보고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전부 다일 수도 있었다.
* * *
“앗! 언니! 저기 가봤어요?”
에델라의 손을 잡아끌며 그레인이 물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는 카페였다.
“아니.”
“여기 스콘이 진짜! 맛있어요! 다리도 아픈데, 여기서 좀 쉬었다가 가요.”
에델라가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레인은 이미 카페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음~ 홍차랑 스콘이랑 케이크도 먹을까요?”
메뉴판을 보자 신이 나는지 그레인은 콧노래까지 불렀다.
“우리 엄청나게 걸었잖아요. 그러니까 열량 보충이 필요해요.”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그레인은 둘이 먹기에는 조금 많은 양을 시켰다. 그녀의 오늘 쇼핑이 그랬듯이 말이다. 테라비스와 그레인의 싸움에서 결국 이긴 쪽은 그레인이었다. 휴일에 직원도 아닌 사람을 부려 먹는 악덕 고용주 취급을 받자, 그는 에델라의 외출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귀한 남의 집 딸을 데리고 와서 달랑 비누 한 개만 던져준, 부인을 학대하는 남편 취급을 받자 돈주머니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에델라와 나온 그레인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쇼핑을 하고 있었다. 물론, 핑계는 에델라였지만 에델라의 옷만 사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사는 데 더 열심이었다. 에델라의 세안제를 하나 사면서 제 것도 하나, 에델라의 드레스를 두 벌 사면서, 제 것은 세 개쯤, 에델라의 모자를 하나 사면서 자기 모자도 두 개. 그레인의 쇼핑은 그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사양했던 에델라였지만, 그녀의 성향을 단박에 파악한 그레인이 ‘언니 남편 돈 쓰는 거 아닌데요? 우리 오빠 돈 쓰는 건데요?’ 하는 말에는 더 사양도 하지 못했다. 자기 친오빠 돈을 쓴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신은 진짜 부인도 아니고, 그저 계약 아내인데!
“너무 많이 산 게 아닐까?”
오늘 저녁, 저택으로 어마어마한 물품들이 배달될 생각을 하자 에델라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내일 자기가 출발할 때 가지고 가야 한다며, 그레인은 꼭 오늘 모두 도착해야 한다고 모든 가게에 신신당부했다.
“괜찮아요. 우리 오빠 돈 많아요.”
“돈이 많아도 아껴 써야…….”
“언니. 어느 정도 많으면 아껴 써야겠지만, 우리 오빠 정도로 많으면 팍팍 쓰나, 아껴 쓰나 티도 안 나요. 게다가 어느 정도 돈을 써야 지역경제도 발전하고 그런 거죠.”
그레인은 얼마 전 경제 시간에 배운 단어를 섞어가며 자신의 쇼핑이 타당한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그게 에델라에게 먹히진 않았지만, 그레인 스스로에게는 더 당당해질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좋아! 먹고 힘내서, 이다음에는 에델라 언니랑 미용실에 가야겠어. 예쁜 리본도 좀 사고!’
그리하여 그레인은 당당하게 다음 코스를 구상하고 있었다.
“앗! 나왔다!”
시킨 디저트가 나오자 그레인은 반갑게 소리쳤다. 에델라 역시 좀 피곤하고, 목도 말랐던 참이라 반가웠다.
“아~ 내가 우리 가족과 함께 카페에 있는 날이 오다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이에요.”
“왜? 함께 카페를 간 적이 없어?”
“네. 엄마는 다이어트에 방해된다고 이런 곳엔 절대 안 와요. 너무 유혹적이라나요? 그리고 오빠는 이런 걸 안 먹고요. 언니랑 같이 와서 너무 좋아요!”
매우 감격해하는 그레인을 보며 에델라는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자신이 테라비스의 계약관계인 것을 알면, 그래서 자신이 그레인의 진짜 새언니가 아니며, 진짜 가족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녀가 실망할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레인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작은 것에 크게 실망할 수 있는 나이였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겠어.’
에델라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디저트가 나오자 바로 포크를 집어 든 그레인과는 달리, 에델라는 점원이 차를 따라줄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찻주전자를 놓자, 가벼운 손놀림으로 잔을 들었다. 먼저 영롱한 차 색을 즐기고, 코로 향긋한 차향을 맡은 다음, 한 모금의 홍차를 음미했다. 그 모든 과정은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었고, 우아했다. 그레인이 넋을 잃고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을 만큼.
“우와! 언니, 진짜 귀족인가 봐요?”
새삼스럽게 그레인은 에델라의 출신을 짚어주었다. 에델라는 우아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아주 귀족적인 미소였다.
“근데 왜 우리 오빠랑 결혼했어요?”
그레인의 질문에 에델라의 미소는 무참히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