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닮아서 짜증 나는 존재2021.07.05.
“음?”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테라비스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맞은 편에서 식사하던 에델라 역시 그의 반응을 보곤 반사작용처럼 테라비스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에델라의 눈에는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왜?”
“밖이 좀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그래?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혹시 옷이 온 게 아닐까? 지난번에 맞춘 드레스의 수선이 끝나면 저택으로 가져다준다고 했잖아.”
에델라의 갸웃거림에도 테라비스는 제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뭔가 있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상체를 쭉 내민 테라비스를 향해서 에델라가 물었다. 그런 에델라의 말에 대신 대답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오빠!!”
라고.
“오빠?”
뜬금없는 호칭에 에델라가 굳이 그것을 제 입 밖으로 꺼냈다.
“널 말하는 거야?”
에델라의 질문에 테라비스는 대답했다.
“……빌어먹을.”
긍정의 대답이었다.
“오빠!”
조금 전에 들었던 그 단어가 에델라와 테라비스를 맞이했다. 테라비스와 똑같은 빨간 머리의 소녀가 초록색 눈동자를 빛내며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여긴 왜 온 거야?”
“왜긴 왜야?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결혼했다는데, 내가 어떻게 공부만 하고 있어?”
테라비스의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지만, 그의 면박에도 전혀 기죽지 않는 것을 보면, 소녀는 그의 여동생이 확실했다.
“흐음~. 그러니까 이쪽이 내 새언니겠군?”
소녀의 눈이 에델라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제 오빠를 닮은 것인지, 소녀의 눈빛은 제법 매서웠다. 마치 품평이라도 하는 것 같은 시선에 에델라는 어린 소녀를 상대로 살짝 긴장하고 말았다.
“맞아. 이쪽은 에델라 드 바넬레오. 네 새언니야. 그리고 에델라. 이쪽은 그레인 바넬레오. 내 동생이에요.”
“안녕, 그레…….”
“내 동생이에오오?”
에델라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레인은 테라비스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그것도 테라비스의 말투를 비웃듯이, 아주 얄밉게.
“자기가 무슨 신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웃겨, 진짜!”
적나라한 그레인의 평가에 에델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테라비스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래서였다. 결혼식에 굳이 그레인을 부르지 않은 까닭은. 저보다 11살 아래의 동생은 자신과 어머니의 단점을 아주 골고루 닮은 아이였다. 핏줄 간에 닮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굳이 이렇게 단점만을 쏙 빼닮은 것은 비극이었다. 그레인은 돈을 사랑했고, 사치와 허영을 사랑했으며, 말을 할 때 굳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델라는 백작 가의 영애로 진짜 레이디시니, 결례를 범하지 말도록 해.”
“물론 나도 엄마한테 그건 들었어. 예쁜 얼굴로 오빠를 홀려서 결혼했다고도 들었고.”
“그레인!”
테라비스는 그레인의 말버릇을 지적하기 위해서 그녀의 이름을 소리쳤지만, 그레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에델라를 품평하듯이 다시 쳐다보았다. 아니, 아까보다 더 자세히 그녀를 뜯어보고 있었다.
“엄마 말이 딱 맞네.”
드디어 에델라를 뜯어보는 것을 끝낸 그레인이 피식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며 에델라는 손을 꽉 쥐었다. 무슨 무례한 말이 나오더라도, 테라비스의 동생이니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완전히 대박 이쁘잖아.”
잔뜩 긴장해 있던 에델라의 어깨가 파도를 만난 모래성처럼 파스스 내려왔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박였다.
“언니, 진짜~ 예쁘다. 그런 소리 많이 듣죠? 와! 대박.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제일 예쁜 거 같아!”
환하게 웃으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는 그레인을 보면, 자신이 정확하게 들은 것 같았다.
“아! 머리도 금발이야. 완전히 반짝반짝해. 이쁘다! 요즘 수도에서는 금발로 염색하는 게 유행이라던데, 나도 졸업하기만 하면 바로 염색할 거야!”
묻지도 않은 말을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지금의 그레인은 무서운 시누이가 아니라 보통의 십 대 아이들처럼 보였다. 아니, 좀 심하게 발랄한 십 대 아이들이려나?
“졸업해서 네가 돈을 벌면, 네 돈으로 금발을 하든 흑발을 하든 무지개발을 하든, 네 맘대로 하세요.”
“싫은데요오~. 오빠 돈으로 할 건데요오~.”
“누구세요? 저는 너 같은 동생을 둔 적이 없는데요?”
“아, 그러세요? 괜찮아요. 저는 우리 엄마 아들 돈 쓰면 되거든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대체 누가 17살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둘 다 11살의 유치한 꼬맹이 같았다. 적어도 에델라의 생각에는 그랬다.
“아침은 먹었니?”
“아뇨. 어제 출발했거든요. 온종일, 밤새도록 마차를 탔어요. ”
“어디서 출발했길래?”
“기숙사에서요. 아! 전 앙트웰 여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학교는 어떻게 한 거야?”
테라비스가 에델라와 그레인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도착하려면 앙트웰에서 어제 아침에 출발했어야 할 텐데, 어제는 금요일이잖아.”
“하루 쉬는 걸 허락받았어. 하나밖에 없는 오빠의 결혼식을 핑계로.”
“내 결혼식은 거의 보름 전에 열렸어.”
“알아. 하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그걸 모르잖아.”
그레인은 잘도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점도 테라비스와 꼭 닮은 점이었다.
“그럼 들어가서 같이 아침을 먹자. 마침 우리도 아침을 먹던 중이었거든.”
에델라는 제법 안주인 같은 태도로 그레인을 안내했다. 사실, 방학마다 이곳에 오곤 했던 그레인이었기 때문에 저택의 지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쁜 새언니가 웃으면서 안내해주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그레인은 웃으면서 그녀의 안내에 따랐다.
“언니 피부 진짜 좋다. 비법이 뭐예요?”
“딱히 비법이랄 건 없는데.”
“어머, 그럼 타고난 거? 좀 재수 없고, 부럽다.”
아직 그레인의 말투에 적응하지 못한 에델라는 저게 욕일까, 칭찬일까를 살짝 고민했다. 물론, 그레인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칭찬에 가까웠고.
“세수는 뭐로 해요? 미온수? 화장수? 아니, 세안제가 더 중요하려나? 뭐 써요?”
“비누를 쓰는데.”
“비누요?”
“응.”
“좋은 비누인가 보네. 그럼 머리 샴푸는 뭐 써요? 완전히 반짝반짝해! 뭔가 엄청 좋은 냄새도 나는 것 같고?”
그레인은 에델라 쪽으로 얼굴을 향한 체, 킁킁거리며 말했다.
“비누 쓰는데.”
“네?”
“머리를 비누로 감는다고요?”
“응.”
비누라는 말에 그레인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고, 테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그 좋은 향이, 비누였나?
“아, 그럼 혹시 몸은……?”
“그것도 비누.”
“혹시 전용 비누가 다 따로 있는 건가요? 얼굴용, 머리용, 몸용?”
그레인은 자신도 모르는 귀족용 비누가 있는가 싶어서 물었다. 어쩌면 수입상인 오빠가 외국에서 뭔가 좋은 비누를 사다 주는 건가 하고 말이다.
“아니. 그냥 하나로 다 쓰는데?”
에델라는 뭔가 문제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누 하나로 온몸을 다 씻는 건, 가난하게 산 에델라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 비누도 없는 날은 물로만 씻어야 했었다. 그게 익숙했던 에델라는 저택에 와서도 습관처럼 비누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었다.
“…….”
할 말을 잃은 쪽은 그레인이었다. 저 반짝이는 머리카락도, 고운 피부도, 좋은 향기도, 전부 비누라니.
“하아……. 뭐든 타고나야 하는 거야.”
그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었다.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어깨가 아주 축 처져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야?”
에델라는 앞서 걷고 있는 그레인이 듣지 못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테라비스에게 물었다.
“아니. 네가 잘못한 건 없어.”
테라비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근데, 혹시 무슨 비누를 쓰는 거야?”
“무슨 비누라니? 그냥 욕실에 있던 것을 쓰는 건데?”
혹시나 에델라만 쓰는 비누가 따로 있나 싶어서 물었던 테라비스는 별 이상한 것을 다 물어본다는 듯이 에델라가 대답하는 바람에 머쓱해졌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해진 드레스와 솔기 터진 구두를 신던 에델라가 자신만의 전용 비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거, 참. 이상하네.’
테라비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델라가 말하는 그 욕실의 비누는 별 냄새가 나지 않았다. 좋은 향기를 첨가한 고급비누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 저택에 있는 비누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별 냄새가 나지 않는 비누였다.
‘그런데 왜?’
에델라에게서만 좋은 냄새가 날까? 자꾸만 맡아보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고, 보드라운 피부에 제 입술을 대보고 싶게 만드는, 달콤한 냄새가 나는 걸까? 참으로 미스터리였다. * * *
“맛있게 잘 먹었다!”
그레인은 맛있는 아침 식사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앙트웰의 기숙사는 식사가 잘 나오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음식은 바깥 음식이었다.
“음?”
부른 배를 잡고 식당에서 나오는 그레인의 눈에 복도에 쌓여 있는 상자가 눈에 띄었다. 분명 조금 전에 식당에 들어갈 때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건 뭐야, 오빠?”
“주문했던 물품이 온 모양이네.”
“어머! 나 오는 줄 어떻게 알고 선물을 사놨어?”
“알긴 뭘 알아? 연락도 없이 와 놓고선.”
테라비스의 핀잔을 들은 척 만척하며 그레인은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자고로 상자는 뜯는 맛 아니던가? 그게 자기 것이 아니더라도 언박싱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었다.
“뭘까나~.”
기숙사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거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레인은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호수를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맑은 물빛이었다.
“어머나!”
그레인은 그 맑은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운 물의 감촉 대신에 느껴진 것은 보드라운 천의 감촉이었다.
“드레스잖아?”
상자에서 그레인이 꺼내 든 것은, 그날 테라비스가 골라준 에델라의 드레스였다.
“이거, 언니 거예요?”
“응.”
테라비스의 것일 리 없는 물건이었지만, 굳이 그레인은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옆의 상자를 열고, 또 그 옆의 상자를 확인했다.
“아, 나, 참. 어이가 없네.”
가만히 드레스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레인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뒤를 돌아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데. 이 드레스, 울 오빠 돈으로 산 거죠? 엄마한테 들으니, 원래 언니네 집은 엄청 가난하다면서요? 지참금 한 푼도 못 낼 정도로.”
비딱한 말투로 그레인이 에델라에게 물었다. 아니, 묻는다기보다는 시비를 걸었다.
“그레인 바넬레오. 내가 분명 에델라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옆이 있던 테라비스가 앞으로 나서며 그레인의 입을 다물게 만들려고 했다.
“내가 무례하다고? 무례한 건 새언니지.”
그레인은 진심을 담아 에델라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