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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좋은 냄새 (18/92)

18화. 좋은 냄새2021.07.02.

“손.”

에델라가 손을 내밀자, 테라비스가 그 손을 잡았다. 순간, 에델라는 그 모습이 잘 훈련된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테라비스는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럼 개 같다고 해야 하나?’

에델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이자 금빛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테라비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좋은 냄새.’

저절로 테라비스의 코가 반응했다. 저도 모르게 코가 그 냄새를 쫓아 움직였다.

“무…….”

무슨 샴푸 써? 라고 말을 하려던 테라비스는 그게 멍청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샴푸긴 무슨 샴푸야? 집에 있는 자기랑 똑같은 샴푸를 쓰는 게 당연한데!

“무?”

말을 하다 마는 테라비스를 쳐다보며, 에델라가 되물었다.

“……무가 올해 풍작이라지?”

“아, 그래?”

테라비스는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다. 다행히 에델라는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다시 에델라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향기가 테라비스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샴푸 향은 아니었다. 이건 테라비스가 매일 머리를 감을 때 맡는 그 냄새가 아니었고, 자신의 머리에서 나는 냄새와 똑같은 냄새가 결코 아니었다. 아주 좋은 냄새였다.

‘아, 그때도!’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처음 보았던 그 날, 그리고 넘어질 뻔한 에델라를 잡아주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그 순간, 자신이 맡았던 에델라의 냄새를 기억해냈다. 꽃향기처럼 향긋했던 그 냄새. 아니, 향기. 에델라의 향기.

“아, 어깨가…….”

좁은 자리가 불편했는지, 아니면 단단한 테라비스의 어깨와 닿은 자리가 불편했는지, 에델라가 손을 잡은 팔을 비틀었다. 그래도 불편했던지 아예 제 몸을 옆으로 틀자, 테라비스의 쪽에서 에델라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흐트러진 금발. 그리고 좋은 향기. 테라비스는 저도 모르게 에델라의 쪽으로 제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향기가 좀 더 짙게 느껴졌다. 조금 더 다가가면, 더 진하게 에델라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테라비스를 유혹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뺨으로 다가갔다. 저 보드라운 뺨을 만지고 싶고, 그녀의 향기에 취하고 싶은 충동이 테라비스의 손을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에델라의 향기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였다.

“음?”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뺨에 닿자, 두 사람의 잡은 손을 쳐다보고 있던 에델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 움직임에 에델라의 턱에 있던 테라비스의 엄지가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보드라운 감촉이 매끈하게 바뀌자, 테라비스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에델라의 눈이 한번 깜박였다. 그 눈꺼풀이 다시 테라비스를 조종했다. 이리 오라고. 가까이 오라고. 충실한 꼭두각시는 그 명령에 응했다. 테라비스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그대로 천천히 에델라를 향해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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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의 목적지가 작은 감탄사를 터트리자, 테라비스가 멈칫했다.

“소매에 단추가 떨어지려고 해.”

그리고 그 말에는 아예 그대로 멈춰버렸다.

“여기.”

에델라는 손을 뻗어 제 뺨에 닿은 테라비스의 옷 소매를 가리켰다. 그제야 테라비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에델라의 눈, 혹은 입술이 아니라.

“내가 집에 가서 다시 달아줄까?”

“어……. 그럴까?”

대답과 함께 자연스럽게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왔다. 대신 제 눈으로 떨어지려는 단추를 확인했다. 에델라의 말이 옳았다. 떨어지기 직전의 단추가 간신히 소매에 매달려 있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하필이면 넌 왜 지금! ……지금?’

귀도 없는 단추에게 성질을 내려던 테라비스는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급히 성질을 죽였다. 지금 이게 눈에 안 띄었으면 뭘 어쩌려고 했는데?

‘키스했겠지.’

왜? 아직 손잡는 기간도 안 지났는데? 그다음에는 포옹도 남았는데? 키스는 한참 뒤라고!

‘그건 나도 알지.’

근데 왜 키스를 하려고 했는데?

‘그거야…….’

힐끗, 테라비스의 시선이 옆자리의 에델라에게 향했다.

‘나도 모르지.’

알 듯, 말 듯. 모를 듯, 알 듯. * * *

“바느질을 잘하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소매의 단추를 다시 달고 있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바느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가 보기에도 에델라는 능숙해 보였다. 실을 꿰는 자세나, 천과 단추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는 손이 그랬다.

“응.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어릴 때 배운 것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돈이 되는 게 바로 이거였거든.”

“단추를 달아주는 게?”

“당연히 단추를 다는 일은 아니지. 손바느질이나, 수를 놓는 일이었어. 이 일이라도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그걸로 세 식구가 먹고살았다는 건가?”

“그런 셈이야.”

그야말로 간신히 먹고살 정도이고, 가끔은 굶기도 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예로니아 백작 가의 사정이 그 정도까지였다고 굳이 테라비스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에델라의 자존심이었다. 계속 테라비스에게 동등한 계약자로 남고 싶은 자존심.

“왜 그렇게 된 거지?”

“뭐가?”

가위를 찾아 실을 끊어내며 에델라는 되물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그렇게 망한 건가?”

테라비스의 말에는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 거침없는 질문의 소용돌이에 갑자기 내던져진 에델라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보통 집이 망하게 되는 원인은 셋 중 하나지.”

그게 뭐냐고 묻는 듯한 에델라의 시선에 테라비스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술, 여자, 도박. 예로니아 백작님이 이 중에 하나를 하신 건가?”

“아버지는 그런 분이 절대 아니야.”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테라비스가 아버지에게 죄악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에델라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에델라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자상하고, 다정하신 분이었다. 어머니의 생일에는 꽃을 사 오고, 어린 딸이 먹을 스테이크를 직접 잘라주는 분이셨다. 다만, 너무 착했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 굳이 죄의 이름을 붙이자면, 아버지의 죄는 그것이었다.

“솔직히, 예로니아 백작가의 사정을 난 잘 몰라. 내가 루젠타에 온 것은 10년 전이고, 그때 당신네 집은 이미…….”

테라비스는 ‘망해 있었다.’라는 말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망해 있어서 안중에도 없던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궁금했다. 제 아내가 된 사람의 가문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 10년 전에 루젠타에 왔으면 모를 만도 하다 싶었지만,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에는 썩 유쾌한 일도 아닌지라 에델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니, 한 번도 제 입으로 남들에게 설명한 적은 없었다. 그 당시에는 루젠타의 모두가 예로니아 백작 가가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어린 에델라보다 더 소상하게.

“외삼촌이 있었어.”

아버지의 누명 아닌 누명을 벗겨 드리기 위해서 에델라는 입을 열었다.

“오래되어서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머니의 막냇동생이라고 했었어. 어머니는 멀리서 예로니아로 시집을 오셨고, 또 어릴 때 결혼을 하셔서 외삼촌과 함께 자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 그래서 자기 동생이긴 했지만, 어머니는 그 사람을 잘 몰랐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아주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았다. 어머니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그 얼굴이. 아홉 살 때의 일이니, 사실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에델라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해 생일에 아버지가 사주셨던 인형이 얼마나 예뻤는지도 기억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함께 인형 옷을 만들었던 것이 얼마나 재밌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정원에서 세 식구가 함께 티타임을 가졌던 것도, 그때 정원의 활짝 핀 꽃에서 나던 향기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웃음소리도, 그날의 파란 하늘도, 에델라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외삼촌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에델라가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바로 그가 예로니아 백작 가를 몰락시킨 장본인이니.

“아주 유망한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했대. 그래서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했고.”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했나 보군.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지?”

“아니. 아버지는 그 투자를 거절했어. 허황한 계획이라고 생각했었나 봐. 사실, 난 그 사업이 뭐였는지도 잘 모르고,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도 잘 몰라. 그때의 난 너무 어렸으니까.”

그저 그 당시 기억의 자투리들과 자라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의 파편을 모은 결과였다.

“그런데 외삼촌이 뭔가의 일을 저질렀나 봐.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아버지는 외삼촌을 도우려고 하셨어.”

바늘과 실을 정리하고, 가위를 바느질함에 챙겨 넣으며 에델라는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그 도움의 결과로 예로니아 백작 가문은 망하게 되었어.”

빚쟁이가 찾아 들었고, 저택의 문서가 여러 곳을 오갔으며, 에델라의 예쁜 옷이 든 옷장이 사라지고, 공부하던 책상이 사라지고, 에델라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예뻐해 주던 하녀들이 사라졌다. 예로니아 저택은 슈크림이 없는 슈처럼, 텅 빈 저택의 껍데기만이 남게 되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절망했다. 그것이 아홉 살 에델라가 기억하는 결말이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아?”

“아버지를? 왜?”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질문이 터무니없다는 듯이 되레 그에게 물었다.

“고생하며 자랐을 것 아니야. 아버지가 외삼촌을 도와주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귀족 영애로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았겠지. 바느질도 하지 않고, 고생도 없이.”

고귀한 백작 영애께서 천한 장사치와 결혼하지도 않고.

“테라비스. 내가 왜 이 일을 정확하게 잘 모르는지 알아?”

“네가 아까 말했듯이 당시에 너무 어려서?”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유겠지. 하지만 내가 우리 가문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이유는, 부모님께서 한 번도 그 일 때문에 다투신 적이 없고, 서로를 탓한 적도 없기 때문이야.”

에델라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 끄는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고, 바느질함을 드는 손짓은 우아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으셨어. 왜 그런 동생을 두었냐고, 왜 우리 집에 그자를 들였냐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어.”

바느질함을 제자리에 두고 방을 빙 돌아서 걷는 에델라의 걸음은 그야말로 ‘사뿐사뿐’이었다. 잘 배운 귀족 영애의 표본과도 같은 걸음걸이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어. 집이 망하게 되었지만, 가장인 아버지를 탓한 적은 없었어. 두 분은 그저 서로를 위로하고, 어린 날 잘 키워보려고 애쓰셨어.”

비록 먹을 것은 부족했고, 돈은 없었을지언정, 사랑은 부족하지 않았다. 에델라의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에델라에게 주려고 했다. 맛있는 것을 먹을 수는 없었지만, 아버지께는 학문을 배웠다. 예쁜 옷을 입을 수는 없었지만, 어머니께는 교양을 배우며 자랐다. 원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원망하는 것을 보지 못한 에델라는 남을 원망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손, 잡을까?”

조용히 침대 안으로 들어온 에델라가 테라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기사에게 자신의 손등을 허락하는 고귀한 레이디와 같은 자세였다.

“그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 손을 테라비스는 붙잡았다. 아주 꼭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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