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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귀하신 몸 (16/92)

16화. 귀하신 몸2021.06.25.

  세수하고, 얼굴에 물기를 닦으며 에델라는 머릿속으로 뭘 입어야 할까를 생각했다. 평소처럼 집에 머물 거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붉은바람 상단에 가서 번역 일을 시작하기로 한 첫날이었다. 말하자면, 에델라의 첫 출근이었다. 제아무리 옷에 무심한 에델라라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아무래도 새 옷이 낫겠지?’

화장대에 앉아 하나밖에 없는 크림을 바르며 에델라는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입을 만한 옷은 그것밖에 없었다. 테라비스의 강요 때문에 쇼핑을 한, 에델라가 고쳐둔 새 옷.

‘근데 어제도 그걸 입었는데…….’

가운을 걸치고, 드레스룸으로 향하며 에델라는 또 조금 망설였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가도 괜찮을지가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에델라의 머리를 때렸다.

‘이런, 에델라! 정신 차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옷에 신경 썼다고!’

스스로가 기가 막혔다. 결혼하면서 가지고 온 옷이 두 벌밖에 없었던 에델라였다. 물론, 원래는 그것보다는 옷이 더 있긴 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아닌 남들 앞에서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자 두 벌밖에 남지 않아서였다. 그런 자신이 입었던 옷을 또 입어도 될까를 고민하는 건 사치였다.

“옷은 단정하고 깔끔하기만 하면 돼.”

에델라는 자신을 꾸짖으며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없잖아?”

하지만 옷장 안에 있는 것은 에델라가 결혼할 때 가지고 온 그 옷 두 벌과 낡은 잠옷 한 벌 뿐이었다. 결혼식에서 한 번 입었던 웨딩드레스도 있긴 했지만, 그걸 입고 갈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입으려던 옷이 없자 에델라는 당황했다.

“할멈!”

드레스룸 밖으로 나온 에델라는 식당에서 녹스를 찾아냈다.

“내 옷 못 봤어?”

“무슨 옷이요?”

“어제 내가 입었던 옷. 외출복 있잖아.”

“아아~ 그거요.”

그제야 에델라가 뭘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녹스는 웃었다.

“세탁했죠.”

“응?”

“오늘 아침에 빨았다고요.”

“아…….”

옷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입었던 옷이니, 고용인이 거두어가서 세탁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저택에 하인이 몇인데 입었던 옷을 그대로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부리는 하인 없이 오래 살아온 에델라는 그것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물과 세제를 아끼고, 옷감이 빨리 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번 입었다고 해서 옷을 빨지 않았었다. 여러 번 입고, 어딘가 더러워진 티가 나면, 그제야 손수 빨래를 하곤 했던 과거의 에델라였다. 여기서는 고용인이 세탁해준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구나.”

옷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입을 옷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요? 그 옷을 꼭 입으셔야 하나요?”

“아니, 그건 아니야.”

녹스의 질문에 에델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옷장에는 아직 옷이 두 벌 있었다. 충분히 입을 만하다고 생각해서 예로니아 저택에서 챙겨온 옷이었다.

‘그래. 에델라 드 예로니아가 에델라 드 바넬레오가 되었다고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야.’

옷장에서 낡은 옷을 꺼내며 에델라는 스스로에 다짐했다.

“테라비스와 나는 계약관계야.”

그리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부자는 테라비스이지 내가 아니고, 테라비스는 계약자이지 진짜 남편이 아니야.”

옷을 다 갈아입은 에델라는 거울을 마주 보았다. 처음에 테라비스를 만나 계약할 때 입었던 그 옷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에델라. 착각하지 마.”

거울 속의 에델라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서 와!”

에델라가 단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테라비스는 활짝 웃으면서 그녀를 반겼다.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어?”

“응.”

“아침에 같이 마차를 타고 올 걸 그랬나?”

“가까운데 걸어와도 괜찮아.”

“아니야. 최상의 컨디션인 게 좋잖아. 다음에는 마차를 보낼게. 아니면 아예 집에서 재택근무를 할래?”

에델라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서류는 어딨어?”

“아, 여기!”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제 앞에 있던 서류를 들어 보였다.

“자, 여기 앉아.”

“여기?”

테라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자리를 양보하는 걸 보고, 에델라는 당황해서 물었다.

“여긴 당신 자리잖아?”

“그렇긴 한데, 다른 남는 자리는 없거든. 다른 책상은 각자 임자가 있지.”

“그럼 당신은 어쩌려고?”

“난 저기.”

테라비스는 턱으로 단장실 한쪽에 있는 손님 접대용 공간을 가리켰다. 소파는 푹신해 보였지만, 앞에 있는 테이블은 낮아서 차를 마시는 데나 적당하지, 사무를 보기에는 불편해 보였다.

“불편하지 않겠어?”

“아, 불편하려나? 하긴, 당신이 사용하기엔 책상이나 의자가 좀 클 수도 있겠군.”

“아니. 나 말고 당신 말이야. 저기서 일을 보기엔 불편할 것 같은데?”

“아아~ 나 말이야? 난 괜찮아. 우리 번역가님이 편하셔야지. 게다가 난 서류를 읽기만 할 건데, 당신은 책상에 두고 써야 하잖아? 당연히 당신이 편해야지.”

테라비스는 더는 사양하지 말라는 듯, 에델라를 끌어다가 제 자리에 앉혔다. 거기다가 에델라의 앞에 예쁘게 안다비아어의 서류를 펼쳐주고, 그녀가 번역본을 옮겨적을 수 있는 흰 종이도 가지런히 펼쳐주었다.

“차 한 잔 줄까?”

“괜찮아.”

에델라가 두 줄 정도 문장을 보았을 때, 테라비스가 물었다.

“펜은 괜찮아? 얇은 것도 있는데 가져다줄까?”

“아니. 괜찮아.”

열 줄도 넘어가기 전에 테라비스가 다시 물었고, 에델라는 사양했다.

“의자는 어때? 높이 조절도 되는데, 좀 조절…….”

“테라비스.”

결국,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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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지?”

“설마!”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그야말로 펄쩍 뛰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럼 왜 자꾸 그렇게 말을 시키는 거야? 집중을 할 수가 없잖아.”

“난 그냥 넌 귀한 몸이니까 대접해주려고 그랬던 거지.”

“루젠타에 안다비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

“응.”

에델라의 물음에 테라비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서류야?”

“응!”

에델라의 두 번째 물음에도 테라비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 일이 성사되기만 하면 대박이거든. 처음에 우리가 안다비아와의 교역을 시도했을 때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한 사람들도 우리가 성공할 것처럼 보이니까 뒤늦게 발을 걸치려는 놈들도 있어.”

테라비스는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놈들 중의 하나가 라이벌 상단인 비에라 자작가의 비에라 상단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기꺼운 테라비스였다. 상단의 규모로는 루젠타에서 오래된 비에라 상단과 이미 비등한 붉은바람 상단이었다. 교역의 규모로만 보면 붉은바람이 더 앞서나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귀족 지위 때문에 번번이 패배의 쓴맛을 본 붉은바람 상단이었다. 이전의 그 보석상 입찰 건처럼. 하지만 이제 곧 지위 문제는 해결될 터였다. 아니, 포웨이스 남작가의 초대장을 받은 걸 봐선 이미 해결된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이 안다비아 건만 성사된다면, 루젠타의 가장 강력한 상단은 명실공히 붉은바람 상단이 되리라!

“차 한 잔 줄까?”

그러니, 안다비아 건의 해결책이 되어줄 에델라가 예쁘게 보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줘.”

차를 마시지 않고서는 그 권유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어이! 여기 차 한잔!”

테라비스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귀한 우리 번역가님이 드실 것이니까 특별히 맛있게 타오도록!”

웃으며 뒷말을 덧붙인 테라비스 덕분에 에델라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직원들은 눈만 끔벅거렸다. 단장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도.

“키햐~ 신혼이로구먼.”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결혼 15년 차의 회계 담당이었다.

“좋을 때지, 좋을 때야.”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신혼을 떠올리고 있었다.

“연애하는 티도 하나 없이 갑자기 결혼하시더니, 진짜 엄청나게 좋아하시나 봐요.”

“그러게. 오늘 아침에도 사모님 오신다고 얼마나 난리였어요?”

“맞아. 말이 번역가님이지, 우리 사랑하는 부인이 마실 차니까 특! 별! 히! 맛있게 타오라는 거잖아요.”

“맞아, 맞아!”

“뭐가 맞아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주고받던 직원은 불쑥 비집고 들어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냐는 듯,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무사 중에 한 명이었다.

“어머, 놀랐잖아요!”

“아, 놀랐어요? 흐흣.”

여직원의 타박에도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봄볕에 까맣게 탄 코를 찡긋거리면서. 그랬다.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호박벌 용병단의 유일한 여자, 로즈 에몬테는 제법 유명인사였다. 그녀가 유명한 것은 그저 여자라서가 아니었다. 로즈는 특이하게도 양손잡이로 쌍검을 사용했는데, 더욱 특이하게도 오른손으로는 장검을, 왼손으로는 단검을 사용했다. 중거리는 장검으로, 근거리는 단검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로즈는 그저 특이할 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리고 까다롭다는 말은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남자 용병들을 다 제치고, 오직 검술 실력으로 테라비스가 지명해서 고용할 만큼 그녀는 훌륭한 검사였다.

“사모님께서 오늘 오셨거든요.”

“오! 그 예쁜 사모님? 나도 소문은 들었어요.”

“네, 네. 지금 단장실에 계시는데, 단장님께서 얼마나 푹 빠지셨는지 눈에 보이더라니까요. 사모님 얼굴 보자마자 싱글벙글하시고, 아주 극진하게 대접 중이세요.”

“오호~.”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라비스는 그렇게 여자에 극성맞은 타입으로 보이지는 않았었는데, 의외다 싶었다. 자신들과 함께 있으면 같은 용병 단원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한 근육과 덩치를 봐선 취미는 운동이 아닐까 싶었고, 자고로 운동에 시간을 쓰면 연애에 쓸 시간이 없는 법이었다. 거기다가 항상 늦게까지 일을 하는 걸 봐선 여자가 아니라 일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완전히 러브러브한가보네요.”

“네. 완전히 핑크핑크해요.”

닫힌 문을 보며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부단장실의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밖이 조금 소란스럽다 싶었는데, 그 소란이 가라앉을 여지가 보이지 않자, 참다 못해서 마틴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다들, 뭐 하시는 겁니까?”

날카로운 마틴의 목소리에 다들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남은 것은 단 한 명. 이곳에 자기 자리가 없는 로즈였다.

“…….”

마틴의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눈빛이 로즈를 향하자, 그녀는 눈만 끔벅였다. 그러다 씨익, 로즈는 마틴을 보고 웃었다. 물론, 마틴은 그런 로즈를 보며 마주 웃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말랑한 사람이 아니었다.

“들으셨어요?”

그리고 붉은바람 상단과 계약한 지 불과 보름밖에 되지 않은 로즈는 그걸 몰랐다.

“단장님이랑 사모님이랑 러브러브래요.”

로즈는 웃으면서 마틴의 어깨를 툭 쳤다. 그 순간, 붉은바람 상단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음?”

뭔가 으스스한 분위기에 로즈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당연했다. 지금 이 싸늘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로즈의 앞에 있었으니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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