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닮은 얼굴2021.06.21.
점원이 가지고 온 세 벌의 드레스를 보고 에델라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매우 정상적인 드레스들이었다.
“입어보시겠어요?”
“아, 물론 입어봐야죠.”
점원의 말에 에델라가 뭐라고 하기 전에 테라비스가 얼른 대답했다. 그리곤 얼른 가보라는 듯, 에델라에게 눈짓을 하기도 했다. 가게에서 가장 비싼 3벌이라는 말에 에델라는 조금 망설였지만, 입어보지 않으면 이대로 대치가 계속될 것 같아 드레스들 쪽으로 다가갔다.
‘입어보고 별로라고 하면 되겠지.’
놀랍게도 에델라는 조금 전의 테라비스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 번째 드레스는 화려한 꽃장식이 달린 초록색의 드레스였다.
“예쁘네요.”
에델라가 그것을 입고 나왔을 때,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비싼 옷이라서 그런지 부티가 나긴 했다.
“두 번째 드레스는 이거예요.”
빨간 드레스를 집어 들고 점원은 에델라와 함께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입고 벗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좀 걸렸다. 지루해진 테라비스가 다른 살 것은 없나 하고 가게 안을 둘러보는 사이, 먼저 밖으로 나온 것은 점원이었다.
“자, 두 번째 드레스랍니다.”
점원의 소개말과는 달리 에델라는 안에서 바로 나오지 않았다. 주저하는 구두가 먼저 보이고 나서, 빠끔히 고개를 내민 에델라가 조심스럽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흠…….”
그녀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주저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에델라의 손이 가슴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조금 그런 것 같아요.”
보통의 드레스보다 가슴 쪽이 조금 더 파진 정도였지만, 에델라는 그 ‘조금 더’가 못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내가 봐도 그건 조금 그렇네요.”
그리고 그건 테라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델라가 그 드레스를 입고 나온 순간, 그녀가 그것을 입고 무도회에 갈 것을 생각하자 괜히 불쾌했다. 다른 사람들이, 정확하게는 다른 남자들이 저 드레스를 입은 에델라를 볼 것을 상상하자 불쾌해진 것이었다.
‘왜 저런 걸 추천해 준거지?’
테라비스는 괜히 점원을 탓했다. 분명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을 3벌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면서도.
“그럼 마지막 드레스예요. 사실 이게 제일 자신 있는 상품이라서 가장 나중에 보여드린 거랍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점원은 웃으면서 남아 있던 옅은 물색의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에델라는 그것을 보지도 않고 얼른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드레스가 뭐든 빨리 갈아입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여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테라비스는 아까의 그 불쾌한 감정을 다른 것으로 지워내려 다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의 눈에 띈 것이 하나 있었다.
“흠…….”
테라비스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멀리 보았을 때도 괜찮아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욱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분명히 비싸 보였다. 테라비스가 그것을 향해서 손을 뻗으려는 찰나였다.
“다 되었습니다.”
점원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에델라가 걸어 나왔다.
“…….”
그녀를 본 테라비스는 고개를 돌리다가 고장 난 것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에델라가 너무…… 예뻤다.
“……여보?”
굳어 있는 테라비스를 본 에델라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테라비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요. 맞아요.”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몰라도 테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별로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거로…….”
“아뇨.”
비싼 드레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에델라가 다른 것을 고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테라비스는 단칼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럴 수 없었다. 다른 것을 고르게 둘 수 없었다. 이렇게 예쁜데, 이 모습을 다시는 못 본다고? 테라비스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점원을 향해서 그렇게 말하자 당황한 것은 에델라였다. 입어본다고 하긴 했지만, 진짜로 비싼 드레스를 살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보, 잠깐만요.”
드레스를 입은 채, 에델라는 재빨리 테라비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테라비스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우습게도, 테라비스의 심장은 더 빨리 뛰었다.
“이렇게 비싼 건 필요 없어.”
살짝 까치발을 든 에델라가 조용히 테라비스의 귀에 속삭였다. 기가 막히게도, 테라비스의 심장은 이전보다 더 빨리 뛰었다. 에델라의 숨결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고, 작은 숨소리가 테라비스의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에델라의 체온이 그의 귓불에 닿았다. 당연히 그의 심장이 빨리 뛸 수밖에 없었다.
‘뭐야? 나도 드레스가 너무 비쌀 것 같아서 그런가?’
하지만, 테라비스는 그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었다.
“괜찮아요.”
재빨리 에델라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그리고 애써 태연한 척 에델라를 보며 웃었다.
“지금 아주 예뻐요. 그러니 이걸로 하도록 해요.”
“하지…….”
“그 드레스를 입은 당신이 정말로 예뻐서 그래요. 내가 계속 보고 싶어서.”
테라비스는 솔직한 제 심정을 입밖에 드러냈다. 비싼 가구를 사서 집에 두고 싶고, 값비싼 오브제를 두고두고 감상하고 싶어서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리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제 돈을 들여서 드레스를 사는 건데, 이왕이면 예쁜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
하지만 노골적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것 같은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예쁘다는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그 말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 계속 보고 싶다는 그 말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에델라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마치 긴긴 겨울이 지나고, 처음으로 움튼 봄꽃을 본 것처럼. * * * 에델라와 테라비스가 각자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눕기 전 손을 잡는 일은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일이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은 침묵이 그리 숨 막히지 않았고, 정적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오늘은 좀 피곤하네.”
테라비스의 손을 잡은 에델라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럴 법도 했다. 결혼 후 오랜만의 장시간 외출이었는 데다가, 갑작스럽게 붉은바람 상단의 번역 일을 맡게 되었고, 쇼핑까지 했으니 말이다. 멍하니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던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초라한 차림 속에서도 빛이 났던 그녀의 미모는 저택에서 와서 잘 지내고 있어서인지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은 은은한 촛불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피부는 매끄러워져 있었으며, 입술은 더욱 생생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만개 직전의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운 에델라의 얼굴에 테라비스는 새삼스럽게 빠져들었다.
“어머니를 닮았나?”
“응? 뭐라고?”
고개를 숙이고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참고 있던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네 얼굴 말이야. 어머니를 닮은 거야?”
“글쎄? 나는 반반인 것 같아. 눈은 아버지를 닮았고, 입술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그럼 코는?”
“코도 어머니.”
“그럼 상단은 아버지, 하단은 어머니인가?”
“사람 얼굴을 그렇게 나누는 사람이 어딨어?”
“여기.”
에델라가 인상을 찌푸려도 테라비스는 태연했다.
“그럼 당신은? 지난번에 보니 어머니를 닮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판박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응. 어렸을 때.”
그제야 에델라는 결혼식에 테라비스의 아버지는 없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저런, 유감이네.”
“글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서 그다지 유감스러운 것도 없어. 게다가 어머니의 수많은 남자친구가 서로 내 아버지를 하겠다고 싸워대서 그다지 아버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거든.”
“어머.”
“물론 난 뒷돈만 받아 챙기고 누구도 내 아버지로 인정한 적은 없었어.”
“그래도 돼?”
“안 될 건 또 뭐야?”
테라비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게다가 그의 모친은 그러면 안 된다고 꾸짖기는커녕 받은 용돈을 반반 나누자고 제의까지 했는데 말이다.
“피곤하면 누울래?”
눈꺼풀에 잠이 대롱대롱 매달린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제의했다.
“그럼 손은?”
힐끗, 시계를 한번 바라보곤 에델라가 말했다. 아직 손을 잡은 지는 1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고지식한 에델라는 제 손으로 한 계약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손은 누워서 잡아도 되잖아.”
“…….”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잠시 망설였다. 계약서에 손을 어떻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없긴 했다. 앉아서 잡든, 누워서 잡든, 손은 손이었다. 피곤한 에델라에게 테라비스의 제안은 달콤했다.
“그럼 그럴까?”
둘은 잠시 손을 놓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의논한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다시 손을 잡았다.
‘이상해.’
에델라는 뭔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 언제나 한 침대에서 자던 두 사람이고, 매일 밤 잡던 손인데, 이 순간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왜?”
에델라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테라비스가 물었다.
“아, 아니야.”
하지만 그 이상한 뭔가가 뭔지 모르는 에델라는 그냥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아, 응.”
그리고 테라비스 역시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에델라는 자신의 눈이 예로니아 백작을 닮았다고 말했지만, 테라비스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에델라처럼 생긴 눈은 맹세코 에델라의 눈밖에 없었다. 쌍꺼풀이 진 눈은 어쩌면 아버지를 닮았을 수도 있었다. 선량하게 이어지는 눈매 역시 그를 닮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파란 눈동자는 에델라만이 가진 것 같았다. 저 파란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저 파란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왜?”
오늘따라 유독 테라비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아 에델라가 물었다.
“아, 아니. 그냥 예로니아 백작님의 눈이 어땠던가를 생각하고 있었어. 너랑 닮았었나 하고.”
“사람들은 닮았다고 했었어.”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응.”
“그렇군.”
아니다. 아니었다. 에델라의 눈은 예로니아 백작의 눈과 닮지 않았다. 저런 눈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애는 네 눈을 닮으면 좋겠군.”
“……응?”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에델라의 눈이 예뻐서,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녀의 눈을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왜? 낳을 거잖아?”
저도 당황했으면서 테라비스는 그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렇지.”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베개가 바스락거려서 귓가가 시끄러웠다. 그 순간, 에델라는 뭐가 이상한지 깨달았다.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손을 잡는 것도 매일 이였지만, 테라비스와 이렇게 마주하고 누운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각자 천장을 바라보거나,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마주 보고, 이렇게 한 침대에 누운 것은 처음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다시 귓가가 시끄러워졌다. 에델라의 심장 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