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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뜻밖의 귀인 (13/92)

13화. 뜻밖의 귀인2021.06.14.

“이쪽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곧 단장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직원이 에델라를 안내한 곳은 그녀가 테라비스를 처음 만났던 그 단장실이었다. 어쩐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어 에델라는 그곳을 둘러보았다. 처음에 테라비스를 보았던 책상 너머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저 책상에서 처음 계약서를 썼었지.’

에델라는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펜은 저 펜이었고.’

테라비스가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신이 사인했던 펜이 그의 책상 한쪽에 놓여 있었다. 불과 2주도 지나지 않았는데, 많은 일이 일어나서인지 그것이 한참 지난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음?”

그날의 일을 떠올리던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책상에 얹어져 있는 서류를 보고 저도 모르게 그것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반쯤은 호기심이었고, 반쯤은 반가운 마음에서였다.

“오래 기다렸어?”

몇 분 후, 문이 열리고 단장실 안으로 테라비스가 들어왔다. 그제야 에델라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나가자.”

테라비스가 고갯짓으로 바깥을 가리키자, 에델라는 서류를 도로 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뭘 보고 있었어?”

“그냥 기다리다가 네 책상 위에 있길래 심심해서 봤어. 혹시 보면 안 되는 거였어?”

“아니. 그런 건 없어. 누가 보면 안 되는 건 그렇게 허술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지 않지.”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자 예의 바르게 자신의 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우리 계약의 제4항을 잊지 않았겠지요, 부인?”

“물론이죠.”

이 문을 나서서 남들 앞에 서는 순간부터 존댓말을 하라는 뜻을 담아 테라비스가 말하자, 에델라 역시 기억하고 있다는 듯 웃으면서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아까 본 서류에 잘못 해석된 게 있던데, 알고 있어?”

“잘못 해석된 게 있다고?”

“응. 원두를 콩이라고 번역을 해놨더라고.”

“번역?”

에델라의 말에 막 문을 열려던 테라비스가 멈칫했다. 그의 책상에 놓여 있던 서류 중에서 번역본은 하나밖에 없었다. 전문적인 번역가를 구하지 못해, 미처 해석하지 못한 빈칸들로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안다비아의 서류였다.

“당신이 말한 서류라는 게…….”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은 열지 않고 잔뜩 굳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테라비스 때문에 에델라는 당황했다.

“미안. 역시 보면 안 되는 서류였어?”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본 서류라는 게 안다비아어로 된 서류를 말하는 거야?”

“응.”

“그 서류에 잘못 번역된 게 있다고?”

이제 아예 문의 손잡이를 놓아버린 테라비스가 온전히 몸을 돌려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제 상체를 에델라에게 기울이고, 눈은 홉뜬 채로.

“원두도 콩의 일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원두는 원두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테라비스의 기세에 눌린 에델라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테라비스는 좀 무서웠다.

“번역이 틀렸다는 걸 안다는 건, 원본을 읽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걸 보고 해석했다는 거고?”

하지만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물러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뚝을 양손으로 덥석 쥐고선 물었다.

“당신이 안다비아어를 안다는 거지?”

깜짝 놀란 에델라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테라비스는 더욱 제 얼굴을 그녀에게 들이대며 물었다.

“으, 으응.”

고개를 뒤로 쭉 빼며, 에델라가 대답하자 테라비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토록 찾던 안다비아어 전문가가 바로 자기 눈앞에 있었다니!

“단장님, 나가시기 전에 이거 하나만 봐주시고 가시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던 마틴이 두 사람을 보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군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문을 닫는 마틴의 모습에 그제야 테라비스는 자신이 지금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일하는 사무실에서 에델라에게 키스를 하려던 중이었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자세였다.

“아니, 잠깐, 마틴!”

테라비스는 얼른 에델라를 놓고는 마틴이 닫고 나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괜찮습니다. 신혼이시니 그러실 수도 있죠.”

이미 몸을 돌리고 제 방으로 가고 있던 마틴이 테라비스의 외침에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따뜻한 배려를 담아 말했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것 보다 찾았어!”

“네? 뭘 찾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안다비아어 전문가 말이야!”

“네? 어디서요?”

“여기서!”

마틴의 눈이 ‘저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물론 눈은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마틴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 여기! 아니, 이분!”

처음에 손가락으로 에델라를 가리켰던 테라비스는 이내 공손히 양 손바닥을 펼쳐 다시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단장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마틴이 자신의 안경을 추켜올리며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에델라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해선 눈을 깜박이고 말았다.

“사모님께서 안다비아어를 하실 줄 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니까!”

“정말이십니까, 사모님?”

“조금요.”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테라비스의 말이 옳다고 대답해주었다.

“안다비아어는 배우는 사람이 적은 모양이던데, 뜻밖이군요.”

“그냥 기회가 닿아서 어릴 때 조금 배웠어요.”

마틴은 어릴 때 조금 배웠다는 말에 속으로 살짝 실망했지만, 상대가 상사의 부인인지라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어릴 때 조금 배운 정도라면 테라비스의 말과는 달리 전문가라고 볼 수 없었다. 자신이 의뢰했던 안다비아어를 안다는 사람에게 받아온 번역본이 중요한 부분은 뻥 뚫려있는 것처럼. 아무래도 긍정적인 자기네 단장이 조금 오버하는 것이라고 마틴은 생각했다. 더불어 회사에서도 부인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못하는 신혼이니 제 부인의 조그만 능력도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여서 그럴 것이라고도 짐작했다.

“자, 이리 와봐……요, 부인.”

평소처럼 반말을 했다가 마틴의 앞이라는 것을 깨닫곤, 얼른 ‘요’를 붙이며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에델라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잘 몰랐지만, 일단 테라비스를 따라갔다. 영문도 모른 채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시키는 대로 책상의 서류를 집어 들었고, 그가 원하는 부분을 읽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었을 때, 에델라가 본 것은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두 남자였다.

“비어 있는 부분을 다 읽으시네요?”

마틴은 방금 에델라가 읽었던 부분 중 여러 군데가 자신이 오늘 받아온 번역본에서는 비어 있던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그랬나요?”

그저 안다비아어만 보고 읽었던 에델라는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장님.”

마틴은 고개를 돌려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조용히 엄지를 세워 그에게 보여주었다.

“에델라!”

그것을 본 테라비스는 그대로 에델라를 안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꺅!”

테라비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에델라가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테라비스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서 두 바퀴나 빙글빙글 돌고서야 다시 내려주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지금까지도 에델라는 영문을 몰랐다.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 당신이 바로 우리 붉은바람 상단의 귀인이 된다는 일이지! ……요.”

“귀인요?”

“인사해, 마틴. 우리 번역가님이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번역가님.”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마틴은 테라비스가 시키는 대로 인사를 했다.

“번역가요?”

에델라는 이제 제발 설명해달라는 듯이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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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안다비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루젠타에 그렇게 없는 줄은 몰랐네요.”

상점가를 걸어가며 드디어 테라비스에게서 설명을 들은 에델라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돈이 걸린 사업인데,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시작도 하지 못할 처지였다면 그렇게 난리를 부릴 법도 했다.

“하지만 안다비아에서는 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좀 있을 텐데 아예 번역해서 서류를 보내 달라고 했으면 되었잖아요?”

“물론 그것도 생각해보긴 했습니다만, 시작이 그렇게 되면 상대방에게 능력이 모자라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최대한 이쪽에서 해결해보려고 했던 거죠.”

“말하자면 기 싸움이라는 건가요?”

“비슷하지요.”

테라비스는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에델라에게 존댓말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깜박하다가 그녀에게 눈 흘김을 당하거나, 한 박자 늦게 ‘요’를 붙이곤 했지만 몇 차례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제법 익숙해졌다. 익숙해진 소감을 말하자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뭔가 상류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면 누가 바넬레오 백작님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다 에델라에게 존댓말을 듣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목소리나 발음이 더욱 상냥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괜찮은데?’

심지어 테라비스는 집에서도 계속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아, 여깁니다!”

테라비스는 한 가게의 앞에서 멈췄다.

“내 단골 가게에요. 우리가 수입한 원단을 사용하는 가게지요. 그래서 내가 딱 보기만 해도, 얼마나 비싼 원단인지를 알 수 있답니다.”

두 사람이 가게 앞에 서자 자동문처럼 문이 열렸다. 물론 자동문이 아니라 가게 안쪽에서 점원이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바넬레오 님.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활짝 웃으면서 환대를 하는 점원의 얼굴에는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사모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처음보는 에델라에게도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는 점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고가의 물건을 구매하는 테라비스였다. 그가 방문한 날에는 매출이 껑충 뛰어, 기분 좋아진 사장이 그녀에게 보너스를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테라비스 혼자가 아니라 부인까지 데리고 왔다. 그녀의 머리는 평소에 테라비스가 사는 금액의 2배를 재빠르게 계산했고, 그건 매장의 1달 치 매출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차를 한잔 드릴까요?”

그녀는 웃으면서 먼저 차를 권했다.

“바넬레오 님께서 좋아하실만한 물품을 미리 골라 두었어요. 차를 들고 계시면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올게요.”

“그러도록 하죠.”

테라비스가 먼저 소파에 앉았고, 에델라도 그의 옆에 앉았다. 점원의 융숭한 대접에 테라비스는 참지 못하고 ‘봤지? 이 남편의 위상을?’이라는 뜻을 담은 뻐기는 눈빛으로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물론 에델라는 눈을 돌려 그런 테라비스를 무시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는 참으로 매너 좋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주어서 좋았었는데, 참으로 못 볼 꼴을 봤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잠시 후. 에델라는 그것보다 훨씬 더 못 볼 꼴을 보고야 말았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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