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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고마워 (12/92)

12화. 고마워2021.06.11.

  에델라와 테라비스는 그날 저녁에도 침실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

“…….”

또다시 침묵의 시간이었다. 서로 익숙해지기 위해서 손을 잡는 1시간이 아니라, 침묵의 1시간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시간이었다.

“몇 분이나 지났어?”

“……3분.”

“…….”

“…….”

“자리 바꿀까?”

“왜?”

“몇 분 지났는지 궁금한데, 내가 계속 물어보면 당신이 귀찮잖아?”

“괜찮아. 4분 지났어.”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어깨 너머로 시각을 확인하고 말해주었다. 자리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에델라도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궁금했으니까. 다만 문제는 시계를 보고 있든, 보고 있지 않든, 시간이 잘 가지 않는 데에 있었다.

“오늘은 뭐 했어?”

“바느질.”

“무슨 바느질?”

“지난번에 산 옷이 몸에 조금 안 맞는 것 같아서 수선했어.”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요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진주목걸이가 유행이라지?”

테라비스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며 생각해두었던 대화거리 중에 하나를 야심 차게 꺼내 들었다.

“그래?”

하지만 에델라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녀의 반응에 테라비스는 잠시 패닉에 빠졌다.

‘어째서? 보통 귀부인들은 보석, 드레스, 향수 같은 것이 최대관심사인데? 그래서 내가 떼돈을 벌 수 있었던 거라고!’

보통의 귀부인들은 그렇긴 했다. 하지만 테라비스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에델라가 보통의 귀부인이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한 귀족이었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테라비스였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국인과 거래를 하게 되면 반드시 그 나라의 인사말을 배워서 첫인사를 건네는 테라비스였다. 상대방의 아주 작은 장점을 매우 크게 칭찬할 수 있는 그였고, 상대방과의 소소한 공통점으로 대단한 유대감을 끌어낼 수 있는 재주를 가진 테라비스였다. 하지만 에델라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너무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바람에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침착해, 테라비스. 아직 시간은 많아.’

그래. 그게 바로 문제였다. 시간이 너무 많다는 것.

“취, 취미는 뭐지?”

“독서.”

“…….”

테라비스에게는 없는 취미였다. 이제 그는 인정해야 했다. 완전히 실패라는 것을. 적어도, 오늘 밤은.

“저기, 있잖아.”

조심스러운 에델라의 목소리가 테라비스의 푹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할 말이 없으면, 꼭 굳이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아니, 뭐, 그렇게 굳이 애쓴 건 아닌데.”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얼른 변명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려는 것뿐이었어.”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어.”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입안에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니? 그걸 꼭 꼬집어서 이야기를 해야 해?’

테라비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찰나였다.

“그래도 고마워.”

에델라의 말에 끓어오르려던 것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뭐가?”

“이것저것.”

에델라는 저를 쳐다보고 있는 테라비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것저것 뭐?”

“여러 가지.”

끈덕지게 테라비스의 질문이 따라붙어도, 에델라는 고집스럽게 벽만을 바라볼 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당신이 날 위해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 애써준 것들.”

에델라의 귀가 어느새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것들, 고마워.”

이상했다. 테라비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같이 싫었던 그 침묵이, 지금은 너무도 기꺼웠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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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저녁의 테라비스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함께 저녁을 먹던 에델라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며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당연히 있지!”

마치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테라비스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순간, 그 표정을 보며 에델라는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잘되었네.’라고 말하고 뒷이야기는 모른 척, 잘 삶아진 감자를 먹을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인데?”

하지만 그 좋은 일이 무슨 일인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테라비스의 얼굴을 예의 바른 에델라는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초대장을 받았어.”

테라비스는 품 안에서 은은한 하늘색의 봉투를 꺼냈다. 마치 에델라에게 보여주려고 미리 준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포웨이스 남작이 보낸 무도회 초대장이야.”

“춤추는 걸 좋아하나 봐?”

“그럴 리가. 내 춤솜씨는 형편없어. 이런 귀족 무도회에서 추는 사교댄스는 더 형편없고.”

“그런데 무도회 초대장에 왜 그렇게 좋아해?”

“포웨이스 남작은 이제까지 한 번도 날 초대한 적이 없거든.”

“그래?”

“그래. 고귀한 귀족 나리 중에서는 천한 장사치랑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분들이 많거든. 포웨이스 남작이 바로 그 고귀한 귀족 나리지. 이제껏 나를 초대한 적도, 우리 붉은바람 상단이랑 거래한 적도 없어. 아니, 없었어.”

테라비스는 싱긋 웃으며, 손에 든 하늘색 초대장을 흔들었다. 이제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초대를 받았고, 조만간 거래를 틀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 당신 덕분이지.”

찡끗, 윙크하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내 덕분이라고?”

“그래. 이제까지는 귀족 콧대를 세우던 포웨이스 남작이 갑자기 나한테 초대장을 보낸 이유가 뭐겠어? 당신 때문이지. 자, 봐. 여기에도 쓰여 있잖아? 바넬레오 부부라고.”

그는 겉봉투에 받는 사람의 이름이 쓰인 부분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곳에는 바넬레오 부부를 초대한다고 적혀 있었다.

“당신은 아는 사이겠지? 같은 귀족이니까?”

“알긴 알지.”

에델라는 말을 아꼈다. 포웨이스 남작가라면 물론 에델라도 알긴 했다. 루젠타는 작은 항구도시였고, 귀족 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예로니아 백작 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지체 높은 귀족 가였다. 당연히 포웨이스 남작 가와 예로니아 백작 가는 교류가 있었고, 저 하늘색 봉투의 초대장을 받은 적도 있었다. 예로니아 백작 가가 망하기 전에는. 에델라의 집이 망하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류는 끊겼다. 비단 포웨이스 남작 가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가문이 그랬다. 처음에 한두 번 도와주었던 사람들도 예로니아 백작 가가 더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등을 돌렸다. 예로니아 백작 가의 우편함에 초대장은 끊겼고, 대신 쌓이기 시작한 것은 독촉장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테라비스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쇼핑해야겠어.”

테라비스는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쇼핑이야말로 좋은 생각이라는 것처럼.

“분명 다른 귀족들도 올 테니, 내가 그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것을 다들 알 수 있도록 존재감을 발휘해야 할 테니까.”

“존재감이랑 쇼핑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당연히 상관이 있지. 가장 최신의 가장 비싼 옷을 입고가야 그들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 테니까.”

“사람이 꼭 그렇게 겉모습만…….”

“봐.”

에델라의 말을 끊으며 테라비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면을 보라고? 그게 어떻게 보이는데?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건 결국 겉모습이야. 일단 겉모습이 그럴듯해야 가까이에 접근할 수 있고, 가까이 가서 봐야 내면을 볼 수 있다고.”

테라비스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사람의 겉모습이 바로 이 초대장이랑 똑같은 거야. 초대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에델라는 그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자신이 보았던 많은 책과 그녀의 안에 가득한 도덕심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테라비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에델라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역시 초라한 모습일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초대받지 못했었다. 몰락한 백작 영애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웨이스 남작이 에델라를 초대한 것은, 그녀가 테라비스와 결혼을 해서 돈이 많아졌고 그래서 자신의 무도회에 에델라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이제껏 자신을, 예로니아 가문을 무시했으면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포웨이스 남작이 아니꼬웠다.

“뭐?”

“가고 싶지 않다고. 당신 혼자 다녀와.”

“안돼. 여기 쓰여 있잖아. 바넬레오 부부라고.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를 함께 초대한 거야. 같이 가야지.”

“하지만…….”

“우리 계약을 잊지 않았겠지?”

“계약에 무도회에 참석한다는 건 없었잖아.”

“아니지. 분명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조항이 있었잖아. 부부 동반 사교모임인데, 당신이 협조해야 할 것 아니야.”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당시에 자신이 협조한다고 했던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도 몰랐고. 하지만 테라비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의 말이 옳은 것도 같았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포웨이스 남작은 한 번도 날 초대한 적이 없어. 이건 거의 당신의 도움으로 받아낸 초대장이고, 난 이걸 기회로 활용한 생각이란 말이야.”

“무슨 기회?”

“당연히 붉은바람 상단이 사업을 확장할 기회지. 이제껏 평민이라는 이유로 내가 얼마나 많은 핸디캡을 받아왔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난 내가 백작 가의 후계자 정도는 낳아야 인정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반응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초대장을 툭, 치며 테라비스는 말했다.

“그러니까 에델라.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길 바라.”

일부러 계약서에 있는 단어를 써가며 테라비스가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 에델라가 더는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겠어.”

역시나. 에델라의 허락에 테라비스는 씩 미소 지었다.

“좋아. 그럼 내일 10시, 아니지. 문을 늦게 여는 상점도 있으니 11시에 우리 상단으로 와.”

“왜?”

“아까 말했잖아. 쇼핑해야겠다고.”

“나도?”

“당연하지.”

“난 괜찮아. 있는 옷을 입고 가면 돼.”

“당신에게 무도회에 입고갈 옷이 있다고? 뭘 입고 가게?”

“며칠 전에 산 옷이 있잖아. 내가 수선도 해두었어.”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그 옷을 말했다. 에델라가 테라비스에게 받은 돈은 이미 몽땅 예로니아 백작 가로 보내버려서 한 푼도 없었다. 그렇다고 옷을 사기 위해서 또 테라비스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런, 에델라. 그건 그냥 외출복이잖아. 이건 무도회라고. 그것도 귀족 무도회.”

“무도회 한번 갈 거라고 드레스를 새로 사는 건 낭비잖아.”

“아니지. 그건 투자야. 내가 그 무도회에서 몇 명에게 내 이름을 알리고, 계약 몇 건을 따낼 기회에 비하면 몇 푼 되지도 않을 투자라고.”

“하지만…….”

“적극 협조.”

“…….”

계약서의 문구가 에델라에게 방어막을 펼쳤다. 그것은 매우 강력했다.

“……알았어.”

결국,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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