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어색한 시간2021.06.07.
에델라의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키스라는 말에 머릿속에 그날의 그 키스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뜨겁고 격렬했던 에델라의 첫 키스가. 정말이지 그런 촉감은 처음이었고, 그런 호흡도 처음이었으며, 그런 느낌도 처음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그 감각은 너무 생소하고, 또 당황스러웠으며, 동시에…… 좋았다. 뭐가 어떻게 좋았냐고 묻는다면, 에델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에 매달려 그저 허우적거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이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좋았는지 에델라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기분 좋았다는 것밖에는.
“다, 다른 건 없어?”
“포옹 다음에 키스 말고 다른 게 뭐가 더 있어?”
“어…….”
에델라는 생각했다.
“음…….”
아주 열심히 생각했다.
“아…….”
하지만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에델라가 그런 것을 생각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됐어. 없는 것 같네. 손잡기 일주일, 포옹 일주일, 키스 일주일이야. 그리고 그다음에는 잠자리고.”
“자, 잠깐만!”
“다른 걸 뭔가 추가하고 싶다면, 네가 말해봐.”
“어……. 그…….”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말만 하면 다 들어주겠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녀가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쪽으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키스가 싫은 거야?”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테라비스는 눈앞의 에델라를 느긋하게 쳐다보았다.
“그때 싫었어?”
질문이었지만,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키스를 했을 때, 에델라는 결코 그를 밀어내지 않았고, 가뿐 신음을 내뱉었으며, 자신의 키스에 분명히 반응했었다.
“그게…….”
거봐. 똑바로 대답 못 하잖아.
“그런…….”
고고한 귀족 아가씨는 거짓말을 못 하지.
“시, 싫지는 않았지만……”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테라비스는 살짝 얼굴을 붉힌 에델라를 바라보며 다시 빙긋 웃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합의한 거다? 손, 포옹, 키스야.”
* * *
잠자리에 들기 전,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침대에 마주 보고 앉아 손을 잡았다.
“…….”
“…….”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양손을 맞잡고,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으려니 슬슬 심심해졌다.
“오늘은 뭐 했어?”
인내심이 더 부족한 쪽은 테라비스였다.
“꽃꽂이. 정원에 꽃이 예쁘길래.”
“아, 혹시 저거 네가 한 거야?”
“응.”
테라비스는 새삼스럽게 창가에 놓여 있던 화병을 바라보았다. 못 보던 것이 있기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 에델라가 했다고 하니 새롭게 느껴졌다.
“괜찮네.”
사실 꽃꽂이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꽃이라는 것은 원래 다 예쁜 것 아니겠는가?
“…….”
“…….”
다시 둘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신은 뭐 했어?”
이번에는 에델라가 먼저 물었다.
“일.”
“…….”
“……”
너무도 간단했던 테라비스의 대답 덕에 다시 침묵이 시작되었다.
“몇 분 지났지?”
“음……. 10분.”
시계를 마주 보고 있던 에델라가 테라비스의 너머로 시각을 확인하곤 대답했다.
“그렇군.”
“…….”
“…….”
그리고 다시 침묵. 째깍거리는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과연 이게 옳은 길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두 사람 다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미 합의된, 그리고 계약서로 남긴 계약이었으니 행위는 이어져야 했다. 신용과 계약에 철두철미한 장사꾼인 테라비스와 정직과 신의를 미덕으로 여기는 귀족 영애인 에델라의 계약은 그저 종이 한 장이 아니라 꼭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 .
“끝났다!”
뚫어지라 시계만 쳐다보고 있던 에델라가 잽싸게 테라비스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면서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 테라비스가 시계를 보자, 정말이지 칼같이 1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이제 자자.”
그렇게 말하는 에델라의 표정은 더없이 기뻐 보였다. 드디어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그 시간이 지난 것에 축배라도 들고 싶은 듯했다.
“그래. 자자.”
그리고 그건 테라비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1시간 전의 자신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1시간이나 손을 잡겠다고 생각한 거냐고 멱살을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옆에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테라비스는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노라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괜히 손이 신경 쓰였다. 테라비스는 돌아눕는 척을 하며 이불 속에서 제 손을 끄집어냈다. 모로 누워 물끄러미 제 손을 쳐다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어제 보았던, 아침에 보았던, 조금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자신의 손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에델라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었다.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이람? 애도 아니고 다 커서 여자랑 하는 짓이 겨우 손잡기라니?’
테라비스는 괜히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내일도 이 손으로 에델라의 작은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1시간을 그렇게 잡고 있을 것이다. 조용한 침묵 속에서.
‘안돼. 내일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생각해둬야겠어.’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는 테라비스였다. 한편, 테라비스가 뒤척이는 소리에 움찔한 에델라는 저도 모르게 힐끗 곁눈질했다. 그러자 에델라의 눈에 널찍한 테라비스의 등이 보였다. 테라비스가 그저 돌아누웠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자, 에델라는 혼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의 옆에 누워 있는 일은 생각보다 긴장되는 일이었다. 당분간은 손만 잡기로 둘이 합의를 했고, 테라비스가 그것을 지켜줄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에델라의 마음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경직되고, 손을 움직였다가 테라비스에게 닿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단단히 제 배 위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자는 걸까?’
힐끗, 에델라의 시선이 다시 옆에 누운 테라비스를 향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너른 등은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그 위에 두꺼운 목과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테라비스가 자는 것처럼 보이자, 에델라 몸의 경직이 조금 풀렸다.
‘내일도 손을 잡겠지?’
또 어색한 침묵의 1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자, 에델라는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1시간 동안 키스를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버리는 것 같은 그 키스를 1시간 동안이나 한다면, 자신은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아니, 잠깐만?’
자려고 감았던 에델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손을 분명 1시간 동안 잡는다고 했었다. 포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에델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하아~.”
에델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테라비스의 등쌀에 샀던 옷이 가슴은 끼고, 허리는 헐렁해서 자신의 몸에 맞게 수선하던 중이었지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손이 자꾸만 멈춰버렸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녹스 할멈의 다정한 물음에 에델라는 들고 있던 옷을 결국 내려놓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
축 처진 에델라의 어깨가 지금 하는 말이 진심임을 뒷받침해주었다.
“뭐가요? 결혼생활요?”
녹스 할멈의 말에 에델라의 고개가 아래위로 작게 끄덕였다.
“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 같아.”
“아가씨께서는 뭘 생각하셨는데요?”
“잘 모르겠어. 그냥 빨리 서로 필요한 것을 가지고 나면 끝날 거로 생각했던 것 같아. 중간에 뭐가 있는지는 보지 않으려 했었어. 바보같이.”
“상황이 워낙 급했으니까요.”
당시의 에델라는 그녀의 말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난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참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약값을 벌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바느질을 하고, 자신은 사흘에 겨우 작은 빵 한 덩이를 쪼개서 먹던 에델라였다. 정말 더는 쥐어 짜낼 돈이 없는 그녀에게 밀린 병원비와 약값을 당장 지급하지 않으면, 더는 환자를 봐줄 수 없으며 약도 줄 수 없다는 병원의 마지막 통보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외상으로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것이라는 것을. 그나마 예로니아라는 이름을 보고 그만큼 기다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실이라는 것을.
“할멈. 내 머리카락을 팔만한 곳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
파리한 안색과 애절한 눈빛으로 에델라는 녹스에게 그렇게 부탁했었다. 세간살이를 팔아치우고, 텅 빈 예로니아 저택에서 살아온 에델라는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 일부까지 팔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런 에델라에게 녹스가 알려준 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팔 수 있는 사람이었다. 테라비스 바넬레오. 에델라에게 없는 ‘돈’을 가진 남자.
“저기, 할멈. 혹시 요즘도 바느질 일감이 있을까?”
“어머, 바느질 일을 하시게요?”
“낮엔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돈은 이제 충분하지 않으신가요? 바넬레오 님이 매월 꽤 큰 금액을 지급한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렇긴 한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아주 빨리 끝날 수도 있고.”
“그래도 아이를 낳으려면 최소한 10개월은 걸리는걸요.”
“그래. 그렇긴 하지만…….”
어제 테라비스와 협의한 바에 따르면 최소 11개월은 걸릴 일이었다. 하지만 에델라는 괜한 조급함이 들었다.
“잘 모르겠어. 그냥 뭔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좀 초조한가 봐.”
“인생은 원래 다 그런 법이랍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이지요.”
자신의 눈에는 한참이나 어린 에델라를 보며 녹스는 미소 지었다. 테라비스가 마음의 빗장을 풀게 만드는 바로 그 인자한 웃음이었다.
“때로는 그래서 불행하고, 때로는 그래서 행복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이죠.”
녹스의 말에 에델라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이제껏 에델라의 인생은 그래서 불행한 편에 속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에델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녹스는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쥐었다.
“아가씨는 이제 행복해지실 거예요. 우리 아가씨처럼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분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누가 행복해지겠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할멈.”
다정한 축복의 말에 에델라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넬레오 님은 생각보다 그리 무서운 분은 아니세요. 오히려 생각보다 착하고, 다정하신 분이시랍니다.”
녹스의 말에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능글맞고, 무례한 사내라고 생각했다. 아무 말이나 막 하고, 비싼 것만 찾고, 엉큼한 말과 손을 가진 뻔뻔한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응. 나도 알아.”
하지만 무서워하는 에델라를 배려해주었다. 버럭거리면서도 에델라가 하는 말은 들어주려고 애썼다.
“테라비스는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에델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