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손만 잡고 잘게2021.06.04.
“방법을 찾았어!”
테라비스는 호쾌하게 소리쳤다.
“어떤 방법인데?”
에델라의 물음에 테라비스는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었다.
“손만 잡고 잘게.”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깜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오빠, 믿지?”
* * * -똑똑. 어젯밤과는 달리 테라비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크를 했다.
“누구십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평소와 다름없는 마틴의 목소리에 빙긋 웃었다. 그래. 사실 이게 맞았다. 자신이 두드리지 못할 문은 없었고, 자신이 노크하면 안에서는 대답이 나와야 했다.
“어, 나야.”
문을 열자, 단장실과 비슷하지만 조금 작고, 좀 더 간결한 느낌의 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마틴이 테라비스의 눈에 들어왔다.
‘정상 출근은 했지만, 아직 기분이 다 풀리지는 않은 모양이군.’
현재 마틴의 상태를 짐작하며 테라비스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전에 네가 확인해달라고 했던 건들.”
테라비스는 손에 들고 있던 몇 개의 서류뭉치를 곱게 마틴의 책상 한쪽에 내려놓았다.
“제가 그저께 드린 서류 아닙니까? 다음 주에 주신다더니 벌써 다 보셨습니까?”
“내가 좀 유능하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어제 자발적인 야근을 하면서 달리 할 일이 없어서 본 서류였다. 더불어 퇴근 후 손님방에서 심심해서 본 것도 있었다.
“제가 다시 확인해보고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일단 어제 말씀드린 안다비아어를 좀 안다는 사람에게 번역을 의뢰해두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선까지는 해보겠다고 하더군요.”
“잘했어. 일부분이라도 해놓으면, 나중에 정식 번역가에게 맡겼을 때 시간이 좀 단축되겠지.”
테라비스와 마틴의 대화에서 어제의 앙금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난 나가볼게. 일 봐.”
“문제가 뭡니까?”
“어?”
“서류를 저에게 주고, 밖에 나가서 짐을 나르시려는 거잖아요?”
마틴의 시선이 테라비스의 아래위를 훑었다. 편한 바지와 셔츠차림이었다. 그 셔츠가 현란한 호피 무늬인 것이 마틴의 눈에 좀 거슬렸지만, 자신이 테라비스의 패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붉은바람 상단의 부단장이었지, 테라비스의 집사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테라비스는 호피 무늬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앞섶의 단추는 이미 서너 개를 푼 상태였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짐을 나르러 갈 사람처럼 말이다.
“또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뭐 고민이라기보다는…….”
테라비스는 자신의 고민을 마틴에게 털어놓을지 말지 망설였다. 힐끗, 마틴을 쳐다보자 단정하게 빗어넘긴 검은 머리와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회색빛 눈이 보였다. 좀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긴 하지만, 잘생긴 편이었다. 근육질의 테라비스는 마틴이 남자치고는 말랐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주 비쩍 마른 편은 아닌 데다가 키는 제법 컸다. 즉, 마틴은 제법 멀끔한 편이었다. 물론 그 결벽증이 좀 문제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성들은 더러운 것보다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마틴, 연애해봤어?”
테라비스는 마틴이 자신의 연애 상담사가 되어주길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왜냐하면, 테라비스는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으니까. 일찍이 고향을 떠나서 어린 시절 친구와는 이미 단절된 지 오래였고, 루젠타에서는 일하느라 바빴다. 애초에 만나는 사람은 전부 비즈니스 상대라 생각하는 장사꾼 테라비스였으니,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요.”
하지만 테라비스의 기대와는 달리 마틴은 딱 잘라서 아니라고 대답했다.
“한 번도?”
“네.”
“왜?”
“별로 흥미가 없는 관계라서요.”
“아니, 나이가 몇인데 연애도 안 해봤어?”
“그럼, 단장님은요?”
“뭐?”
“연애 문제로 고민하시는 걸 보면, 단장님도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실 만큼 연애 경험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
마틴의 분석은 꽤 정확했다. 테라비스는 친구가 없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연인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너 짜증 나는 스타일이라고 말한 적 있던가?”
“네. 제법 많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마틴은 테라비스의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는 그 비난이 제 생각이 정확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일단 말씀해보시죠.”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마틴은 팔짱을 끼고,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내가 왜 경험도 없는 너한테 말해야 하지? 별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저는 단장님께서 짜증을 낼 만큼 충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번에도 마틴의 말이 옳았다.
“만약, 상대방이 이쪽을 무서워한다면…….”
“사모님이 단장님을 무서워합니까?”
“……너 진짜 짜증 나.”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이번에도 마틴은 테라비스의 말을 가벼이 넘겼다.
“그런 경우라면 천천히 다가가셔야겠죠.”
“천천히?”
“두 분, 그렇게 오래 연애하신 게 아니신 거죠?”
“그렇지.”
오래 연애를 안 한 게 아니라 아예 연애 따위는 하지 않았고, 알게 된 지 일주일 만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었다.
“아직 서로 잘 모르는 사이라 그런 것 같은데, 천천히 다가가서 내가 너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먼저 충분히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누굴 해칠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야?”
“상대방은 그걸 모르니까 무서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무해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줄 수 있도록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거죠.”
“흐음…….”
한 번도 연애해보지 않았다는 마틴의 조언은 제법 그럴듯했다.
“연애는 안 해봤다면서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지?”
“저희 이사벨라를 처음 데려올 때 그랬거든요.”
“이사벨라?”
마틴의 입에서 나온 여성스러운 이름에 테라비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연애 안 해봤다며? 연애는 안 하면서 여자는 집에 데려가는 거야?”
“사람을 무슨 그런 파렴치한으로 만드는 겁니까?”
“그럼?”
“이사벨라는 제 반려뱀입니다.”
“반려 뭐?”
“뱀이요.”
마틴의 대답에 천천히 테라비스의 입이 벌어졌다.
“뱀을 키운다고?”
“네.”
“연애는 안 하고, 반려자는 없지만, 반려뱀은 있다는 건가?”
“네.”
“그렇……군.”
테라비스는 기계처럼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의 뜻밖의 반려동물에 그 외에 다른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네가 말한 건 뱀의 경우 아닌가? 에델라는 사람이라고.”
“사람도 역시 동물이니까요.”
마틴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 미소가 어쩐지 뱀을 닮은 것 같다고, 테라비스는 생각했다. * *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에델라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방법을 찾았다며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서재로 데려오더니, 하는 말이라곤 손만 잡고 잔다느니, 오빠 믿지? 따위의 말이니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상황이 무서운 거지?”
“무섭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반박했다. 분명히 첫날밤에는 파들파들 떨고, 둘째 날 밤에는 아예 도망을 가버렸으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 상황이 달갑지는 않은 거잖아?”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면 왜 그랬냐고 따져 묻고 싶은 테라비스였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젯밤 녹스 할멈과 이야기를 했듯이, 에델라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럼 말싸움이 될 게 뻔했다. 테라비스는 괜한 말싸움으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익숙한 상황이 아니니까 말이야. 처음이지? 남자와 그런 상황.”
“당연하지.”
“하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지 않겠어? 당신도 남자랑 손 정도는 잡아 봤을 것 아니야. 그러니 손잡는 건 괜찮겠지.”
“아니. 잡아 본 적 없는데.”
“뭐?”
“남자랑 손잡아 본 적 없다고.”
혼전순결은 흔하다 쳐도, 첫 키스도 안 해봤다는 것도 드물긴 해도 가능하다고 쳐도, 남자랑 손도 못 잡아 봤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당신, 대체 어디서 산 거야? 수도원? 산꼭대기?”
“내내 루젠타에서 살았어.”
“그런데 남자 손도 한번 안 잡아 보고 이제껏 뭘 한 거야?”
“아무것도.”
“뭐?”
“……아무것도 안 했다고.”
집이 망해도, 에델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안의 살림살이들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배가 고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귀족 여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태생이 귀족이기에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수예, 꽃꽂이, 승마 등의 쓸데없는 고급 취미들뿐이었다. 멀건 수프만 먹다가 쓰러질지언정 일하러 갈 수 없었고, 받아주는 곳도 없었다. 그동안 그녀의 가족들이 그나마 굶어 죽지 않았던 것은 에델라가 녹스 할멈에게 부탁해 귀부인들의 수예품들을 일감으로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에델라 백작과 백작 부인이 반대할 것이 뻔해서 비밀로 해야 했다.
“어쨌든. 손 정도는 당신도 잡을 수 있겠지?”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는 그의 손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커다란 손이었다. 두툼하고, 남자다운, 그리고 거칠어 보이는. 에델라의 손과는 달랐지만, 똑같은 손이기도 했다.
“응. 손은 잡을 수 있을 거야.”
“좋아. 그럼 하루에 한 시간씩 손잡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기한은 얼마쯤이 좋을까?”
“……보름?”
“…….”
보름 동안 손만 잡고 있겠다는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할 말을 잃었다.
“사흘.”
“짧아!”
“손이잖아! 그냥 손! 악수랑 똑같은 손!”
“악수랑은 다르잖아!”
“아, 잠깐. 에델라. 그때 당신 나랑 악수하지 않았어?”
악수라는 말에 테라비스는 처음 에델라를 만난 날을 생각했다. 그날 분명히 자신은 에델라랑 악수했었다.
“했어.”
“그런데 무슨 남자랑 손도 못 잡아 봤다는 거야? 이거 완전 거짓말쟁이 아니야?”
“달라! 악수랑은!”
“뭐가 다른데? 당신은 악수를 발로해?”
“악수는 그런 거랑 달라.”
“그러니까 뭐가 다르냐고.”
“연인끼리 손을 잡고 다니는 거랑 악수가 어떻게 똑같아? 그건 확연히 다른 경우야.”
“그래봤자 손이랑 손인 것은 똑같잖아.”
“달라!”
에델라는 전에 없이 분해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연인끼리 손을 잡는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아주 로맨틱하고, 아주 친밀한 행위라고. 한 손으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 그 한 손은 쓸 수가 없어. 모든 것은 다른 한 손으로만 해야 한다고. 자신의 한쪽 팔을 포기하는 것과 똑같은 아주 고귀하고 숭고한 행위야.”
“그저 손잡기에 그렇게 엄청난 행위가 있다고?”
“그래!”
“……그래. 알겠어. 네 말대로 해. 아주 고귀하고 숭고한 행위니까 특별히 사흘이 아니라 일주일로 하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코흘리개 꼬마들이 자신의 한쪽 팔을 희생하면서까지 서로를 생각하는지 미처 테라비스는 몰랐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단계적으로 일주일 코스로 하는 것 어때?”
“나쁘지 않네.”
“손잡기 다음은 포옹이라는 데는 이의 없겠지.”
“그래.”
에델라는 무난한 진행에 동의를 표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다음은 키스야.”
“키스?”
하지만 이어진 급격한 진도에 에델라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