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질문과 대답2021.05.31.
“제길!”
문 앞에 서서 테라비스는 나지막이 혼자 욕설을 지껄였다. 그 앞에서 몇 걸음을 서성이던 테라비스는 결국 굳은 결심을 한 듯, 문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단호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커다란 주먹을 들어 문에 노크하려는 순간, 그의 손은 또 뭔가에 걸린 듯 우뚝 멈추고야 말았다.
“하……. 참, 나…….”
사실, 이게 벌써 세 번째였다. 테라비스가 문을 두드리려고 시도한 것은. 하지만 번번이 그의 주먹은 문에 닿지 못했다.
“미치겠네. 내 집, 내 방, 내 침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한숨을 푹푹 내쉬며 테라비스는 신세 한탄을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끝끝내 노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세 번이나 시도해서 안 되었다면, 이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나, 여기 서서 뭘 하시는가요?”
“아, 할멈.”
테라비스가 뒤를 돌자 보인 것은 녹스 할멈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 미소를 보자 테라비스는 일순간, 긴장이 탁 풀리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늘 늦게 들어오셨으니, 피곤하실 텐데 얼른 들어가서 쉬지 않으시고요.”
“아…… 그게…….”
에델라와 아직 협의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서 그렇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테라비스는 어물어물 대답을 피했다. 사실, 오늘 늦게 들어온 진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에델라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해서. 더 정확하게는 에델라에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어서.
“그러니까, 할멈이 에델라의 유모였다고?”
“네. 그랬죠.”
“에델라는 원래 겁이 많나?”
“음…….”
녹스는 옛날 기억을 떠올리는 듯, 살짝 뜸을 들였다.
“네. 맞아요. 그랬던 것 같네요.”
그러다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녹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평소에는 아주 의젓했지만, 사실은 겁이 많은 아이였죠. 밤이면 자기 방에 귀신이 나올 것 같다며, 베개를 들고 찾아오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저 커튼이 흔들렸을 뿐이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유리창을 두드린 거라고 설명해 드려도 도통 들으시지 않으셨죠.”
그녀의 설명에 테라비스의 머리는 흰 잠옷을 입고, 제 몸만 한 베개를 껴안고 있는 어린 에델라를 상상했다. 분명 어린 에델라를 본 적도 없는 테라비스였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예전에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지금과 똑같은 금발에 맑은 파란 눈. 조그만 키와 오동통한 볼살. 분명히 아주 귀여운 꼬마 숙녀였으리라.
“그리고 에델라 아가씨는 생각보다 고집이 세시거든요.”
“아! 그건 나도 동감해.”
녹스의 말에 테라비스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있나요? 제 침대에 이불을 들추고 들어오라고 했죠. 그리곤 어린 아가씨의 등을 토닥이며 같이 자는 수밖에는 없었죠.”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는 달리 녹스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 말간 파란 눈을 보면 정말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에델라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해드리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 그것도 공감해.”
자신 역시 그랬다. 에델라의 겁먹은 눈동자를 보면,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파들파들 떠는 모습을 보면, 보듬어 주고 싶었다.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보면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보호해주고, 지켜주고 싶다는.
“벌써 에델라 아가씨에 대해서 잘 아시는군요.”
“아! 그게…….”
녹스의 말에 테라비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웃는 낯의 녹스 할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는 다 안다는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녹스 할멈에게는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히면 손해가 난다는 것을 장사치인 테라비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제 생각과 마음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작고 동글동글한 노인네에게는 무장해제가 되어 저도 모르게 제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저 인자한 미소를 본 뒤에는 더 그랬다. 마치 할머니에게 일과를 투정하는 손자처럼 말이다.
“아니, 뭐,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고.”
“좋은 일이죠. 부부끼리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주 좋은 일이랍니다. 후후훗.”
“내가 에델라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라니까? 녹스 할멈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계약…….”
“쉿! 누가 듣겠습니다.”
녹스의 낮은 목소리에 테라비스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에델라에게 테라비스를 소개해준 녹스는 둘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돈에 환장한 몰락 귀족이라는 둥, 돈으로 신분을 산 졸부라는 둥, 나쁜 소문만 퍼질 터였다.
“좋은 밤 되세요. 늙은 할멈은 이제 자러 가야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녹스! 녹스 할멈!”
테라비스가 자신을 위한 변명의 말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녹스는 들은 체 만 체하며 유유히 복도를 떠나갔다.
“아, 참, 미치겠네.”
다시 텅 빈 복도에 혼자 남게 된 테라비스는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그래도 못 들어가고 있던 침실 앞인데, 에델라가 겁이 많다는 이야기까지 들어버렸으니 더욱 못 들어가게 생겼다. 어제와 같은 일을 벌이는 것은 당연히 안 될 말이고, 자신이 침실에 들어가기만 해도 에델라가 겁을 먹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무슨 짓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에델라는 그것을 모르니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오해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밖에 서 있을 수도 없었고, 계속 방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으며, 계속 에델라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고, 제 머리를 긁어대고,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테라비스는 결국 뒤돌아섰다.
“이건 날 위해서야.”
그리고 아무도 듣지 않는 변명을 했다.
“내가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고, 내가 변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고, 내가 그렇게 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라고.”
구시렁거리며 테라비스는 손님용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혼자 잠이 들어야 할 것 같았다. * * *
“……!”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침대에 앉은 에델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바싹 들어가고, 손은 잠옷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에델라는 자신을 다독였다.
“할 수 있어.”
맙소사! 정말 할 수 있을까? 에델라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자신이 보았던 그 광경들도. 일순간 에델라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자신은 못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좋아.”
에델라의 얼굴은 금방 울상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이후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빚쟁이가 돈을 내놓으라며, 아니면 에델라를 저 먼 곳으로 팔아버리겠다고 을렀을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예의 바르게 양해를 구한 에델라였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을 또박또박하는 에델라를 보며 당황한 것은 오히려 빚쟁이였다. 어느 귀부인의 손수건에 자수를 놓아주고 그 삯을 받을 때, 어지간히 돈이 귀한 듯하여 적선하는 셈 치고 일거리를 준 것이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도 에델라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생긋 웃으며, 부인의 배려에 감사드린다며, 귀족 영애다운 우아한 태도를 보여주었을 따름이었다. 비록 빚쟁이가 돌아간 뒤 홀로 방에서, 또 그 부인의 집에서 나온 다음 어두운 골목길에서, 에델라 혼자 눈물을 훔쳐냈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정신 차려, 에델라.”
에델라는 작은 손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었다.
“네가 하자고 한 일이잖아. 네가 스스로 계약한 거잖아. 더는 테라비스에게 폐를 끼칠 순 없어.”
입술을 사리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은 해내리라. 결코, 도망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에델라는 테라비스가 침실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
혹시 테라비스가 소리도 없이 문을 연 것인가 싶어 눈을 감고 있던 에델라는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아무도 없는 방과 여전히 굳게 닫힌 방문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에델라는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테라비스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복도를 지나가던 다른 사용인의 목소리일지도 몰랐다. 결국 에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다. 살짝 귀를 가져다 대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도 같았다. 조금 망설이던 에델라는 용기를 내어 문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문을 열었다.
“…….”
에델라를 맞이한 것은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였다.
“내가 잘못 들었었나 봐.”
양옆의 복도까지 둘러보고 나서, 에델라는 중얼거렸다.
“일이 아주 바쁜가 보네.”
테라비스로부터 자신은 일이 많아서 늦게 들어올 예정이니, 저녁 식사를 먼저 하라는 전갈을 받았었다. 그래서 혼자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 에델라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좋은 소파에 앉아서 향긋한 차와 함께 좋아하는 책을 읽는 그 순간은 참으로 행복했었다. 테라비스가 아니었으면, 누리지 못했을 호사였다. 계약대로라면 테라비스의 의무는 월 오백 루나로 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끝내지 않았다. 에델라가 이 집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었고, 계약서의 돈 이외에도 에델라가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주었다. 겁을 먹은 에델라를 위해서 두 번이나 잠자리를 물려주기까지 했다. 그는 계약 이상으로 에델라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반드시 용기를 내야겠다고 다짐한 에델라였다. 테라비스가 약속을 지켰으니, 자신도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하지만 테라비스가 없으니 에델라의 용기는 내일로 미뤄야 할 듯싶었다.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음?”
섭섭하다고? 에델라는 방금 자기가 떠올린 생각 때문에 당황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울상을 지었던 에델라였다. 무섭고, 겁나고, 떨려 했던 에델라였다. 그러니 테라비스가 일이 바빠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오늘 에델라 혼자서 자야 한다고 하면, 좋아해야 하는 에델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섭섭하다니?
“내가 왜?”
에델라의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복도에는 에델라 외엔 아무도 없었고, 에델라는 답을 몰랐으니 그 질문에 대답해줄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미쳤나 봐.”
에델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문을 닫았다. 조용한 복도에는 이제 진짜 아무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남녀의 물음만이 미로처럼 복도를 헤맬 뿐이었다. 언젠가는 답을 찾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