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일진이 사나운 날2021.05.28.
“어제는 미안했어.”
아침 일찍 침실로 돌아온 에델라는 조심스럽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
하지만 소박맞은 신랑은 그저 사과 한마디에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설령 어제 그렇게 뛰쳐나가 놓고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에델라의 얼굴이 까슬하고, 눈 밑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사과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뒤를 돌아누웠다. 어제 테라비스의 얼굴을 가격했던 그 베개가 푹신하게 그의 머리를 받쳐주었다.
“미안해.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서 그랬어.”
널찍한 테라비스의 등을 향해서 에델라는 다시 사과의 말을 전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밤새도록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던 테라비스도 슬그머니 용서를 해줄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럼, 뭐. 이제는 안 놀랄 건가?”
슬그머니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말을 받았다.
“어……. 그게…….”
그의 질문에 에델라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어제도 자신이 그렇게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엉겁결에, 본능적으로 그런 것이었다.
“노력해볼게.”
결국, 에델라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그것이었다. 테라비스에게 먼저 결혼을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다. 둘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둘에게 모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에델라였다. 그러니까 테라비스와의 밤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견뎌볼게.”
에델라는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말했다.
“견뎌낸다니?”
“오늘 밤에는 절대로 도망가지도 않고, 꾹 참고 침대에 꼭 남아 있을게. 아니면 나를 묶어놔 줄래?”
에델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기가 막혔다. 자신은 정당한 계약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아래에서 억지로 참아내는 여자를 봐야 하며, 심지어 그 여자를 묶기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그런 변태가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잘도 내가 기운차게 할 일을 할 수 있겠군?”
“못 해?”
“당연하지! 나는 그런 변태가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해!”
“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너무 크잖아!”
“원래 큰데 어쩌라고? 이걸 어디 가서 반으로 잘라 와?”
“가능해?”
“가능할 것 같아?”
“……아니.”
“…….”
“…….”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자, 에델라.”
“꺅!”
그저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에델라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테라비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 놀라서 그랬어.”
“뭐가 또 놀랐는데?”
“네가 움직여서?”
“묶이는 건 네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할 것 같군. 내가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말이야.”
“…….”
“하지만 그렇게 안 할 거야. 생각도 하지 마.”
“알았어.”
에델라는 진심으로 테라비스를 묶을 생각도 했던 것인지 살짝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한숨 섞인 목소리로 테라비스가 입을 열자 에델라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미안하고, 정말로 무섭고, 또 정말로 자기도 이런 자신을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밥이나 먹자.”
결국, 테라비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말이었다. 당장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 * *
상단으로 출근한 테라비스가 곧장 향한 곳은 그의 안락한 단장실이 아니라, 한창 선적 중인 배였다. 마침 오늘은 옆 공국으로 수출할 밀가루 포대를 배에 싣는 날이었다.
“어이!”
간단한 인사라고 하면 인사인 한마디를 하고 테라비스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내친김에 셔츠 단추도 서너 개를 푸르고, 소매는 걷어 올렸다.
“읏차!”
그리고 한가득 쌓여 있는 밀가루 포대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자, 묵직한 무게가 테라비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것을 무시하며 어깨의 짐을 추스르고, 팔에 더 힘을 주자 셔츠 안에 있던 테라비스의 팔과 어깨의 근육이 더욱 단단해졌다. 성큼성큼 짐을 나르기 시작하는 테라비스의 허벅지 역시 더욱 단단해졌다. 몇 번 왕복하자 금세 그의 이마에서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거기서 몇 번을 더 왕복하자 흰 셔츠가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장님!”
마틴이 테라비스를 찾았을 때는 테라비스의 등이 이미 흠뻑 젖은 뒤였다.
“출근이 늦으신 것 같아 혹시나 해서 와봤더니 역시나 여기 계셨군요.”
“나 찾았어?”
테라비스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몸을 움직였더니,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에델라와의 문제는 어느새 잊고 있었다. 그저 눈앞의 짐을 옮기고, 그 무게만을 이겨내고, 제 몸의 근육들을 독려하는 것. 이게 바로 테라비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취미였고, 운동이었다. 테라비스의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복근, 그리고 돌덩이처럼 단단한 팔과 허벅지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네. 그 말씀 하신 안다비아 건으로요.”
“오! 나의 똑똑한 부단장 마틴이 역시 이번에도 문제를 해결했나 보군.”
“아니요.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고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멍청한 부단장 같으니라고.”
똑똑한 부단장에서 단숨에 멍청한 부단장이 되어버린 마틴이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똑똑한 부단장으로 자신의 칭호가 격상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건이 과연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데에 있었지만 말이다.
“수소문해서 안다비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긴 했습니다만.”
“다만?”
“할 줄은 알지만, 잘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죠. 안다비아어를 할 줄은 알지만, 전문 안다비아어 번역가라고 하기에는 힘들 거라는 겁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없어?”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루젠타에서 안다비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여긴 작은 도시니까요. 수도에 가면 그럴듯한 번역가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럼 너무 늦어.”
“네. 바로 그게 문제죠.”
테라비스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마틴의 말을 잘랐고, 마틴 역시 테라비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동의했다. 이제 같이 일한 지 거의 3년째가 되어 가는 둘은 서로의 생각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해석 좀 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아무리 루젠타가 작은 도시라도 그렇지, 외국어를 잘하는 인간이 그렇게 없단 말이야? 지난번에 캔디스어를 하는 사람은 금방 찾았잖아.”
“캔디스어에 비해서 안다비아어는 그리 녹록한 언어가 아니거든요.”
“뭐가 그렇게 어려운데?”
“일단 제국어와 어순이 같은 캔디스어에 비해서 안바디아어는 아주 자유분방한 어순을 가지고 있거든요. ‘테라비스는 땀을 흘린다.’라면 그 나라는 ‘테라비스는 흘린다 땀을.’입니다.”
“안다비아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저야 모르죠.”
마틴은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게다가 애초에 안다비아는 루젠타와 그다지 교류가 없는 나라이니까요. 루젠타 항에서 안다비아로 향한 마지막 배가 무려 15년 전입니다. 평생 한 번 가볼지 어떨지 모르는 나라말을 누가 익히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 점이 대박인 거지!”
테라비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무려 15년이야. 안다비아의 그 고급 실크와 그 비싼 후추와 그 최상급 커피가 루젠타로 직수입되지 않은 지 15년째라고. 실크와 후추는 주변국에서 어느 정도 공급이 되고 있지만, 커피는?”
“다른 곳을 거쳐서 들어오는 바람에 이미 산패가 진행되어 루젠타에 들어왔을 때는 맛이 떨어지죠.”
“하지만 우리가 이걸 직수입을 한다면?”
“대박이겠죠.”
“더불어서 지금 안다비아에서 유행하기 시작한다는 페이넬의 라탄과 유리 공예품을 우리가 수출한다면?”
“그 또한 대박이겠죠.”
“맞았어!”
정말이지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벌써 몇 달째 테라비스가 공을 들이고 있었고, 마틴 또한 자신의 능력을 가장 쏟아붓고 있었으며, 두 사람이 시간이 날 때마다 필요한 자본과 경로, 접촉할 상단을 알아보고, 가능한 많은 시뮬레이션을 예상해 본 프로젝트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성공이 바로 코앞이야, 마틴.”
“그렇죠.”
“안다비아 프로젝트에 비하면 보석상 입찰 건은 그냥 푼돈에 불과해.”
“그 푼돈 때문에 저더러 입찰서도 제대로 못쓰냐고 구박하신 겁니까?”
“지난 일은 잊어, 마틴. 그게 사나이다운…….”
테라비스는 별것 아니라는 제스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짐을 한창 나르기 위해서 잔뜩 힘을 주고 있었던 테라비스의 팔 감각이 조금 둔화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손을 조금 더 뻗고 말았다. 그리하여 살짝, 아주 살짝, 테라비스의 손끝이 마틴의 가슴을 쳤다.
“시, 실수야.”
테라비스는 얼른 고의가 아니었음을 말하며 제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지만, 마틴은 더럽고,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밀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었고, 어디서 묻은 것인지 검은 무언가도 묻어 있었다. 거기다 손바닥 역시 땀이 나 있었다. 최악은 그 셋이 만나 허연, 혹은 더러운 회갈색으로 뭉쳐서 테라비스의 손바닥 주름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었다. 더러운 손을 본 마틴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지자, 천하의 테라비스도 침을 꼴깍 삼켰다.
“미안, 마틴.”
테라비스는 거듭 사과를 했다. 자신이 구박해도, 심한 말을 해도, 심지어 그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떠넘겨도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 마틴이 참지 않는 오직 하나는, 자신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절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3년 전, 타 상단에서 일하고 있던 마틴의 능력이 탐이나 붉은바람 상단으로의 이직을 제의했을 때, 그가 한 말이었다. 테라비스가 정색을 하며 자신은 그런 취미가 없다고 했을 때, 마틴은 더욱 정색하며, 물리적으로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붉은바람 상단의 유능한 부단장 마틴은 결벽증이었다.
“단장님.”
낮은 목소리가 테라비스를 불렀다. 더불어 마틴의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 번 더 사과할까? 테라비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물론 사과야 한 번 더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마틴이 용서를 하느냐의 문제였다. 언젠가 테라비스는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마틴의 특이점을 깜빡하고 말았다. 그동안 수고했다며 마틴에게 어깨동무했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의 뺨에 뽀뽀해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테라비스는 숙취로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마틴의 사직서를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마틴을 붙잡기 위해서 다시는 마틴에게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닿게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저는 오늘 이만 퇴근해보겠습니다.”
아직 점심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마틴은 그렇게 말했다. 만약, 테라비스가 보통의 상태이기만 했더라도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른을 앞둔 마틴 제노아는 사회성이 뭔지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테라비스는 땀투성이였고, 방금 보았던 손은 너무 더러웠다. 그의 사회성이 찍소리도 못하고 소멸할 만큼 더러웠다. 마틴은 지금 당장 테라비스가 닿았던 옷을 벗고 싶었고, 직접 닿지는 않았지만 몸을 씻고 싶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래! 퇴근해! 지금 당장!”
마틴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퇴사’가 아니라 ‘퇴근’이자, 테라비스는 열렬히 허락했다.
“휴우…….”
그 상황에서도 단장인 자신에게 묵례하고 뒤돌아선 마틴의 뒷모습을 보며 테라비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일진이 사납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테라비스의 모습은 어쩐지 처량했다. 겨우 떨쳐버렸던 에델라에 대한 고민이 다시 스멀스멀 테라비스에게 달라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