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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토끼 같은 부인 (6/92)

6화. 토끼 같은 부인2021.05.21.

“좋아. 네 맘대로 해.”

테라비스는 마음을 넓게 쓰기로 했다. 어차피 토끼 아닌가? 식인토끼든, 살인토끼든 제아무리 무서워도 토끼였다. 작고, 귀여운 토끼.

“그래서 내 부인께선 오늘 계획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

“왜 자꾸 대답을 안 해!”

“……베이컨이 튀었어.”

에델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접시로 날아온 이물질을 쳐다보았다.

“입에 음식물이 남아 있을 때는 이야기를 하지 마.”

“뭐?”

“사람에게 삿대질도 하지 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미래의 바넬레오 백작님이 되실 분인데, 그 정도의 예의범절은 지키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내 예의범절 선생님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별로 당신 같은 제자는 두고 싶지 않아.”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는 다시 기가 막혔다. 일주일 전에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제 발로 걸어와 결혼 계약을 제의하는 그 모습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후우…….”

테라비스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것은 그의 페이스가 아니었다. 수십억 루나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도 온전히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던 테라비스가 아니던가?

“됐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어.”

에델라의 페이스에는 말려들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테라비스는 단호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별로 할 일이 없으면 쇼핑을 해.”

“무슨 쇼핑?”

“아침에 일어나서 당신 짐을 봤어. 단출하기 짝이 없는 가방 두 개가 다더군.”

“있을 것은 다 있어.”

“그래? 내 눈에는 누더기 두 벌과 누더기 속옷 세 벌과 다 떨어진 누더기 한 켤레가 있더군. 아! 누더기 모자도 한 개.”

“내 짐을 열어봤어?”

“아니. 열어본 것은 하녀. 나는 옆에서 그 하녀가 짐 정리를 하는 것을 구경했지.”

싱글거리며 자신은 매우 신사적이었다는 듯이 말하는 테라비스를 에델라는 살짝 노려보았다. 자신의 옷은 누더기가 아니었다. 속옷도 누더기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구멍 나서 기운 부분이 좀 많을 뿐이었다. 신발도 꿰매면 신을 수 있었다. 게다가 모자는 기운 자국도 없었다. 그저 조금 닳아서 살짝 안쪽이 비칠 뿐.

“그러니까 쇼핑을 좀 해.”

“돈 없어.”

에델라의 답변은 말끔했다.

“줄게.”

그리고 테라비스의 답변 역시 말끔했다.

“괜찮아. 구멍이 난 건 꿰매면 다시 입을 수 있어.”

“난 내 부인이 그런 누더기를 입고 다니는 게 싫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 갑부 바넬레오가 자기 부인에게는 돈을 아끼는 쩨쩨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 아니야.”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갑자기 ‘저건 뭐지?’ 싶어서 테라비스는 살짝 턱을 들고 가늘게 눈을 뜨고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이 그렇게 잘도 나오지?”

“무슨 말?”

“내 부인…… 같은 것.”

‘내 부인’이라는 말을 하며 에델라의 귓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귀여운 분홍색으로 에델라의 귀가 익어 있었다. 아마도 베어 물면 복숭아처럼 향긋한 냄새가 나고, 다디단 맛이 날 것만 같았다. 부끄러워하는 에델라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테라비스의 목울대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길, 귀엽잖아!

“그게 뭐가 어때서? 결혼했으니까 맞는 말이잖아?”

“하지만 계약 결혼이니까,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지. 둘이 있을 때부터 천천히 연습해야, 남들이 볼 때 자연스럽지 않겠어? 나의 부인, 내 사랑, 나의 신부, 달링, 사랑하는 자기, 허니~.”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더욱 진하게 물들어가는 귓불을 바라보며 테라비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에델라였다.

“자, 사랑하는 나의 부인께서 쇼핑할 돈을 주도록 하지.”

테라비스는 주머니에 있던 돈을 몽땅 털었다. 벼락부자인 테라비스이니만큼 대충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돈도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테라비스는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직 지금 테라비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저 분홍색 귀를 깨물면 무슨 맛이 날까 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몽땅 써줄게.”

에델라는 작은 손으로 식탁에 놓여 있는 돈을 움켜쥐었다.

“이런.”

테라비스의 목소리에 이번엔 또 뭐냐는 듯 에델라가 그를 쳐다보았다. 테라비스의 손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내 베이컨이 여기까지 튀었군.”

슬쩍, 테라비스의 손이 에델라의 귓가를 스쳤다. 에델라는 남의 입 안에 있던 베이컨이 자신의 피부에 닿았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더 없는지 자신의 손으로 제 귀를 쓸어보기까지 했다. 애초부터 베이컨 따위는 없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럼 이만. 바쁜 남편은 출근해야겠군.”

테라비스는 싱긋이 웃으면서 식당을 나섰다. 손에는 조금 전 스쳤던 에델라의 분홍색 귀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아주 보드라웠고, 약간 따뜻했으며, 손끝으로 느껴지는 솜털이 사랑스러웠다. 닿았던 그 순간을 생각하자 테라비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역시……. 달달할 것 같은데?”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테라비스의 입에서는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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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테라비스가 붉은바람 상단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그의 등장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어제 결혼을 한 새신랑이 너무도 일찍 출근한 탓이었다.

“아니, 새신랑께서 벌써 출근하십니까?”

아침을 못 먹고 온 것인지 한 손에는 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뭔가를 끄적거리던 회계담당자의 질문에 테라비스는 그저 싱긋 웃었다.

“신혼여행도 안 가셨습니까?”

“사정이 좀 있어서.”

“그런데 그런 예쁜 신부님을 어디서 만나신 거죠? 사장님께서 연애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요.”

“그냥 오다가다가.”

사무실에 앉아 있으니까 제 발로 걸어 들어왔지.

“세상에~ 능력자이십니다. 백작 영애이신 데다가, 그렇게 어여쁘신 분을!”

“내가 능력이 좀 좋지.”

테라비스는 가볍게 응수하며 단장실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제 몸을 집어넣기 직전. 테라비스는 몸을 돌려 회계담당자를 쳐다보았다.

“입 안에 음식물이 있을 때는 말하는 게 아니야. 예의 없어 보이잖아?”

“네?”

테라비스의 입에서 나온 예의라는 단어에 회계담당자는 그가 출근했을 때보다 더욱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단장실 안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예의라고? 비즈니스 예절 외에는 거의 무법자와 같은 테라비스 바넬레오의 입에서 예의? 그야말로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었다.

“결혼하더니…… 사람이 변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입으로 빵을 욱여넣고 씹었다.

“아, 참!”

다시 문이 벌컥 열리고 테라비스가 고개를 내밀자, 혹시 자기 이야기를 들었나 싶어서 그는 빵을 꿀떡 삼켰다. 테라비스가 뭐라고 하면 얼른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마틴은?”

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외근 나가셨습니다. 아마 점심때쯤 들어오실 것 같은데요?”

“돌아오면 나한테 오라고 해. 안다비아 교역 건의 서류를 들고.”

“네, 단장님.”

“그리고.”

테라비스는 덧붙일 말이 있다는 듯,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결혼하면 당연히 사람은 달라지는 법이야. 이전과 같을 수는 없지. 아무렴, 그래야지.”

결혼 2일 차 새신랑 테라비스 바넬레오는 유부남 3년 차에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 * *

“쇼핑은 했어?”

“했어.”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테라비스는 반말을 했고, 에델라 역시 여전히 반말을 했다.

“한 가지 제안이 있어.”

“뭔데?”

“집에서는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해도 좋아. 나는 아량이 넓은 남자니까.”

진짜 아량이 넓은 남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법이지만, 애초에 테라비스는 원래 무법자 기질이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안 돼.”

“뭐가?”

“남들 앞에서는 나에게 반말을 하면 안 된다고.”

“왜?”

“그렇게 하면 남들이 나를 우습게 여길 테니까.”

“…….”

에델라는 테라비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테라비스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에델라의 입이 열심히 오물거리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에델라가 입 안의 음식을 모두 넘길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당신도 나한테 존댓말을 해줘. 남들 앞에서는.”

“그건 또 왜?”

“그렇게 안 하면 남들이 나를 우습게 여길 테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반말한다고 해서 그 여자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없어.”

“평민이 귀족에게 반말하면 그 귀족을 우습게 여길걸?”

“제기랄! 그놈의 귀족!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쨍그랑거리며 테라비스의 포크와 나이프가 테이블에 내던져졌다. 하지만 그렇게 성질을 내봐도 방도가 없었다. 바로 그 더럽고 치사한 귀족이 되고 싶어서 에델라와 결혼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내를 존중해주는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해.”

잔뜩 찌푸린 얼굴의 테라비스에게 에델라가 말을 걸었다.

“우리 아버지는 평생 우리 어머니를 존중해주셨고, 그걸 매일 존댓말로 표현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거야?”

“아니. 난 반말이 더 편해.”

“그럼 뭐야?”

“그런 방식도 있다는 거야.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중요한 건 마음이라고.”

거기까지 말한 에델라는 옆에 있던 포도주잔을 집었다. 식사 전에는 검붉은 포도주가 반쯤 따라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바닥이 보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요한 건 마음이라…….’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별로 이해하지 못했다. 마음이 뭐 어쨌는데? 그게 눈에 보여? 어떻게 아는데?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은 에델라의 말을 곱씹는 동안 테라비스의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는 거였다.

“그래. 좋아. 지금은 우리 계약서가 없으니, 나중에 추가하자고. 제4항, 평소에는 말을 편하게 하지만, 바깥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반드시 서로에게 존댓말을 한다.”

“좋아.”

“그래. 당신이 좋다니 다행이네.”

테라비스가 극적인 합의를 기념하는 마음으로 잔을 들어 올리자, 에델라 역시 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잔은 이미 다 비워진 채였다.

“술을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그다지 마셔 본 적은 없어.”

“그래? 비싼 포도주이니 기회다 싶어서 열심히 마시는 건 아니고?”

“비싼 거야?”

“엄청.”

이 집에서 대체 안 비싼 건 뭘까라고 생각하며 에델라는 잔을 받았고, 테라비스는 포도주를 좀 더 사놔야겠다고 생각하며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은 제4항의 탄생을 기념하며 건배했다.

“오늘 스테이크가 아주 잘 굽혔군.”

기분이 좋아진 테라비스가 음식을 칭찬하자 에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슬쩍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혹시 스테이크도 비싼 거야?”

“당연하지.”

에델라는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건?”

에델라는 식욕을 떨어뜨리는 끔찍한 녹조 색상의 벽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고급 안목의 백작 영애께선 알아보는군. 아주 고가의 수입 벽지이지.”

테라비스는 뿌듯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 미소를 보며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취향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포도주와 함께 조용히 삼켰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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