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결혼식2021.05.14.
결혼식은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몰락한 예로니아 가문이라면 그럴 법도 했지만, 조그만 항구 도시의 벼락부자인 바넬레오 쪽이라면 훨씬 더 화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예로니아 가문의 친인척 몇 명, 그와 수를 맞춘 듯 바넬레오 가문의 친인척 몇 명과 그의 거래처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몇 명만이 하객으로 왔을 뿐이었다. 장소는 도시의 작은 신전이었고, 결혼식의 진행 또한 신전의 늙은 신관이 도맡아서 했다. 물론 피로연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레스토랑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로니아 가문의 오랜 역사와 바넬레오 가문의 엄청난 부를 생각하면 결혼식은 그야말로 형식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촐했다.
“결혼 축하하네, 바넬레오.”
웃으면서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비에라 자작을 보며 순간 테라비스는 이 자작이라는 작자가 미쳤나를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비에라 자작님.”
물론 얼굴로는 활짝 웃으면서, 그의 축하 인사에 화답을 했지만 말이다.
‘여길 어떻게 왔지?’
그는 원래 루젠타에서 명실공히 무역으로 단단한 입지를 가지고 있던 비에라 상단의 단장이었다. 하지만 테라비스의 붉은바람 상단이 승승장구하자 이인자로 밀려나고 있는 처지이기도 했다. 자작이라는 직위와 귀족의 특권을 내세워 붉은바람 상단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그를 당연히 테라비스는 초대한 적이 없었다.
“루젠타에 몇 없는 귀족 가문이다보니, 우리가 예로니아 백작 가와는 인연이 좀 있지.”
“아, 그러셨군요.”
“자네 신부도 힘들 때, 내가 몇 번 도와준 적이 있지.”
그 도움이라는 것이 예로니아 백작가의 귀한 보석이나 가구들을 헐값에 사들인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분명 그는 도움을 준 적이 있긴 했다. 그게 아니면, 에델라에게 몇 번 수예품을 맡기고 트집을 잡아서 값을 깎은 것을 말하던가.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하다니, 참 인연이란 모를 일이군. 대체 둘이 어떻게 알게 되었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비에라 자작은 테라비스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한,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결혼이라니? 이제껏 귀족이라는 직위를 무기로 붉은바람 상단을 상대해왔던 비에라에게는 둘의 결혼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둘이 결혼한다고 테라비스가 귀족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 그것도 자신보다 더 높은 백작의 사위가 되었으니 이제 조그만 루젠타의 사교계에서는 그에 준하는 취급을 받을 수 있을 게 뻔했다. 작은 항구도시 루젠타에서 귀족 가문이라고는 열 개도 채 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백작 가는 예로니아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글쎄요. 사람 인연이라는 것이 꼭 시간에 비례하지는 않더군요.”
“호오~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비에라의 말에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자신 본 여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알 수 없는 꽃향기가 났으며, 자신에게 안겼을 때는 더없이 말랑하고 포근했으며,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네. 비슷합니다.”
테라비스는 빙긋이 웃으며 비에라의 말에 긍정을 표했고, 비에라는 그 모습이 못 견디게 꼴 보기 싫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그의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테라비스!”
하지만 새된 목소리가 테라비스의 뒤통수를 때리자, 그의 미소는 순식간에 굳어져버렸다.
“저를 찾는 분이 있군요. 실례합니다, 자작님. 부디 피로연까지 재밌게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미소를 유지한 체 테라비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또 한 명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정확하게는 테라비스가 초대는 했지만,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세상에. 내 며느리를 결혼식장에서 처음 보다니, 게다가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야 대화를 나누다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일이니?”
에델라를 자신의 앞에 세워 둔 채, 목청껏 테라비스를 부른 사람은 바로 테라비스의 어머니였다. 먼 도시에서 찾아온 그녀는 화려한 화장과 화려한 드레스와 화려한 보석으로 번쩍이는 사람이었다. 사치와 허영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태어나면 딱 이 사람이다 싶을 만큼.
“딱히 그렇게 경우를 찾으신 적도 없잖아요.”
멋들어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테라비스가 심드렁하게 그의 어머니에게 대꾸했다.
“내가 얼마나 경우가 바른 사람인데!”
테라비스의 모친은 정색하며 그의 말을 부인했다.
“네, 네. 그러시겠죠.”
하지만 테라비스는 결코 그녀의 말에 공감하지 않는 듯했다. 그저 대충 대꾸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님 대부분은 피로연장으로 돌아간 후였다. 한쪽 구석에 예로니아 백작과 그의 부인이 자신들의 딸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테라비스의 눈에 보였다.
“내가 그 경우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에델라 양?”
“네, 어머님.”
고압적인 모친의 말투에 에델라는 살짝 움찔했지만, 이제부터 그녀 역시 자신의 어머니와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공손히 대답했다.
“무슨 신부가 지참금도 없이 결혼하는 거죠?”
“아…….”
“내가 그렇게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말이죠. 내 친구들은 다들 지참금으로 뭘 샀다, 다이아몬드 세트를 받았다고 말을 하면서 나에게 물어보는데 정말이지!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어야 했어요.”
“그러……셨군요.”
“그러셨군요가 아니죠. 아무리 망한 귀족 집안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없죠!”
아무래도 테라비스의 무례함은 그의 모친을 닮은 모양이었다.
“그 반반한 얼굴과 몸매로 우리 테라비스를 잘도 꼬신 모양인데, 이런 부자 남편을 낚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할 것 아닌가요?”
테라비스의 천박함 역시 그의 모친을 닮은 것 같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지참금으로 다이아몬드 5종 세트를…….”
“이미 늦었어요.”
불쑥 끼어든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뭐?”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잔뜩 심통이 난 표정으로 테라비스의 모친이 고개를 돌렸다.
“이미 늦었다고요.”
왜 다 들어놓고 못 들은 척은 하냐는 듯이 아까보다 더욱 불퉁한 목소리로 테라비스는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서 내뱉었다.
“결혼 전에 반대하셨어야죠. 이미 하고 나서 지참금이니 뭐니 말하면 뭐해요?”
“결혼 전에 반대할 시간이 있었니? 편지를 받고 당일에 바로 출발했는데 여기 도착하니 이미 식이 시작되었더라!”
그랬다. 둘은 계약서에 사인한 그 날, 바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그것도 일주일 뒤로. 어차피 서로의 목적이 있는 결혼이니 질질 끌 것이 없다는 것이 둘의 의견이었고, 처음으로 한 번에 일치한 결론이었다.
“아쉽네요. 어제 도착하셨으면 아들의 결혼식을 훌륭하게 파투를 내실 수 있으셨을 텐데.”
“파투라니! 너는 내가 무슨 네 결혼이 파투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나는 그저 상식적인 지참금을 신부에게 말하는 건데!”
이미 본인 앞에서 결혼식 당일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테라비스의 모친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생각하지 않거나.
“게다가 네 동생은 아직 도착도 하지 못했잖니. 우리가 무슨 대가족이라고 가족이 다 모이지도 않고 결혼식을 올린다니? 세상에 단 세 명뿐인 가족인데 말이다.”
“공부한다고 바쁜 애를 뭐하러 불러요?”
“공부보다 제 오빠 결혼이 더 중요하지! 게다가 너도 알잖니? 그 애도 나 못지않게 반짝거리는 아기들을 좋아하는걸? 그 애도 분명히 새언니가 자기에게 예단으로 뭘 사줄까 두근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을…….”
“언제 집에 가실 거예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어머니의 말을 테라비스는 싹둑 잘라냈다.
“테라비스! 이 어미는 오늘 도착했다!”
“그럼 오늘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여행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더 힘들죠.”
“테라비스!”
테라비스는 화를 내는 제 어머니와 오늘 결혼한 신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대로 어머니를 집에 데려갔다간 새신부는 하루 온종일 잔소리만 듣고 있을 것이 뻔했다. 자신 앞에서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잘하던 예쁜 입이 꾹 닫힌 채로, 저 예쁜 얼굴은 바닥만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테라비스는 결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돈으로 에델라를 해방해 줄 수 있다면야, 별문제 없었다. 그는 졸부였으니까.
“그리고 집에 도착하면 곧 다이아몬드 5종 세트가 배달될 테니,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죠. 비싼 물건이 주인 없는 집에 배달이 되면 좀 그렇지 않나요, 어머니?”
테라비스는 빙긋이 웃으면서 모친에게 말했다. 그리고 상식과 경우는 없었지만, 눈치만은 갖춘 에델라의 시어머니였다. 그녀는 테라비스의 말이 조용히 이대로 돌아가면 다이아몬드를 사주겠다는 말임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그래. 네 말이 옳아. 집주인이 집을 오래 비우면 안 되지. 오늘 돌아가야겠어.”
그녀은 활짝 웃으면서 아들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아들 얼굴도 봤고, 아들의 사랑스러운 신부도 봤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셈이지.”
역시나 남을 향한 배려심은 다이아몬드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테라비스의 모친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어쩌면! 예쁘기도 해라! 역시 귀족이라서 그런가, 우아함이 아주 넘치네.”
“감사합니다, 어머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델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던 사람이 이제는 아주 예뻐 죽겠다는 듯이 굴었다. 에델라는 이런 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간신히 미소를 띨 수는 있었다.
“그럼 우린 이제 신부 쪽에도 인사를 해야 해서 말이죠. 조심히 가세요.”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모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를 데리고 예로니아 백작 내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오! 내 딸!”
“어머니! 아버지!”
분명 오늘 아침에 얼굴을 봤을 텐데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그들은 애틋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그래…….”
아직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예로니아 백작은 연신 에델라의 손을 토닥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은 그 옆에서 연거푸 손수건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닦고 있었다. 테라비스의 눈에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이 둘은 테라비스와 에델라의 사연을 다 아는 것 같았다. 저렇게 슬퍼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점이 슬슬 테라비스를 열 받게 만들고 있었다. 둘은 엄연히 대등한 쌍무적 계약관계였는데, 이건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해서 억지로 결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자, 즐겁고 행복한 결혼식에서 이런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테라비스는 활기차게 이야기를 하며 에델라의 허리에 손을 감아 자신의 쪽으로 살짝 당겼다. 덕분에 애틋하게 잡고 있던 부녀의 손이 떨어졌다.
“따님은 제가 잘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꽤 근사하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아닙니까?”
“…….”
“…….”
“…….”
테라비스의 말에 마치 짠 듯이 예로니아 가의 세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 전에 결혼식을 치렀으니, 예로니아 백작 가의 두 사람과 에델라 드 바넬레오가 테라비스의 말에 대꾸해주지 않은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예요.”
애써 웃으며 에델라가 말하자 백작 내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다 잘될 겁니다.”
에델라의 말을 반복하며, 테라비스는 방긋 웃었다. 이미 무사히 결혼식도 올렸지 않은가? 테라비스와 에델라는 이제 공식적으로 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