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계약 성립2021.05.10.
“감사합니다. 저를 도와주셨군요.”
아쉽게도, 참으로 아쉽게도 에델라가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갔다. 솔기가 터져버린 낡은 구두가 갑자기 테라비스의 눈에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몸을 감싸고 있는 낡은 드레스가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당황하고 있는 저 하얀 얼굴을 어떻게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테라비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테라비스는 흥정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이 여자는 비싼 대가를 치를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 이 계약을 놓치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에 유능한 장사치의 본능적인 발언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 같군요.”
“정말요?”
갑자기 변한 테라비스의 태도에 에델라의 얼굴에는 순수하게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귀엽기는.’
그리고 그런 에델라를 보면서 테라비스는 귀엽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앉아서 계약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요?”
테라비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입 싼 녹스 할망구에게 축복이 있기를.
“자,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면 말씀해보시죠.”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피부만큼이나 하얀 종이를 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에델라는 테라비스에게 한눈에 반해서 그에게 청혼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는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다. 무릇 제안이라고 하는 것에는 조건이 있는 법이었다.
“저희 집안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흐음…….”
테라비스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했다.
“전혀요.”
“그러 실 거예요. 녹스 할멈이 당신은 이 도시에 정착한 지 10년 정도 되었다고 말해 주었어요. 그동안 저희 집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잠시 단어를 고르는 듯했던 에델라는 간신히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은……?”
그러나 테라비스에게는 그다지 직관적이지 않았던 듯했다.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요.”
그 정도야 테라비스도 충분히 알았다. 오히려 귀족이 아닌 자신이 사교모임에는 종종 불려가곤 했다. 이 작은 항구도시에서 큰 손인 테라비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루젠타에서 붉은바람 상단의 물건 없이 살려면, 알몸으로 쫄쫄 굶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맹세코, 테라비스는 그 어느 곳에서도 에델라를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저런 낡은 드레스에, 이제는 구멍이 빠끔하게 난 터진 구두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테라비스는 말을 고르는 척을 했다.
“망한 귀족 집안이라는 거군요.”
그야말로 척만 했을 뿐이었다. 그의 직설적이고 무례한 언사에 에델라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내 크게 숨을 한번 쉬곤, 애써 태연한 척 테라비스를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그야말로 호수같이 잔잔한 눈동자가 테라비스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알기 쉬우면서도 쉽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여자.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평가를 수정했다.
“제가 한번 맞춰보죠. 그럼 영애께서 원하는 것은 돈이겠군요?”
“네. 그것도 맞아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에델라 양께서 제안하시는 것은 우리가 결혼해서 나는 백작 작위를 얻게 될 것이고, 에델라 양은 돈을 얻게 되는 것이겠군요.”
“정확해요.”
언뜻 보면 참으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제안이었다. 에델라는 필요한 돈을 얻고, 테라비스는 필요한 작위를 얻게 될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를 원하죠?”
“5억 루나요.”
“휘유~.”
얌전해 보이는 아가씨가 부른 큰 금액에 테라비스는 휘파람을 불었다. 5억 루나라면 보통의 평민이 죽기 전에 모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그리고 테라비스의 휘파람 소리에 에델라의 입술이 바싹 말라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축였다. 또 그리고 그런 에델라를 보며 테라비스가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누가 밀고, 누가 당기는지 모를, 빙글빙글 돌고 도는 관계였다.
“결혼 하나 하는데 남자 쪽 지참금이 그렇게 비싼지 몰랐네요.”
에델라가 요구한 5억 루나라는 금액에 테라비스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냥 결혼이 아니니까요. 귀하께서는 작위를 가지게 되는 거예요. 대대손손 물려줄 수 있는 높은 이름을 가지게 되시는 거예요. 바넬레오 백작님이라는 이름을요.”
에델라는 침착하게 사실을 되짚어 주었다. 장사치의 본능을 숨기지 못하고 금액을 좀 깎으려고 했던 테라비스는 에델라가 생각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큰 도박이네요. 5억 루나라는 거금을 지불했는데, 아침에 눈 떠보니 영애께서 달아나고 없다면?”
“그렇지 않을 거예요.”
“생각보다 예로니아 백작님께서 오래 살아 계신다면요? 나보다 더 오래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법이죠.”
“아버지께서는…….”
에델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지 바르르 떨다가 다시 꾹 다물었다.
“병이 있으세요. 그리 오래 사시지는 못하실 거예요. 병원비가 없으면 더 빨리 돌아가시겠죠.”
떨리는 목소리로 에델라가 말하자, 그때만큼은 테라비스도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처음으로 싸늘한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감쌌다.
“정확하게 병원비가 어느 정도 필요한 거죠?”
“병원비만 월 3백 루나 정도 필요해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영애에게 월 5백 루나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테라비스의 제안에 에델라는 멈칫했다. 일시불이 아니긴 하지만, 그정도의 금액이라면 아버지의 병원비로 충분했다. 또한 남는 돈으로 어머니께서 생활하시기에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에델라까지 세 식구가 한 달에 5십 루나도 안되는 돈으로 아끼고 아껴서 살아왔으니까. 오히려 돈이 남아서 저금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에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되겠군요. 제1항. 테라비스 바넬레오와 에델라 드 예로니아는 결혼 계약을 체결한다. 제2항. 테라비스 바넬레오는 계약에 대한 보수로 계약 기간 동안 에델라 드 예로니아에게 월 5백 루나를 지급한다. 제3항. 에델라 드 예로니아는 테라비스 바넬레오가 백작 작위를 받는 데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테라비스는 빠르게 말하며, 그만큼이나 빠르게 흰 종이에 그 내용을 적어 내렸다.
“더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아뇨. 지금은 없어요.”
“그럼 나중에 혹시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합의하에 추가하도록 하죠. 한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테라비스는 어느새 그럴듯하게 작성된 계약서를 에델라의 앞으로 내밀었다. 에델라는 그것을 꼼꼼하게 보더니, 먼저 사인을 한 테라비스의 서명 아래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서명을 했다. 여기에 찾아오기 전에 이미 충분히 망설였으니, 이제는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자, 이제 우리의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테라비스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에 손을 얹으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내민 것이 아니라, 동등한 거래 상대를 대하듯 손날이 아래로 향한 방향이었다. 에델라의 작은 손이 테라비스가 내민 손을 붙잡자,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겼던 에델라처럼 그녀의 손이 테라비스의 손에 폭 안겼다. 가볍게 악수를 하고, 에델라가 손을 놓으려는데 테라비스가 다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싱긋 웃는 테라비스를 보며, 에델라 역시 살짝 웃었다. 참으로 만족스러운 계약이라고 둘 다 생각했다. 그저 계약이라고만 말이다.
* * *
“에델라!”
에델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예로니아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물이 뚝뚝 흐르는 물수건이 들려 있었다.
“다녀왔어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백작 부인의 손에서 물수건을 건네받은 에델라는 옆에 마련된 대야에 물이 너무 많지도, 작지도 않을 만큼 짜내어 누워 있는 백작의 이마에 얹었다. 그러면서 슬쩍 그의 뺨을 만져보자 다행히 오늘 올랐던 열은 내린 것 같았다.
“정말 거기에 다녀온 거니? 아니지?”
“다녀왔어요, 어머니.”
“에델라!”
“쉿! 아버지가 깨시겠어요.”
검지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에델라가 이야기하자, 백작 부인은 얼른 누워 있는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가지런히 감겨 있는 눈이 다시는 못 뜨는 것이 아닐까하고 마음 졸였던 하루를 생각하니, 그녀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맺혔다.
“이 방법밖에는 없어요. 이대로 아버지는 보내드릴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고요.”
에델라는 거의 모든 가구를 팔아치우고, 고작 침대와 의자 하나밖에 남지 않는 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고귀한 귀족 출신인 네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 그런 장사치 평민과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돈 때문에!”
“그냥 계약이에요, 어머니. 그는 제 손을 잡고 악수를 했어요. 동등한 계약파트너라고 본 것이라고요.”
에델라는 파트너라는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테라비스는 에델라를 거지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테라비스가 그녀를 그렇게 대했다면, 제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고 간 에델라라도 수치심과 모멸감에 그 자리를 뛰쳐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당한 사업상의 파트너처럼 악수까지 했다. 그것이 에델라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악수했다니, 그럼…….”
“네, 계약을 성사시켰어요. 처음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그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월 5백 루나의 돈을 받기로 했어요. 그 돈이면 아버지의 병원비도, 어머니의 생활비도 충분할 거예요.”
“오! 에델라!”
결국,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야 말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자신은 곱게 자란 귀족 영애였고, 루젠타에서 이름있는 예로니아 백작가로 시집을 와서 행복했다. 남편은 자상했고, 비록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지만 아이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마음씨까지 고왔다.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예로니아 가문이 이렇게 몰락하지 않았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백작 부인은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까지 잡아주며 위로를 하는 딸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흘려야 할 에델라는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젠타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불쌍한 에델라.’ 세간에서 불리는 딸의 별명이 예로니아 백작 부인의 가슴에 선연히 박혀왔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