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처음 본 여자의 제안2021.05.07.
테라비스의 사무실로 들어온 것은, 한 명의 여자였다. 그녀의 드레스는 낡았고, 싸구려 같아 보였다. 몸에는 흔한 반지나 목걸이 하나도 없었다. 구두는 닳고 닳아 옆 솔기가 빠끔히 벌어진 것까지 보였다. 테라비스의 시선이 구두에 닿자 여자가 슬그머니 발을 뒤로 빼서 그것을 감추려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모든 것은 낡았고, 초라해 보였다. 단 한 가지, 그것들을 두르고 있는 여자 그 자체를 빼고는. 하얗고 갸름한 얼굴에 새겨진 이목구비는 그저 빼어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동그란 아치를 이루고 있는 눈썹 아래의 파란 눈동자는 한여름의 바닷가처럼 아름다운 물빛을 띠고 있었고, 날렵한 콧대는 조금의 삐뚜름함도 없이 딱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아래의 도톰한 입술은 뭘 감추고 있을지 궁금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빛나는 금발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누런 종이에 아무렇게나 싸여 있는 보석. 테라비스가 그녀를 평가하자면 바로 그것이었다. 만약 눈앞의 여자가 물건이라면, 사람의 구매욕에 불을 댕기는 물건이리라! 뼛속까지 장사치인 테라비스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지만 물건의 값을 흥정하기 전에는 늘 그렇듯, 자신이 그 물건을 매우 마음에 든다는 것을 티를 내서는 안 됐다. 테라비스는 바쁜 사람을 왜 갑자기 찾아왔냐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것보다, 누구시죠?”
“제 이름은 에델라 드 예로니아. 예로니아 백작 가의 외동딸입니다.”
바싹 당겨진 턱이나 꼿꼿이 앉은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겼었는데, 역시나 귀족이었다. 그녀의 이름에 들어가 있는 ‘드’ 가 그것을 뜻했다. 테라비스 바넬레오. 그의 이름에는 없는 그 빌어먹을 ‘드’.
“그래요. 에델라 양.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테라비스는 눈앞의 여자가 귀족이라는 사실에 괜히 입이 써서 책상에 놓인 담뱃갑을 열었다. 최고급품 시가의 향긋한 냄새가 테라비스의 코를 자극했다. 고상한 숙녀의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예의겠지만, 안타깝게도 테라비스는 그런 예의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오늘의 테라비스는 귀족들에게만은 최선을 다해서 무례하게 대하고 싶은 상태였다.
“…….”
조금 전까지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에델라는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고, 뭔가 말하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정작 단어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테라비스는 느긋하게 기다리며, 시가를 입에 물었다. 불이 어디 있더라?
“제가 당신에게 제안하려는 것은 결혼입니다.”
아. 저 귀족 영애께서 내게 제안하려는 것이 바로 결혼이었군……. 뭐? 툭-. 테라비스의 입에 걸려 있던 시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시가를 물고 있어야 할 테라비스가 입을 쩍 벌린 탓이었다.
“뭘…… 제안한다고요?”
“결혼이요.”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이, 에델라는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다시 내뱉었다. 에델라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눈썹이 가운데로 모여서 찌푸려져 있었고,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귀가 살짝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한 제안이 예의를 배우고, 교양을 겸비한 귀족 영애가 입 밖에 낼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반대로 그런 에델라의 모습에서 테라비스는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닌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조금…… 갑작스럽군요.”
테라비스는 애써 침착한 척을 하며 이야기를 했지만, 바닥에 떨어진 비싼 시가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녹스 할멈에게서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녹스 할멈이라면, 테라비스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 중의 하나였다. 요리를 특히나 기가 막히게 해서 테라비스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이름까지 기억하는 늙은 하녀였다.
“녹스 할멈은 당신이 작위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말하더군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예로니아 백작 가의 무남독녀이며, 저희 아버지는 백작이시죠.”
요리 솜씨나, 말하는 투가 어쩐지 어릴 적 테라비스를 키워주었던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들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늘어놓았었는데, 그녀가 그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 아가씨께 한 모양이었다. 망할 입 싼 녹스 할망구.
“그런데요?”
“저와 결혼을 하면, 당신은 백작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어요.”
“나더러 데릴사위가 되라는 겁니까? 하지만 그저 데릴사위로는 장인의 백작 작위를 이어받을 수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사실, 이제껏 테라비스가 그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저 먼 수도에서 존엄하신 왕가의 이름으로 작위를 수여 받을 방법을 알아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가서 이름을 드높이거나, 엄청난 예술작품을 탄생시킬 재주가 장사치에게는 없었다.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껏 테라비스의 고민을 날려버릴 방법이 있다고, 눈앞에 아름다운 아가씨는 제법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쪽과 제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리고 백작 작위를 가진 아버지께서 언젠가 작고하시게 되면, 여자인 저는 백작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으니, 그 작위는 손자인 아이에게 물려주게 돼요.”
“그런데요?”
“하지만 페이넬 제국의 법률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귀족 가의 자제는 작위를 이어받을 수 없어요. 형제간의 다툼을 방지하기 위함이죠.”
“그럼 돌아가신 아버지의 작위는 어떻게 되죠? 아이가 다 클 동안?”
“바로 그거예요. 아이가 자라는 동안, 아이의 후견인이 그 작위를 맡아두게 되죠.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 그 작위를 물려주게 되는 거죠.”
살짝, 테라비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의 후견인이 되는 건 그리 비상식적인 일이 아니죠.”
에델라는 이야기를 끝마쳤고, 테라비스는 그것을 아주 완벽하게 이해했다. 드디어! 드디어!! 돈만 밝히는 졸부가 아니라, 존경하는 백작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 빌어먹을 ‘드’가 붙은!
“별로인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폭죽을 터트렸지만, 테라비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에델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마음속으로는 구매 욕구가 동해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 것이 장사의 기본이었다. 닳고 닳은 장사치인 테라비스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고고하신 귀족 영애인 에델라는 그것을 몰랐다.
“결국 나더러 데릴사위가 되라는 건데, 남자의 체면이 살지 않아.”
입술까지 비쭉이며 말하는 테라비스의 태도에 에델라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하얗게 변한 에델라의 손을 바라보며, 테라비스는 문득 저 손에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와그작 깨물거나.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나?”
어느새 테라비스는 유들유들하게 귀족 영애인 에델라에게 반쯤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에델라는 지금 눈앞의 테라비스가 예의도 지키지 않고, 자신에게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이 저희 아버지의 양아들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어요.”
“그럼 내가 테라비스 드 예로니아가 되는 건가?”
“그렇죠.”
“테라비스 드 예로니아라……. 더 최악이군. 뭔가 기생 오라비 같은 이름이 되어버리잖아.”
또 별로라는 테라비스의 말에 에델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패를 전부 보여주는 여자였다. 장사를 시킨다면 보름을 못 가서 전 재산을 말아먹고 말 거라고 테라비스는 생각했다.
‘결혼 후에 내 사업이나 장사 쪽에는 얼씬도 말라고 해야겠군.’
조금 전까지 에델라에게 별로라고 말을 한 테라비스는 이미 결혼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제안은 없나?”
“……없어요.”
밀랍 인형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에델라가 말했다.
“실례가 많았네요.”
에델라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찾아온 자신의 흔적을 얼른 지우고 싶기라도 하듯이.
“아, 배웅해드리지.”
사실은 에델라가 너무 급하게 일어난 것에 당황했지만, 테라비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에델라를 좀 더 붙들어두고,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낸 다음, 대가를 흥정하고, 그녀를 흔들어보고, 협상해야 할지를 생각하면서.
“아니요. 괜찮아요. 돌아가는 길은 알고 있어요.”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거절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앞질렀다. 지금이라도 다시 앉으라고 할까? 아니면, 지금은 일단 보내고 하루 정도 초조하게 만든 다음에 녹스 할멈을 통해서 연락해볼까? 복잡하게 머리를 돌리며, 테라비스가 사무실 문을 붙잡은 순간이었다.
“문을 열어…….”
“앗……!”
다급하게 걸어가던 에델라의 신발 솔기가 때마침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무게 중심이 기운 에델라는 순간 휘청였고, 그녀의 앞에 있던 테라비스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에델라의 손목을 붙들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자, 에델라는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그의 쪽으로 당겨져 왔다. 커다란 테라비스의 품안에 에델라가 답싹 안겼다. 그 순간, 에델라의 손이 테라비스의 가슴팍에 닿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져본 남자의 가슴은 나무보다도 단단했고, 얇은 셔츠 너머로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은은한 심장박동이 에델라의 손에 느껴졌다. 아니, 은은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남자의 심장은 작은 북이 점점 소리를 키우는 것처럼 그 울림을 더해가고 있었다.
“…….”
“…….”
테라비스의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는 것은 당연히 그의 품에 안긴 에델라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에게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에델라는 그의 품에 쏙 들어왔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꽃향기가 테라비스의 코를 간질였다. 장미? 라일락? 히아신스? 테라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꽃의 종류를 떠올렸지만, 에델라에게서 나는 꽃향기는 그 무엇과도 똑같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의 냄새보다도, 테라비스를 더 설레게 만드는 향기였다.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테라비스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품에 안긴 에델라를 바라보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금발이 자신의 흰 셔츠에 흐드러져 있었고, 창백하리만큼 하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테라비스는 아찔해졌다.
“저, 저기……. 이제 괜찮아요.”
창백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에델라의 귀는 지금 이 자세가 너무나도 부끄럽다는 듯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테라비스는 이상하게도 그것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여쁜 눈보다, 도톰한 입술보다, 그 빨개진 귀가 더없이 테라비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주,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