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혼, 침실, 첫날밤2021.05.03.
남자는 자신의 앞에 있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여긴 식당. 원하는 건 뭐든 주방장에게 주문해도 좋아. 비싼 철갑상어 알, 비싼 상어지느러미, 비싼 도롱뇽 눈알, 비싼 원숭이 골. 토할 것 같은 가격이겠지만, 그건 상관하지 말고.”
토할 것 같은 이유는 가격이 아니라 그가 나열한 징그러운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라고 에델라는 생각했다. 상어지느러미까지는 어찌어찌 넘어가더라도, 대체 누가 짐승의 눈알이나 골을 먹는단 말인가? 게다가 어째서 식당의 벽지를 저런 식욕이 싹 달아날 것 같은, 오염된 강의 녹조 같은 색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긴 당신 드레스룸. 지금은 비어 있지만, 쇼핑을 나가서 채워도 괜찮아. 너무 많이 사지만 않으면.”
에델라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쇼핑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도 잊고 산 지 오래였다. 돈이 없는 몰락 귀족에게 쇼핑은 그야말로 사치였다. 이상한 눈알 모양의 벽지와 지옥의 성좌에나 어울릴 것 같은 거울을 못 본 척하며 에델라는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긴 서재. 뭐, 당신이 별로 들어올 일은 없겠지.”
환한 빛이 쏟아지는 창문 쪽을 제외하고는 서재의 벽들에는 전부 높은 책꽂이가 들어차 있었고, 그곳에는 책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덕분에 이상한 벽지 색깔도, 실내장식도 보이지 않아서 매우 정상적으로 보였다. 그의 말과는 반대로 에델라는 이곳이야말로 나중에 반드시 다시 들어와 보리라고 생각했다. 쇼핑에는 취미가 없지만, 책이라면 좋아했다. 거의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국립도서관에서는 책을 무료로 대여를 해주니까. 틈이 나면 항상 도서관을 찾았고, 한가로운 날에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에델라였다.
“자, 그다음에는…….”
“책은 어떤 책들이 있죠?”
남자는 커다란 보폭으로 곧장 다음으로 가려고 했지만, 에델라의 질문에 잠깐 멈춰 섰다.
“글쎄? 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네?”
“이런 대저택에 서재 정도는 있는 게 모양새가 좋다고 해서 책을 사들였을 뿐이야. 뭐가 있는지는 몰라. 게다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책 따위를 누가 읽는다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남자는 말했다. 자기 집, 자기 서재의 책이 뭔지도 모른다고, 읽지도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 남자는 당당했다. 아니, 뻔뻔했다.
“자, 여기가 침실.”
남자는 황당한 표정의 에델라를 본척만척하고, 그 맞은편의 방문을 열었다.
“아……!”
침실을 마주한 순간, 에델라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뿌듯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삐뚜름하게 입에 걸쳤지만, 사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탄성은 감탄에서 나온 탄성이 아니었다. 그 방의 실내장식은 이제껏 본 복도, 식당, 서재 등을 통틀어서 가장 최악이었다. 짙은 남색의 벽지와 대조되는 빛바랜 것 같은 와인색의 커튼이 달린, 마치 외증조부가 어제까지 쓰던 방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색상의 조합이 에델라의 눈에 아프도록 박혔다. 그 중앙에 놓인 매우 비싸 보이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장식장은, 남색의 벽지와 와인색의 커튼과는 완벽하게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이었다. 게다가 어째서 커다란 수사슴의 헌팅 트로피가 침실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인지 에델라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은 방의 가운데에 자리한 침대였다. 사람 다섯 정도는 뒹굴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는 흰색의 아름다운 레이스 커튼까지 달려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방의 인테리어와는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지만,
“자, 그럼.”
분명 커다랗고, 비싸 보이고, 고급스럽지만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추상화처럼 섞여 있는 침실을 훑어보던 에델라의 손목을 남자가 잡아끌었다. 그리고 풀썩. 그녀를 그나마 봐줄 만하던 그 침대에 눕혔다.
“이제 필요한 일을 해야겠지?”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서 삐뚜름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고급 양장점에서 비싸게 맞췄다고 말한,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눈이 아플 정도로 새파란 재킷을.
“필요한 일이라뇨?”
에델라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자신의 타이를 풀어냈고, 그것을 대충 던져버리자 그것은 흐리멍덩한 눈빛을 발하고 있던 수사슴의 뿔에 걸렸다.
“그대와 나 사이에 필요한 일.”
남자는 에델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가 셔츠의 단추를 중간까지 풀어내자, 옷깃 사이로 탄탄한 그의 가슴근육이 보였다. 귀족 도령들이 유희처럼 하는 검술로 겨우 만들어 낼 법한 비쩍 마른 허연 가슴이 아니었다. 매일 매일을 단련하는 검사들이나 가질법한 탄탄한 근육이었고, 땡볕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같은 구릿빛의 가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속살에 에델라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저, 저기…….”
에델라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셔츠를 벗어 던진 뒤였다. 그래도 바지를 벗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에델라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녀의 옆자리에 푹- 하고 침대가 꺼졌다. 한쪽 다리를 에델라의 오른편에 얹고, 한쪽 팔을 그녀의 얼굴 옆에 짚은 남자가 거의 그녀를 덮치듯이 에델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볕에 그을린 피부의 온기가 에델라에게 느껴질 만큼,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숨결이 에델라의 입술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래서 더욱 잘 보였다. 고집 센 성격을 반영이라도 하듯 짙은 그의 붉은 눈썹이. 모든 것을 가져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은 탐욕스러운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뻗은 콧날이. 당장이라도 에델라를 말끔하게 삼켜버릴 것 같은 붉은 입술까지. 에델라의 시선은 얼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내려갔다. 굵은 목선과 툭 튀어나온 애덤스 애플은 그의 사내다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고, 넓은 어깨는 매우 단단해 보였다. 아까 보았던 실팍한 가슴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각가가 정성을 다해 다듬은 것 같은 잘 쪼개진 복근에까지 에델라의 시선이 이르렀을 때, 어릴 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정숙한 숙녀의 마음가짐도 잊고 슬그머니 엉큼한 마음마저 들었었다.
“어떤 걸 좋아하지?”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에델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 보았던 그 진한 눈빛이 욕망으로 더욱 얼룩져서 에델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하는 대로 해줄게.”
처음에 에델라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가 뭘 묻는지 몰라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거라면, 나랑 취향이 똑같군.”
남자가 에델라의 치마에 손을 대며 슬쩍 그녀를 옆으로 돌렸을 때, 그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에델라는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두근거렸던 가슴이 차게 식었다. 이런 남자였다. 처음 보았던 그 날에도 보았고, 들었고, 느꼈지 않았던가? 그저 돈만 많은, 기품 없고 무례한 남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 그만 해요!”
에델라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뭐?”
막 에델라의 얼굴에 키스하려던 남자는 대상이 없어지자 황망해진 표정으로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어이가 없다는 듯, 남자는 콧방귀를 뀌며 에델라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그 모습은 터무니없게도 섹시했다. 맙소사. 방금 그 무례한 말을 듣고서도 남자의 찌푸린 모습이 섹시해 보이다니? 에델라는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했다.
“우리는 확실한 계약관계가 아니던가?”
남자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오늘 첫날밤이잖아?”
남자와 에델라는 계약관계였다. 그저 돈만 많은, 기품 없고 무례한 남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이 남자가 에델라에게는 절박하게 필요했다.
“이리 와, 에델라 드 예로니아.”
몰락한 예로니아 가문의 에델라는 루젠타의 소문난 졸부, 테라비스 바넬레오와 계약 결혼을 했다. 에델라는 테라비스의 부인이었으며, 테라비스는 에델라의 남편이었다. 바로 오늘부터. * * *
“제기랄!”
테라비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거의 집어 던지듯이 책상에 내려놓았다.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의 아래쪽에 빠끔히 보인 글자는 아주 정중하고, 완곡한 거절의 말이 적혀 있었다. - 귀사에서 보내온 제안은 매우 훌륭하고 매력적이나, 안타깝게도 본사의 거래처로 파트너십을 체결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어…….
“빌어먹을!”
눈에 거슬리는 단어들이 닿자, 테라비스는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이 말하는 결격사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테라비스는 뻔히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귀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귀하신 귀족님들이 사용하실 물건을 거래하는데, 감히 평민 출신 졸부인 테라비스의 붉은바람 상단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루젠타 보석상이 테라비스가 제시한 가격보다 더 비싼 비용을 받고 있는 비에라 자작가에서 운영하는 비에라 상단과 거래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멍청한 놈들! 귀족 따위가 뭐라고!”
분을 이기지 못한 테라비스는 쾅! 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손이 얼얼하게 아플 법도 했지만, 테라비스는 개의치 않았다. 손보다 분노가 더 그를 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은바람 상단은 현재 페이넬 제국의 작은 항구도시인 루젠타에서 가장 잘나가는 상단이었고,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가장 안정적으로 물건을 공급할 수 있는 상단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물품의 거래에서는 빈번하게 이렇게 물을 먹곤 했다.
“드! 드! 드! 그 빌어먹을 드가 뭐라고!”
테라비스가 1년간 공을 들인, 루젠타에서 가장 큰 보석상과의 거래는 또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테라비스가 ‘테라비스 드 바넬레오’가 아니라 그저 ‘테라비스 바넬레오’라는 이유만으로.
“제기랄! 내가 억울해서 어디 가서 귀족 문서라도 사 오든지 해야지!”
당연히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테라비스는 소리쳤다. 적어도 그가 평민인 것을 모두가 다 아는 루젠타에서는 불가능했다. 다른 곳에서 귀족 행세를 하려면, 그가 지난 8년간 루젠타에서 피땀으로 일궈낸 붉은바람 상단을 버려야 했다. 그런 가정들마저도, 불법으로 귀족 문서를 매매하다가 걸려 수많은 모독죄로 테라비스가 사형당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했다.
“빌어먹을!”
테라비스가 답답함에 버럭 고함을 지른 순간이었다. -똑똑. 청아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가 화가 나 있는 순간에는 상단의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지금의 노크는 이례적이었다.
“저기,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오늘 약속된 손님은 없었다. 루젠타 보석상에 제안한 결과가 나오는 날이니만큼, 축배를 들거나 폭주를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테니까. 결과는 후자였고, 지금 테라비스의 기분은 그야말로 손님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속도 없이 찾아온 손님을, 지금 이 타이밍에 굳이 테라비스에게 알렸다는 것은 문밖에 서 있는 손님이 평범한 손님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들어오시죠.”
테라비스는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고, 평정을 가장해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손님을 본 순간 테라비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