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여운 스승님이 사실은 흑의 마왕이었습니다!-157화 (완결) (158/158)

(EP.157)당신과 함께라면(完)

꿈을 꿨다.

밀려나면서, 공간을 빠져나가면서.

아니, 그게 꿈일까.

꿈이었을까.

혹은.

누군가의 기억이었을까.

공허한 세계였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 버린 대륙에서.

‘그’는 홀로 남았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

시간은 되돌려지고, 곧 이곳은 버려지게 된다.

그걸 직감한 사내는 절망에 빠졌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두 번째로는 분노했다.

자신을 이곳에 버리고 간 존재를.

화이트 클리포트라는 인간을.

……그렇지만 알 수 있었다.

그마저도 ‘자신’이었다.

근본적으로 같은 존재.

그렇기에 이해는 한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방식과 신념, 품고 있는 생각마저 전부 똑같았으니까.

……그렇지만.

이해는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분노와 절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 거였나.’

그 광경을 보면서, ‘화이트’는 그제야 모든 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분노하며 증오의 사슬에 묶인 사내.

버려진 세계에 남겨진 사내.

백의 마왕.

화이트.

그건 과거였을까, 혹은 미래였을까.

알지는 못하겠지만,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의 마왕의 기억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증오와 원망, 그리고 끔찍한 고독함에 잠긴 기억을 엿보았다.

그 모든 게 파도와도 같이 엄습해 들며 전신을 장악해 나갔다.

감정을 이해한다.

그의 생각을 이해한다.

“…….”

여전히,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그와 자신,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으니까.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조금.

아주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시간이 되돌아간다.

멈춰졌던 게 풀리며, 세계는 다시금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

화이트의 눈이 뜨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시간이 멈춘 후유증으로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있는 아셰라였다.

“……제, 자님.”

와중에도 자신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화이트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제자님?”

그리고 그 웃음 소리를 들은 걸까.

아셰라가 황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이어서 화이트를 눈에 담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물기에 젖기 시작했다.

……뭔지는 모를 거다.

그녀로서는 시간에 개입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화이트가 어느 공간에서, 얼마나 되는 세월을 보내고 왔는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렴풋이나마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테지.

그 자신의 제자가, 누군가와 결착을 내고 돌아왔다는 것 정도는.

“…….”

아셰라는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이를 악물며, 두 눈을 애써 부릅떴다.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으나, 그조차 인식하지 못한 듯이.

그녀가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왜 그랬나요.”

처음으로 내뱉는 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화이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일 즈음, 그녀가 말을 이어나갔다.

“왜 굳이 혼자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시치미 떼지 마요.”

화이트의 능청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아셰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주먹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요?”

정확하게 풀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화이트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만 같았다.

그녀도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글쎄요.”

“…….”

그러나 화이트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실을 입에 담는 대신, 부정을 택했다.

그녀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아셰라의 화를 부추겼다.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화이트.”

“…….”

어울리지 않게, 혹은 흔치 않게.

그녀가 강경한 어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저를 믿지 못했던 건가요. 왜 저를 놔두고, 혼자 위험한 짓을 한 거냔 말입니다.”

“……스승님.”

화이트가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무척이나,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하하.”

그러나, 그 속에 깃든 자신을 향한 걱정이 엿보였기에.

화이트는 웃음을 흘렸다.

“……지금, 웃은 건가요?”

그리고 그걸 아셰라가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다.

이를 갈며,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그렇게 분노를 더욱 드러내려는 순간이었다.

“─아셰라.”

“……!”

돌연 몸을 일으킨 화이트가, 곧바로 아셰라를 끌어안았다.

꽈악-

강하게, 무척이나 강렬하게.

놓지 않겠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제자님?”

그에 당황한 건 아셰라였다.

뭔데 안겨 오는 건가.

지금 자신이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런 기색이 그녀의 표정에서 묻어나왔다.

“…….”

그런 그녀를 그저 강하게 끌어안으며, 화이트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어냈다.

“조금 공허하네요.”

“……뭐가 말인가요?”

아셰라의 말투가 한층 차분해졌다.

동시에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변화에 다시금 웃음을 흘리면서, 화이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상실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

“약간 씁쓸합니다. 죄책감은 아닌 것 같지만, 그 비슷한 무언가는 맞는 것 같고.”

계속 중얼거리듯 내뱉는 화이트였으나, 당연히 아셰라는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하, 그냥 혼잣말이라고 생각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눈가를 짓누르며, 화이트가 천천히 아셰라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잡고는, 그녀와 눈을 맞춘다.

“…….”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꽤 많았던 것 같기도 한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그 공간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소비했으니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아셰라를 붙잡고 버틴 만큼, 그녀에게 할 말은 제법 많았는데…….

“이제 다 끝났습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별달리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저 싱긋 웃으며, 끝을 고하면 될 뿐이다.

“샤사르도, 백의 마왕도. 위협은 전부 사라졌어요.”

“……그런가요?”

아셰라가 되물었으나, 의문이 담긴 기색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납득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잠깐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아셰라.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하게 바뀌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저 화이트와 마찬가지로,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칠 따름이었다.

화이트도 그녀를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거듭 말하지만, 할 말은 많았다.

지금도 떠오른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말들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리라.

아셰라와 자신에게는, 앞으로의 시간이 넘쳐났으니까.

천천히.

그곳에서의 이야기는 천천히, 그렇게 풀어놓으면 되리라.

“……음.”

잠깐 아셰라를 지그시 바라보던 화이트.

이어서 그가 아셰라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읍…….”

잠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아셰라였으나, 이내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

입술을 떼어내며, 화이트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보이는 건 많았다.

우선 제도가 괴멸 상태였다.

저 멀리,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테이칸 클리포트와 리이칸테르 후작이 보였다.

루시펠과 프리드리히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아셰라와 달리, 시간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후우.”

얕게 숨을 내뱉는다.

돌아왔음을 체감한다.

눈을 감으며, 한 명의 사내를 떠올린다.

-이만 아셰라의 곁으로 가.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 역시 떠올린다.

씁쓸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는 샤사르와 다르게 명백한 적이라고 인식되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굳이 말하자면, 서로 다른 길로 틀어진 친구와 대립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친구는, 아니겠지만.’

속으로 중얼거리며, 화이트는 가볍게 고개를 털어냈다.

그에 대한 생각은 이쯤이면 되었다.

나중에.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아셰라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괜찮겠지.

“……이만 가죠.”

화이트가 말했고, 그에 아셰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로 가자고 말하는 걸까.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는 걸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면서,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어디든 좋을 것 같습니다. 클리포트 공작령의 숲이든, 저택이든. 혹은 그나마 무사한 황궁이라도.”

당신이랑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며.

그리 덧붙이고는, 화이트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화이트를 아셰라는 지그시 바라봤다.

‘……뭐라고 화를 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엄히 꾸짖을 필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랬는데, 저런 미소를 보면.

분노가 자연스레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화도 내지 못하게 되지 않나, 이러면.

“……푸흐.”

그게 새삼스레 우스워서, 아셰라는 얕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털어낸다.

잡생각을 지우고, 화이트를 향해 선명한 시선을 보냈다.

“그럴까요, 제자님.”

어디든 좋으니까, 같이 가보자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을 품으며, 아셰라가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화이트와 아셰라는 우선 걸었다.

“그래서, 어디로 갈까요?”

“음……. 역시 우선은 가주의 상태를 보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 맞다. 아버지.”

“……제자님.”

그저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평온한 표정을 띠고 처참히 파괴된 제도를 거닐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쓸데없는 대화가 지나치게 길어졌기 때문에.

그러던 도중이었다.

“아셰라.”

“네?”

지금까지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느긋한 어조와 어투로.

화이트가 입술을 떼어냈다.

“저희 결혼할까요?”

“……네?”

그리고 뱉어진 말에, 아셰라의 움직임이 순간 굳었으나.

화이트는 상관하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면, 이런 말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반응마저도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띄울 뿐이다.

“결혼하죠. 클리포트 공작령으로 돌아가서.”

“……네, 네?”

아셰라의 두 동공이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제자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긴 한가?

‘그,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죠?’

뭐라고 답해야 할까.

애초에 왜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갑작스레 말을 꺼낸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을.

대답, 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아셰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 말해야 하지.

대체 무슨 말을 입에 담아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혼란스러움에 휩싸였다.

그렇기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아셰라는 그저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로, 화이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

그리고, 화이트의 그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안 그래도 하얗던 머릿속이 더욱 새하얗게 바뀌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별다르게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그저, 표정을 붉히고.

시선은 떨면서도 화이트의 눈과 마주하며.

“……네.”

그렇게, 아셰라는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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