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6)평안
죽이고자 했다.
정확하게는, 정신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가 사는 걸 원치 않았다.
죽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백의 마왕이 되었다.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과거로 되돌아가 모든 걸 그렇게 짜 맞췄다.
그런데.
‘왜.’
어째서.
‘죽질 않나.’
무너지지를 않는 건가.
“…….”
백의 마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포기하질 않는 걸까.
어째서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는 걸까.
힘들 것이다.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지금껏 그가 겪어온 그 어떤 고난보다도 어려운 상황일 테지.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일까.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 그뿐만이 아닌가.’
───!
─────!
“……쿨럭.”
처음으로, 백의 마왕이 피를 토했다.
턱선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밀렸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의 힘을 이용한 싸움에서 밀렸다.
시종일관 그 자신이 화이트 클리포트를 압박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 압박감이.
중압감이, 이제는 역으로 덮쳐온다.
백의 마왕의 시선이 화이트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전하게 서 있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움직임은 없었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선 채로,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이 압박감이 되어 자신을 내리누른다.
몸이 어그러질 것만 같은 감각.
지금껏 화이트 클리포트가 느꼈을 감각이, 이제는.
“어떻게?”
백의 마왕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순간 당황했으나, 그럼에도 말을 물리지는 않았다.
의문이 당혹감을 앞섰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나를, 내 힘을 밀어낼 수 있는 거지?”
“…….”
“내가 다루는 힘도, 네가 지금 다루고 있는 그 힘도. 모두 내게 있는 시간의 기운에서 파생된 힘일 텐데.”
애초에 화이트 클리포트가 시간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도, 자신이 그에게 넘겨준 것에 불과할 텐데.
“……어떻게, 네가 나를 압도할 수가 있는 거란 말이냐.”
백의 마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너의 힘도 결국 나의 것일 텐데.”
신체와 정신이 뒤틀린다.
전신에 있는 모든 피가 밖으로 튀어나가려 하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그 감각에, 백의 마왕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리고, 화이트는 그런 백의 마왕을 줄곧 직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떼어졌다.
“집념의 차이지.”
“뭐?”
고개를 치켜드는 백의 마왕.
그의 표정에는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너는 나를 죽이고자 했고, 그 의지에 처음에는 내가 밀렸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그리 덧붙이면서, 화이트가 선명한 안광을 빛냈다.
“말했지 않나. 너도 들었을 텐데.”
“……무엇을?”
“내 목적을.”
“…….”
백의 마왕이 침묵했다.
화이트의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너를 끝내 소멸시키고, 돌아가서, 아셰라를 마주할 거야.
-돌아가서 모든 게 평화로워진 세상을 즐길 거다.
-그 모든 일상에는 나와 아셰라가 있겠지. 그녀와 함께하는 삶은 실로 행복할 거야.
“…….”
으득-
백의 마왕이 이를 갈았다.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 탓이다.
그 기색을 눈치챘을까, 눈치채지 못했을까.
“너는 나를 죽이기 위해, 나는 아셰라를 만나기 위해.”
화이트가 평온한 어조로,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집념의 방향성이 달라. 그리고 그 의지의 강함은 내가 앞섰다.”
“……헛소리를.”
“헛소리라고 생각하면, 그저 그렇게 치부해도 좋아.”
자신은 어찌 되든 좋다고 중얼거리며, 화이트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 마왕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동자에 점차 이채가 서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아셰라를 위해 나를 죽이고자 했다면, 어쩌면 혹시 모르지. 너와 내가 그나마 동등한 점이 있다면, 그건 아셰라를 생각하는 부분에 있을 테니까.”
이어서 내뱉는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군. 왜 그러지 않았지? 너 역시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
백의 마왕은 침묵을 지켰다.
다만, 그 표정에 미세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기색을 읽어내며, 화이트가 말을 이어나갔다.
“진정으로 몰랐던 건가, 그도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고 싶었던 걸까.”
한숨을 내뱉는다.
깊디깊은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겠지. 너 역시, 말할 생각은 없는 것 같으니.”
더 이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화이트가 가볍게 고개를 털어냈다.
잡념을 털어내고,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화이트의 손끝이 백의 마왕에게로 향했다.
“이만 끝내자.”
“──.”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공기가 무거워진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백의 마왕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뿐.
그 역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렇지만, 여전히 표정은 그대로였다.
일그러져 있었으나, 그것이 고통의 탓인 것 같지는 않았다.
파삭-
그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신체가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자 하고 있었다.
그에 오히려 놀란 것은 화이트의 쪽이었다.
“……왜 저항하지 않는 거지?”
당황한 기색으로, 화이트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백의 마왕에게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그건 분명했다.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힘을 끌어올리지 않나.
아직까지는 시간의 힘이 남아 있을 텐데.
저항한다면, 어쩌면 역으로 밀어내는 때가 올지도 모를 텐데.
화이트의 표정이 의구심으로 살며시 찌푸려질 즈음이었다.
“─그만두지.”
백의 마왕의 입이 열렸다.
“……뭐?”
화이트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으며 백의 마왕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는 의미가 없어.”
“……무슨 말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화이트 클리포트.”
백의 마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금, 화이트를 바라본다.
“아셰라는 네가 죽는 걸 원치 않아.”
이어서 내뱉는 말은 그러한 것이었다.
“…….”
화이트의 표정이 잠시 멍하니 바뀌었다.
“너를 죽이고자 했던 건 내 의지였다. 아셰라의 것이 아니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당연한 말이 아닌가.”
화이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지적했으나, 백의 마왕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을 따름이었다.
“알고 있었다. 나는 아셰라를 위해 살 수 없고, 그게 가능한 건 너뿐이라는 걸.”
“…….”
“그래, 어쩌면 그걸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너를 죽이고자 했던 것도.”
아련한 표정으로, 혹은 씁쓸한 기색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백의 마왕은 과거를 회상하듯 중얼거림을 이어나갔다.
“……버려진 세계의 복수도, 나 개인의 복수도. 모든 게 명분, 아니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데.
그렇게 덧붙이며, 백의 마왕이 짙은 회한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네게서 파생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아셰라를 소중히 여긴다.”
그렇기에.
“나는 널 죽일 수 없다.”
“…….”
화이트가 두 눈을 멍하니 깜빡거렸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런 화이트를 바라봤다가.
백의 마왕은 흩어져가는 그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래. 처음부터 이게 맞는 거였어.”
작게 중얼거리고는,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내 풀어진다.
몸에서 힘을 빼며, 백의 마왕이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
마치 죽음을 맞이하듯이.
혹은,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돌아가라. 역시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야. 언제까지고 나와 여기서 싸움을 이어나갈 수는 없겠지.”
“갑자기 무슨 말을─”
그 갑작스런 태도 전환에 화이트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으나.
사아아아-
“……!”
이미 백의 마왕의 몸은 반절이 날아간 후였다.
가벼운 바람에 먼지가 흩어지듯이.
그야말로 쓸쓸하게.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라.”
그런 끝을 원하지 않았던 걸까.
화이트가 다급히 그를 부르며, 처음으로 한 발짝 앞으로 발을 내디뎠으나.
“이만 아셰라의 곁으로 가.”
백의 마왕은 그저 옅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
그리고 그건, 공교롭게도 그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보는 분명한 미소였다.
화이트의 몸이 굳고, 그가 당황하는 사이.
스윽-
“……!”
백의 마왕이 느긋하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짓에.
터엉!
“큭……!”
화이트는 몸이 뒤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단순히 밀려나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근본적으로 밀려나는 듯한.
이 세계에서 멀어지는 감각.
이 공허한 공간 속에서 빠져나가려는 감각.
화이트가 눈을 부릅뜨며 백의 마왕을 노려봤다.
“……! ……!”
다만.
무어라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미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화이트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런, 조금은 허무한 형태로.
무채색의 세계에서 떠나갔다.
“…….”
쿠궁, 쿠구궁…….
처음으로, 공간에 소리가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음이었다.
“후우.”
홀로 남은 백의 마왕은 얕은 숨을 내뱉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공허하게 빛났다.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것도.
자신이 그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도.
죽이기 직전까지 이르더라도, 아셰라가 떠올라 끝내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까지.
“……멍청하고, 아둔한 선택이네.”
어느새 말투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조금은 딱딱했던 어조가 유하게 바뀌어 갔다.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면, 다른 길이 있지도 않았을까.
다른 선택을 내렸더라면, 조금 다른 미래가 있지도 않았을까.
“시간을 다루게 되었어도, 모르는 게 생기는구나.”
쓰게 웃음을 흘린다.
무척이나 아련한 기색으로.
백의 마왕이 눈을 감았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은 함께 사라지게 되겠지.
“처음부터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건 그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자조가 섞인 목소리였다.
“내가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는 건데.”
절로 쓴웃음이 지어진다.
“……이렇게 된 이상.”
결국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건.
“잘 살아라, 화이트 클리포트.”
자신을 위한 게 아닌, 남을 위한 축복을 입에 담는 것뿐.
“너만이라도 아셰라의 곁에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말을 내뱉었다가, 잠시 백의 마왕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게 아닌데.
사실은 본심은 아닌데.
“……하하.”
억지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못 버틸 것 같아서.
“한심하기는. 차라리 그놈을 죽이고, 내가 아셰라의 곁에 남겠다는 생각이라도 품어 보지 그랬어.”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행동에 옮기지 못한 것뿐 아니라,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자신은 화이트 클리포트가 맞았으니까.
……그와 사고방식이 상당 부분 닮아있었으니까.
아셰라가 슬퍼할 만한 선택은 끝내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퍽 괴롭긴 하지만.
“그래,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 제법 멋진 결말이잖아. 끝자락에 가서 희생하는 건.”
마음속 한구석에나마 품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아셰라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게 화이트 클리포트의 본질이었으니까.
“멍청한 놈.”
피식 웃음을 흘린다.
실로 멍청했다.
한심하고, 아둔하며,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아셰라만을 생각하는 삶이라니.
단 한 존재가 세상의 모든 것이라니.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한심하다고 조소를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만, 결국 그것도 나.”
그렇기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속상하고, 씁쓸하고, 동시에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통증이 전신을 잠식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아.”
화이트 클리포트를 위한 게 아니었다.
그딴 놈은 그저 찢어 죽이고 싶을 따름이다.
복수가 명분에 불과했다지만, 복수심이 마음속에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아셰라를 위한 것일 뿐이야.”
그래.
그뿐이다.
그녀에게는 화이트 클리포트가 필요하니까.
“──.”
백의 마왕, 화이트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사아아아-
몸이 파편이 되어 조각이 나도.
모든 게 흩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게 곧 안식이었으니까.
***